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사람마다 생김새가 다르듯이 삶의 방식도 저마다 다른데요. 고난이 닥쳤을 때 취하는 행동도 각양각색입니다. 어떤 사람은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잠시 숨고르기를 하는 사람이 있고요.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어떤 사람일까요?
마순희: 네. 오늘의 주인공은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는 사람, 두 번째 부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도에서 오리목장을 운영하고 있는 김남진 씨인데요. 오늘의 주인공 남진 씨는 탈북 할 때부터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김인선: 탈북할 때도 다시 일어난 사람이라면 탈북과정이 굉장히 험난했다는 얘기인 거 같은데요.
마순희: 그렇습니다. 누구나 다 그러하지만 특히 김남진 씨 가족의 탈북여정은 어렵고도 험난했습니다. 처음에는 혼자서, 다음에는 가족들을 데리고 떠나기도 했고 가다가 잡혀서 돌아오기도 몇 번이었습니다. 일일이 다 나열하기도 어려울 정도인데요. 자식들과 헤어져서 생사도 모른 채 생명의 위험을 목전까지 실감했던 몽골에서의 체포 과정은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시도는 2004년 9월이었다고 합니다. 6개월 간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등 여러 나라들을 거쳐서 마지막에는 선교단체의 도움으로 온 가족이 무사히 대한민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김인선: 그 힘든 과정을 포기하지 않고 그렇게 여러 번 시도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마순희: 사실 김남진 씨 가족은 북한에서도 그리 어렵게 살지는 않았던 분입니다. 토대가 좋은 편은 아니라서 출세는 하지 못하지만 장사수완이 좋아서 중국에 드나들면서 크게 어려운 점이 없이 살았는데요. 중국에 자주 드나들다 보니까 중국이나 한국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이 잘 산다는 것도 들었지만 가서 정착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들을 들은지라 중국을 드나들면서도 한국으로 갈 생각은 전혀 하지 못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고난의 행군이 점점 심해지자 더는 북한에서 살기가 힘들기도 하고 앞날의 희망이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라나는 두 오누이의 앞날을 생각하니 그 생각이 더 확고해졌다는데요.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공부를 잘 하는 아들과 딸의 앞날을 생각하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죽더라도 중국이나 한국이나 어디 간들 여기보다 못 하랴하는 생각으로 탈북을 시도했던 거였습니다.
김인선: 오로지 자식들의 앞날을 위해서 한국행을 선택한 거네요. 그 결심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겠어요. 하지만 사람의 앞날이 각오와는 다르게 펼쳐지는 경우가 많잖아요.
마순희: 맞습니다. 남진 씨도 물론 힘들 것이란 예상을 안 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아들과 딸은 학교에 금방 적응을 하고 공부도 잘하고 있는데 문제는 어른들, 특히 김남진 씨였습니다. 북한에서 유치원 교양원도 했었던 처는 한국에 와서도 큰 어려움 없이 일자리를 찾고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졌지만 남진 씨는 변변한 일자리를 찾지 못했던 거죠. 사실 여성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은 많지만 남자들이 일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곳은 건설현장의 일용직 정도인데 며칠 버티지 못했다고 합니다.
김인선: 몸 쓰는 일이 쉽지 않죠. 체력도 따라줘야 하고요.
마순희: 남진 씨는 체질이 약한 축도 아니었는데 한국까지 오는 동안 너무 힘들어서였는지 건설현장의 일용직을 며칠 못 버티고 몸살을 앓곤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던 남진 씨는 1톤 트럭을 사 가지고 땅콩 장사, 과자 장사 등 이것저것 다 해봤지만 돈을 벌기는커녕 오히려 적자를 낼 때가 많았답니다. 남진 씨는 세대주로서 이렇게 역할을 할 수 없을 거라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 했던 일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세대주라고 가정살림을 자신이 모두 책임지다시피 하면서 큰소리치고 살았는데 한국에 와서는 무능력한 모습이 되고 만 것입니다. 자꾸만 비관적인 생각이 들면서 점점 우울해 지고 몇 년간은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하루 종일 빈 집에서 TV만 보며 지냈다고 하더군요.
김인선: 그 모습을 지켜보는 부인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오죽하면 저럴까 싶다가도 나가서 무슨 일이든 좀 했으면 싶었을 것 같아요.
