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엄마, 톨게이트 직원 한수정 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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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톨게이트, 그러니까 고속도로 요금소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수정 씨에 대해 이야기 나눠볼게요. 수정 씨는 올해로 8년차, 숙련된 요금소 직원인데요. 이제는 후배들에게도 많은 힘이 되어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직장생활이라는 게 쉽지만은 않잖아요?

마순희: 그렇죠. 무엇보다도 탈북민들은 어느 정도 자리 잡거나 인정을 받기까지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하니까요. 힘들고 어렵다고 중간에 포기하거나 그만두면 비슷한 위치, 비슷한 상황을 반복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수정 씨는 힘든 얘기보다 기쁘거나 좋았던 얘기를 많이 들려줬는데요. 회사생활하면서 가장 뿌듯했던 것이 4대보험에 가입해 보험료를 내면서 회사 생활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김인선: 4대보험은 정부가 관리하는 의무가입 보험이잖아요. 법적으로 근로계약을 했다면 누구나 4대보험 가입대상자가 되고 보험료를 납부해야 하죠.

마순희: 네, 그렇더라고요. 처음 취업을 하고 월급을 받기 시작하면 급여에서 자동으로 빠져나가는 게 4대보험이더라고요. 사실 저도 회사생활하면서 처음에는 급여가 줄어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제대로 알고 보니 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까지 4대보험은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유익한 보험이더라고요. 퇴직 등으로 일자리를 잃었을 때 일정한 돈을 보장받을 수 있는 제도가 국민연금이고요. 또 의료비용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건강보험, 실업자에게 실업보험금을 주고 직업훈련 등을 위한 장려금을 기업에 지원하는 제도가 고용보험이고 업무상의 재해를 보상받을 수 있는 제도가 바로 산재보험이랍니다.

김인선: 와~ 잘 알고 계시네요. 그런데 탈북민들 중엔 4대보험이 되는 직장을 꺼리는 분들이 있다고 하던데 왜 그렇죠?

마순희: 탈북민들이 처음 한국에 나오면 6개월 정도는 조건에 관계없이 생계급여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4대보험에 가입된 사업장에서 일하게 되면 그 생계비를 못 받게 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4대보험에 가입을 안 하고 싶어하기도 해요. 하지만 길게 보면 제대로 된 직장에서 4대보험 혜택을 받으면서 일하는 것이 장래를 위해서도 더 유리한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제도이다 보니까 탈북민들에겐 낯설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은 탈북민들도 4대보험에 대해 잘 알고 있답니다.

김인선: 4대보험 같은 제도가 북한에는 전혀 없는 거예요?

마순희: 생각해보니 ‘사회보장제도’가 비슷할 것 같네요. 연로보장금이라고 남자의 겨우 60세, 여자의 경우 55세 이상이면 일을 그만두더라도 나라에서 보조금을 주거든요. 북한에서의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지만 매달 지급받지 않고 1년치를 받게 되면 도움이 되기도 하더라고요. 저의 어머니께서 받은 연로보장금을 진갑잔치에 보탰던 기억이 나네요. 20년 전 기억이라 저도 기억이 가물가물해요. 그런데 근래에 나온 탈북민에게 들어보니 ‘사회보장제도’는 지금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본인과 연관된 경우가 아니라면 잘 몰라요. 북한에선 대부분 그랬기 때문에 한국의 4대보험이 낯설게 여겨지고 꺼리게 되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김인선: 그랬겠네요. 남한에서도 어떤 위치, 어떤 일을 했느냐에 따라 접하는 정보가 달라지잖아요. 특히 제도적인 부분은 개인이 그 상황에 직면했을 때 알게 되지 않나 싶은데요. 수정 씨는 북한에서 어떤 일을 했나요?

마순희: 네. 수정 씨는 북한에 있을 때 평양으로 가는 급행열차의 상급 열차, 즉 침대 칸의 열차원으로 근무했다고 합니다. 열차원은 항상 깨끗한 철도 정복을 단정하게 입고 차표 검열이나 하는 등 생산 현장이나 농촌보다는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되는 선망의 직업이다 보니 여학생들에게는 학교를 졸업하면 하고 싶은 일 중의 하나였답니다. 더구나 수정 씨처럼 급행열차를 타고 마음대로 다른 사람은 가 볼 수도 없는 평양으로, 그렇게 드나드는 직업은 누구나 부러워했을 것 같아요. 아마도 수정 씨의 자부심도 대단했을 것 같습니다.

