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겨울이라 추운 건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너무 추워졌어요.
마순희: 네. 북한에서 살 때를 생각하면 한국의 추위는 아무것도 아닌데 저도 한국에서 거의 20년을 살다 보니 한국사람 다 됐나 봐요. 지금의 날씨가 춥게 느껴지고 바깥 활동보다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습니다. 혹시라도 나갈 일이 있으면 찬바람을 막아주는 겉옷은 물론 방한화에 장갑까지 마치 북극 탐험을 가는 행색을 하고 나가는데요. 빙판길에 바깥나들이를 자제하라고 매일 아침 문자로 문안인지 주의인지 딸들의 당부가 만만치 않아서 요즘엔 매일 다니던 산책도 조금씩 자제하고 있답니다. 대신 집에서 간단한 운동을 하고 TV도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김인선: 저도 요즘처럼 추운 날엔 집에서 드라마 재방송이나 영화를 보는데요. 보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니까요. 전 세계에서 한국드라마가 사랑받고 있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인데요. 탈북민들 중에도 한국드라마에 푹 빠진 분들이 정말 많잖아요?
마순희: 맞습니다. 우리 탈북민들도 모이면 드라마 이야기로 꽃을 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한국드라마를 즐겨 보고 있습니다. 요즘은 다달이 소량의 돈을 지불하면 영화나 드라마를 다시보기로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인터넷 서비스들이 많이 있어서 다른 일정이 없으면 새벽 늦게까지 몰아서 보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저도 그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들은 물론이고 북한에서 읽었던 소설들을 원작으로 만든 외국영화들도 얼마나 재미있게 보는지 모른답니다.
한국드라마 통해 알게 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으로 탈북
지금 북한에서는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이 만들어지고 나서 한국드라마와 영화를 유통시킨 10대 청소년들을 처형할 정도로 단속이 엄격해졌다고 해서 놀랐는데요. 예전엔 그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오늘 소개해드릴 분은 과거 가족들과 함께 한국 드라마를 몰래 보면서 한국에 대해 알게 되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으로 탈북했다는 윤혜진 씨입니다. 북송의 경험까지 혹독히 겪은 후 2013년에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당시 혜진 씨의 나이는 40살이었고 독신이었습니다.
김인선: 2000년대 이전에는 한국영상물을 구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장마당을 통해 구매가 가능해지기 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영상물을 담는 것도 CD에서 USB로 변화하면서 숨기거나 몰래 주고받는 것도 훨씬 수월해졌고요. 그래서인지 제가 만나본 탈북민들 중에도 북한에서 한국영상을 봤다는 분들이 꽤 많았는데요. 대부분 젊은 청년들이었고 출신성분도 좋았어요. 그래서 한국과 관련한 라디오나 비디오를 보다가 발각이 돼도 부모님의 힘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했는데요. 일반적으로는 '한국영상 봤다더라' 이런 얘기만 들려도 신변에 큰 문제가 생긴다고 저는 알고 있거든요. 가족 모두가 함께 봤다는 혜진 씨는 무사했을까요?
마순희: 무사할 리가 있겠습니까? 일반적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한국 영상물을 접한 사람들은 무사하지 못했습니다. 부모님의 힘으로 살아남았다는 말을 했다면 아마도 '돈'이었을 겁니다. 그 돈도 보위부에서 잠시 빼내는 정도로 쓰일 뿐 신변의 무사함을 보장하지는 못했을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살기 위해 북한을 탈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주인공 윤혜진 씨의 경우 아버지가 북한 과학원에서 근무하시었기에 평양시에서 그리 어렵지 않은 생활을 해 왔습니다. 북한에서 자랄 땐 그게 뭐 특별한가 싶었지만 한국에 와서 다른 탈북민들을 만나본 후에야 혜진 씨는 자신이 태어나서부터 부모님 덕에 큰 어려움 없이 고등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고생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혜진 씨는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갈 수는 있었지만 입당이 목표였기에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사회에서 공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사회진출을 선택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아버지가 노동자면 자식도 노동자의 삶을 이어가는 게 일반적이잖아요? 혜진 씨는 아버지가 과학원의 과학자였던 관계로 혜진 씨 역시 과학원에서 청년동맹 부문비서까지 하면서 앞날이 촉망받는 일꾼으로 성장했습니다.