마순희: 그래도 당시 남진 씨 부인의 심정은 그냥 남편이 안쓰럽기만 하더래요. 오히려 남편이 몇 번의 탈북과 북송과정에서 감방생활하면서 제일 많이 고초를 겪었기에 그렇게라도 좀 쉬게 된 것이 마음에 놓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한다고 시작하기만 하면 돈만 까먹고 금세 포기하니까 차라리 그렇게 집에서 쉬기만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도 했고요. 그러나 남진 씨는 그 동안에 TV를 통해 한국 사회에 대한 정보를 얻으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구상했던 것 같아요. 다른 일을 하다가 농촌으로 가서 성공한 사람들을 보고 농사를 짓겠다고 가족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폭탄선언을 한 거죠. 남진 씨는 자신에게 종자돈 2만 6천 달러(3000만원)만 주면 농촌에서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성공하기 전에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답니다.
김인선: 말이 쉽지, 2만 6천 달러라는 그 많은 돈을 어디서 구해요?
마순희: 그래도 김남진 씨를 언제나 지지해주는 건 부인이죠. 안정된 주거지를 마련하도록 탈북민에게 지원되는 정착금을 기꺼이 남편을 위해 건넨 겁니다. 거기에 자신이 벌어놓은 돈을 모두 털어서 2만 6천 달러(3000만원)를 마련한 거죠. 그때 부인의 심정은 성공에 대한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은둔생활을 하던 남편이 무엇인가 하겠다고 밖으로 나간 것만도 다행이다 싶었다고 합니다. 남진 씨는 부인이 마련한 종자돈을 가지고 1톤 트럭에 가방 하나 싣고 떠났고 그렇게 농촌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김인선: 하지만 농사도 쉽지 않은 게 방식이 달라서 북한에서 농사짓다 오신 분들 중에서도 실패하는 경우가 있었잖아요.
마순희: 맞습니다. 농촌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어요. 자기 딴에는 무공해 농사를 지으면 잘 팔릴 거라는 생각에 농약도 치지 않고 비료도 좋은 걸로 치면서 오이와 옥수수 농사를 지었는데 결과는 대 실패였습니다. 북한에서처럼 호미로 김을 매면서 힘들게 농사를 지은 오이는 한 뼘 크기도 안 되는 꼬부랑 오이고 옥수수는 이삭도 제대로 열리지 않더랍니다. 남진 씨는 결국 1년 만에 투자금을 모두 날리게 되면서 농사는 포기하고 다음에는 가축을 길러 보려고 축사를 찾았습니다.
김인선: 축사에 취직을 한 건가요?
마순희: 아니요. 취직을 하면 여러 경험을 못하잖아요. 그래서 남진 씨는 급여를 받지 않아도 좋으니 함께 일하면서 배워보고 싶다고 했답니다. 남진 씨의 말에 주인들은 공짜 일꾼이 생겼다고 얼씨구나 했겠지요. 그렇게 남진 씨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소도 키워보고 돼지도 키워보고 염소도, 개도 키워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강원도에서 오리사육을 하는 곳을 알게 됐고 거기서도 몇 개월 일하면서 경험을 쌓았는데 주인이 남진 씨에게 같이 오리사육을 해 보자고 제안을 하더랍니다. 일 잘하고 부지런한 남진 씨가 욕심났던 거죠. 하지만 남진 씨는 더 배우기 위해 또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가축을 키워 보면서 남진 씨의 마음에 든 것이 오리였다고 합니다. 생육기간이 40일이라 회전율도 빠르고 승산이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죠. 오리는 병에 걸리기 쉽기에 축사는 바람이 잘 통하는 바닷가 산등성이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전국을 다니다 보니 진도에서 옛 오리목장터를 발견했는데요. 태풍에 허물어져서 흡사 파철더미처럼 철근이 얽히고설킨 모습은 딱 폐허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남진 씨는 그곳에서 오리농장을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김인선: 제대로 된 시설을 갖춘 오리농장에서 일을 시작해도 성공여부가 명확치 않은데 폐허나 마찬가지인 곳에서 오리농장을 시작하겠다니요. 김남진 씨. 이번에는 또 어떤 시행착오를 겪었을까 궁금해지는데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전해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