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풍당당, 전남협회장 장춘복 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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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남들이 볼 땐 분명히 꽃길을 걷고 있는데 그 꽃길을 마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보고 ‘고생을 사서 한다’ 이렇게 말하는데요. 제 기준으로 탈북민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걸 지난주에 처음 느꼈습니다. 부모님이 당 간부를 하다 보니 어렵게 생활을 하지 않았는데, 7남매 중 막내인 자신보다 하나뿐인 아들이라며 오빠만 챙기는 부모님을 보고 서운한 마음에 탈북 결심을 하고 중국에 팔려가는 길을 택했던 장춘복 씨. 저에게는 참 인상적인 분인데요. 지난주에 이어서 이야기 나눠 볼게요.

마순희: 네. 물론 여느 탈북 여성들의 경우처럼 참담한 사연은 아니지만 저는 이해가 되더라고요. 춘복 씨가 제대했던 2000년대 초, 북한의 생활은 그전에 비하면 말이 아니게 어려웠거든요. 아마도 춘복 씨가 군대에 입대하기 전 생활과 제대 후의 생활환경도 많이 달랐을 겁니다. 몇 년간 군사복무하고 제대된 이후에도 어머니의 관심은 하나뿐인 아들한테만 기울었으니 실망감도 컸겠죠. 그래도 의지하고 싶어 찾아갔던 언니네 집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게 되자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중국에 가자고 하는 친구를 따라 떠났을 그 심정이 저는 이해됩니다. 혹여나 자신으로 인해서 집식구들에게 피해를 입히진 않을까 걱정됐던 춘복 씨는 브로커에게 될수록 국경에서 먼 곳으로 보내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고향에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은 거죠.

하지만 말도 모르는 한족 동네에서 밖에도 나가지 못하며 2-3년을 지낸다는 것이 활동적인 춘복 씨에게는 참기 어려운 고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남편과 시댁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찬장사를 시작했고 그 일이 잘 되다 보니 동네의 슈퍼, 식당으로 사업이 커졌습니다. 남편에게 오토바이를 사줄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지만 춘복 씨는 행복함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늘 마음 한 구석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지울 수 없었으니까요. 춘복 씨는 한국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면서부터 북한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말이 통하는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마침 한국에 가면 집도 주고 정착금도 주고 잘 살 수 있다는 브로커를 만나게 됐습니다. 여권을 만들어서 비행기로 편하게 한국까지 갈 수 있다는 말에 2천만 원, 18000달러라는 거금을 브로커에게 선뜻 내놓았다고 합니다.

김인선: 보통 브로커비용을 한국에 들어와서 한참을 일하고 갚는 탈북민들이 많은데... 얼마나 중국에서 돈을 많이 벌었을 지 짐작이 가네요. 금전적인 걱정도 없었으니 한국까지 오는 길도 순탄했겠어요.

마순희: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한국으로 가는 길은 춘복 씨에게도 순탄치는 않았는데요. 10여 개월이 지난 어느 날 한국 여권이 나왔으니 갈 준비를 하고 나오라고 해서 식당도 다 처분하고 약속된 장소에 갔는데 건장한 남성들이 몇 명이 달려들어 여비와 짐을 모두 빼앗더랍니다. 여권을 내서 비행기를 타고 간다고 속여 돈만 뜯어내고는 머나먼 노정을 걸어서 거의 2년이 넘는 긴 시간을 거쳐서야 한국에 오게 된 거죠.

김인선: 장춘복 씨 인생에서 가장 큰 고난의 시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은데요. 막상 한국에 와서 어땠을 지가 걱정되네요. ‘한국에 오면 집도 주고 돈도 준다’는 말에 한국행을 결심했다고 했으니까요.