출신성분이 좋아 과학원 청년동맹 비서로
촉망받는 일꾼이었던 그녀
김인선: 제 생각으로는 과학원 일꾼이라면 매일같이 연구하고 개발하느라 다른 분야에 관심을 둘 시간이 전혀 없었을 것 같거든요. 혜진 씨는 언제, 어떻게 한국 영상물을 접했다는 거죠?
마순희: 탈북민들은 북한을 떠나서야 바깥세상을 알게 됩니다. 돈을 벌기 위해 들어갔던 중국에서 세상 물정을 알게 되고 특히 한국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 다반사였는데요. 혜진 씨가 20대였던 시기에는 북한 내에서도 영상물을 통해 한국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혜진 씨의 말에 따르면 과학원에서 일하던 당시 북한에서는 특히 평양시에서는 생활이 일정수준이 되는 사람들 누구나 라디오를 들을 수 있었고 CD로 한국이나 외국의 드라마나 영화를 시청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주파수를 바꿀 수 없는 납땜 된 라디오를 듣지만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은 중국에서 건너온, 주파수를 자유자재로 찾을 수 있는 라디오로 한국방송까지 접할 수 있었다는 거죠. 중국을 오가며 장사하는 사람이나 친인척이 있는 경우 좀 더 일찍 한국을 접해왔던 것입니다.
혜진 씨에게는 오빠와 언니가 있었습니다. 혜진 씨는 그 연줄로 몰래 한국의 드라마를 보게 되었고 세상 돌아가는 물정도 어느 정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북한당국에 발각되어 결국엔 가족까지 잃는 엄청난 고초를 겪었습니다. 이런 경우, 고초의 경험으로 한국 영상물을 보통은 멀리 하게 되거든요. 하지만 혜진 씨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갈망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흥미로만 한국드라마를 본 것이 아니라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한국 생활이 놀라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도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는 갈망이 간절해진 혜진 씨는 탈북을 결심했습니다. 중국에만 들어갈 수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한국으로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중국에 친척이 있다는 지인이 있어서 함께 탈북을 했는데 아시는 것처럼 중국생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불법체류자로 산다는 것이 생각처럼 순탄치 않다는 것은 오직 경험해 본 사람들만 알 겁니다.
한국드라마 시청 발각돼 고초를 겪었지만
그만큼 더욱 간절해진 탈북
김인선: 직접 경험하신 분들이 그러시더라고요. 중국에서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다고, 매일 매일을 북송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함께 목숨을 담보로 지냈다고요. 특히 탈북 여성들의 경우 상당수가 중국에서 원치 않은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겼다고 했는데요. 혜진 씨는 어땠을까요?
마순희: 다행히도 혜진 씨는 그런 아픔을 경험하지는 않았습니다. 중국에 있는 지인의 친척 도움으로 신분을 속이고 일자리까지 잡을 수 있었다는데요. 혜진 씨에게 행운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혜진 씨는 중국공안에 체포되어 북송됐고 북송된 사람들이 겪는 그 모든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한국영상물을 봤다는 이유로 가족을 잃어야 했고 왜 자신도 힘든 고초를 겪어야만 했는지, 바깥세상을 알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안 되는 것인지, 또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보고 싶은 것이 잘못된 것인지 혜진 씨는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수용시설에서 나온 이후에도 혜진 씨의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새로운 생활에 대한 갈망은 더 굳어졌습니다. 가족이 아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 혜진 씨는 다시 탈북을 시도했습니다. 2012년, 다시는 북송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혜진 씨는 무작정 탈북이 아니라 브로커 선도 다 주선 받고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떠났습니다. 아무리 준비를 하고 각오를 단단히 해도 탈북의 여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중국에서 오래 머무는 대신 이번에는 중국을 거쳐 곧바로 라오스, 태국을 거쳤습니다. 수많은 우여곡절과 위험을 겪으면서 혜진 씨는 드디어 2013년에 대한민국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김인선: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으로 탈북을 선택한 윤혜진 씨인데요. 그녀의 바람대로 한국생활을 잘 해냈을까요? 혜진 씨의 남은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계속 됩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