김인선: 남한으로 따지면 고속열차 KTX에 근무하는 승무원이네요.

마순희: 네. 한국에 와서 저를 놀라게 했던 것 중의 하나가 열차 승무원들이었습니다. 북한에는 급행열차든 일반열차든 열차원은 거의100프로 여성들, 또 처녀들이거든요. 그런데 한국에 오니까 남자분들도 열차원을 하더라고요. 놀랍기도 했고 또 멋져 보이기도 했어요. 북한에서는 열차에서 점심시간이 되면 곽밥이라고 도시락을 공급했었습니다. 마치 비행기에서 기내식을 공급하는 것과 비슷했지요. 열차원들 역시 열차 내에서 도시락을 공급받아서 굶지는 않고 근무했는데 어느 때부터인지 곽밥을 그냥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량표라고 출장용 배급표가 있어요. 그거로 바꿨어요. 그런데 얼마 지나서는 그것도 열차원이나 기관사를 비롯한 승무원들에게만 곽밥이 공급되었습니다. 하지만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그것마저 공급되지 않아서 열차원들도 도시락을 싸가지고 근무했답니다.

북한에서 침대 칸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권세 있는 간부들이거나 돈 많은 장사꾼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열차원인 수정 씨도 밥은 굶지 않을 정도로 살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퇴근하고 집에만 오면 온 가족이 굶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쉬는 날마다 가족들과 함께 식량을 구하러 다녀야 했습니다.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굶고 있는 식구들을 살리기 위해서 수정 씨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어머니와 함께 장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았답니다. 그러다가 중국에 가면 쉽게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브로커의 말만 믿고 떠나기로 결심했답니다.

김인선: 수많은 탈북 여성들이 중국으로 향한 이유이기도 하죠.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 열차 승무원이었던 한수정 씨도 마찬가지네요.

마순희: 네. 수정 씨는 열차원 일을 그만두고 굶고 있는 가족을 살리겠다고 어머니와 함께 장사를 시작했지만 장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본전도 다 잃고 막막하던 그에게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 오자고 접근한 브로커 여성이 있었습니다. 사정이 절박했던 수정 씨는 그 아주머니를 따라 중국에 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정 씨를 중국으로 유혹하기 위한 달콤한 거짓말에 불과했습니다. 말로만 들었던 인신매매자들의 올가미에 걸린 것입니다.

그들은 수정 씨를 중국 남성에게 팔아 넘기려고 매일 낯선 남자들과 맞선을 보게 했습니다. 범의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죽지 않는다는 옛말을 되새기며 수정 씨는 기왕 이렇게 된 바에는 남자를 만나더라도 내가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하리라 마음먹었답니다. 몇 번의 만남을 통한 후에 마침 괜찮은 남성을 만나게 된 거죠. 중국에서 대학도 다녔고 인성도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수정 씨는 그 남성과 결혼하여 함께 살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지금 수정 씨의 남편이랍니다.

김인선: 기가 막힌 상황 속에서 만났지만 결국은 수정 씨의 평생 인연이 됐네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그나마 순탄한 결혼생활이 시작되었고 얼마 후에는 임신하여 아들까지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이 오래 가지는 못했답니다. 아들이 돌도 되기 전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중국 공안에 체포돼서 북한으로 잡혀 나가게 되었으니까요. 수정 씨도 북송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갖은 고생을 다 겪고 풀려나게 되었는데 사랑하는 아들에 대한 그리움은 한 순간도 잊을 수 없었다고 해요. 그래서 조금 몸을 추스르는 길로 다시 탈북하여 남편과 아들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찾아 간 거죠. 2년 만에 다시 극적으로 재회한 부부였지만 북한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진 그곳을 한시바삐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타지에서 생활하다가 기적적으로 한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6개월 만에 중국에 두고 왔던 남편과 11살 된 아들까지 데려오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가족이 함께 살게 된 것은 다행스럽지만 수정 씨 혼자의 몸으로도 정착하기 힘들었을 텐데... 난관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수정 씨의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도 계속됩니다. 마순희 선생과는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