마순희: 틀린 말은 아니지만 좀 과장된 표현도 있죠. 우리 탈북민들이 한국에 오면 집을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임대주택에서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니까요. 북한에서도 지금은 개인소유 주택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전에는 모두 국가소유나 혹은 기업소 소유의 주택에서 살았으니 임대주택도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라도 생활할 수는 있지만 빌려주는 거라 팔 수는 없는, 그런 임대주택을 배정해 주는 겁니다. 그리고 살아갈 수 있게 정부에서 정착금 같은 것도 주지만 그것이 일하지 않고 놀면서 평생 살아 갈 수 있을 정도는 아니거든요. 그리고 건강에 문제가 없는 한 일하면 얼마든지 돈을 벌 수 있는데 굳이 일하지 않고 놀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탈북민들이 한국에 오면 제일 먼저 초기정착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고 본인이 요구하는 대로 거주지를 지정 받게 되는데 춘복 씨는 이때 여수에 집을 배정 받았습니다. 초기정착금으로 받은 돈으로 가구와 전자제품들을 하나하나 장만해 나가는 즐거움도 느끼고 난생처음 자신의 이름으로 된 집이 생겼다는 기쁜 마음이 컸던 춘복 씨는 북한처럼 물건이 오늘 있다가 내일은 없을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물건을 사들이기도 했다면서 웃더라고요.

김인선: 정착지원금이 있긴 하지만 그렇게 물건을 막 사들이면 안 된다고 당시에 말리는 사람도 없었나 봐요.

마순희: 그러게요. 그런데 춘복 씨는 중국에서 많은 돈을 벌어 보았기에 돈을 모으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고 생각한 거죠. 그리고 하루라도 나가서 일하면 돈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세상에서 굳이 나라의 도움으로 살 이유가 없다는 마음으로 최소한 6개월간 무조건 받을 수 있는 생계비도 두 달 만에 본인이 동사무소에 가서 중지를 시켰다고 하더군요. 열심히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인가 보람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는 마음으로 여수에 있는 한영대학교에 입학해 대학공부도 시작했습니다.

김인선: 아무리 경제적으로 여유가 좀 있다고는 하지만 춘복 씨의 결단력은 거침이 없네요.

마순희: 그런 것 같죠?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취득하고 봉사활동에도 열심히 참가하는 춘복 씨를 보고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평판이 자자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장애인 협회에서 근무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도 들어왔고 또 열심히 근무하다 보니 전라남도 협회장으로까지 임명된 것입니다. 춘복 씨는 돈을 버는 것이 그렇게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고 해요.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는 거니까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장애인협회에 취직할 때에도 협회가 제대로 돌아갈 때까지 본인은 급여를 받지 않겠다고 말하고 실제로 그것을 실천했다고 하는데요. 봉사하는 마음으로 밤 11시까지 일하면서도 힘든 줄을 몰랐다고 합니다. 2014년 11월부터는 선거를 통해서 한국 장애인문화관광진흥원 전라남도 협회회장으로 임명됐고요. 장애인 문화관광진흥원에서 조직한 나눔합창단의 대표로서도 활약하고 있습니다.

김인선: 그렇게 활기차게 지내다가 집에 가면 참 외로우시겠어요.

마순희: 틀렸는데요. 춘복 씨가 활기차게 활동하다가 집에 돌아오면 자상한 남편이 기다리고 있답니다. 지금의 남편은 장애인 협회에 출근하면서 알게 됐다는데요. 큰 재산은 없지만 남한생활에 적응하는 데에도, 또 춘복 씨가 모르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도 조언을 해줘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하네요. 지금의 남편과 생활하면서 단 한 번도 얼굴 붉혀 본 일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행복하다고 하는데요. 항상 열정적으로 일하다 보면 가정을 미처 돌아볼 사이도 없을 때가 많지만 남편은 그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격려해준다고 합니다.

해마다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이나 12월 1일 세계 장애인의 날이 되면 전라남도의 장애인들 수십 명과 함께 서울로 행사를 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남편은 차량봉사도 하고 도시락까지 준비하는 등 조력을 아끼지 않는답니다. 춘복 씨는 지금도 매일매일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며칠 안 있으면 합창단 초대공연이 있어서 그 준비로 더 바쁘다고 합니다.

김인선: 그 열정.. 참 부럽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낳았다는 춘복 씨의 두 딸에 대한 얘기가 없네요.

마순희: 네, 중국에서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했던 두 딸들도 잘 자라서 좋은 대학들에 다니고 있고 통화도 자주 한다고 합니다. 춘복 씨는 자신의 사는 모습을 딸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면서 초청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 바람이 이루어져서 사랑하는 그리운 딸들과 만나 그동안의 회포도 나누고 서로에 대해 새롭게 알아가는 유익한 시간도 만들어 갔으면 합니다.

김인선: 초반엔 장춘복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배부른 투정’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이야기를 들을수록 당당하게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오늘도 그녀의 삶은 위풍당당할 것 같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