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하는 삶, 요양보호사 신영화 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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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요양보호사 신영화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2007년에 입국한 영화 씨는 당시 46살이었는데요. 보통의 젊은 탈북 여성들과 달리 요양보호사 일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요양보호사에 대해 교육받은 뒤 내가 해야 할 일이구나... 싶었다고 하는데요. 2008년부터 제주도에서 한국생활을 하면서 요양보호사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정식으로 요양보호사 일을 시작했습니다.

마순희: 맞습니다. 신영화 씨는 1963년생으로 올해 58세인데요. 올해로 13년째 요양보호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여러 일을 해본 후에 최종적으로 직업을 선택한 사람들이 많은데 영화 씨의 경우엔 처음 시작부터 내 일이라는 확고한 생각으로 요양보호사를 선택했기에 경력도 쌓이고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일찍 시작한 만큼 혜택이라고 할까요, 운이라고 할까요? 지금은 이론 80시간, 실기 80시간, 실습 80시간, 총 240시간을 이수하고 자격증 시험까지 거쳐야 요양보호사가 될 수 있지만 10여 년 전에는 일정 시간의 요양보호사 교육을 받으면 따로 국가시험을 보지 않아도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 씨 역시 교육과정 이수 후 자격증을 취득했고 제주의료원에 입사를 하게 됐습니다. 탈북민들이 다들 겪는 시행착오를 신영화 씨는 한 번도 겪지 않은 셈이죠. 물론 일하면서 말투로 인한 어려움 등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근면하고 성실하게 영화 씨는 그 시간들을 잘 이겨냈습니다. 제주도에서 정착하는 동안 조선족 남성과 가정도 꾸렸고 지금은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고 있는 탈북민 중의 한 사람이랍니다.

김인선: 네. 제가 지난주에 근면, 성실한 영화 씨의 생활습관이 과연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북한에서, 중국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노력의 결과물인지 궁금하다고 했었잖아요?

마순희: 네. 지금 답을 드리자면 신영화 씨의 경우 타고난 성실성과 생활하면서 만들어진 성품들이 다 함께 복합적으로 형성된 것 같습니다. 북한에서 신영화 씨의 생활도 순탄치 않았다고 하는데요. 신영화 씨는 번화한 대도시에서 살다가 함경북도의 한 바닷가에 있는 수산사업소 노동자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바다에서 어로공(어부)으로 일하고 영화 씨는 아들을 낳아 키우면서 전업주부로 큰 고생을 모르고 살아갔었다고 합니다. 평범한 삶을 살던 영화 씨였는데요. 어느 날 세찬 풍랑에 바다에 나갔던 남편이 영영 돌아오지 못 하게 됐습니다. 어린 아들을 키우면서 어렵게 혼자 살아가던 영화 씨는 결국 몇 년 후에 재혼을 했다고 하더군요. 사실 북한에서는 남편이 없으면 아내라도 직장에 나가지 않으면 가족들이 살아가기 힘들기에 재혼을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영화 씨가 두 번째로 만난 남편은 미더운 사람이 못 되었나 봅니다. 보위부의 단속을 피해서 중국으로 도망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영화 씨도 자식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남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보니 남편을 숨어 살게 하고 영화 씨가 밤낮 가리지 않고 일을 하고 고스란히 남편에게 돈을 가져다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있어만 주면 됐을 텐데 시간이 많았던 남편은 교회에 다니기도 하고 도박도 하다가 경찰에 잡혔답니다. 그런데 남편은 북송되면 무조건 총살될 것 같으니까 감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 후 영화 씨는 남편의 자식들과 교회의 도움으로 한국으로 오게 됐습니다. 한국에 도착한 신영화 씨의 생각은 그냥 조용하게 살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300여 명 교육생들 중에서 누구도 신청하지 않았다는 제주도를 거주지로 신청했다고 합니다.

김인선: 탈북할 때 사연 없는 사람이 없다고들 하는데 영화 씨 사연은 너무 마음이 아프네요. 제주도를 선택한 것도 이해가 가고요. 하지만 서로 의지할 만한 고향 사람들도 없이 섬에서 타향살이 시작하기도 만만치 않았을 거 같아요.

마순희: 영화 씨가 생각하기에 친구들이 많이 정착하는 곳에 함께 가면 복잡하고 또 안 좋은 쪽으로 나갈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에 아무도 선택하지 않은 제주도를 거주지로 택했다고 하는데요. 북한에서, 그리고 중국에서 남편 때문에 어려운 일을 당한 영화 씨였기에 한국에서는 그런 어려움을 겪고 싶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고 싶었다는 그의 마음이 전 이해가 됩니다. 영화 씨가 제주도를 선택한 데에 책자도 한 몫을 했는데요. 대한민국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무한 우리 탈북민들이 하나원에서 거주지 선택을 하면서 참고하는 책자가 있다는 말씀 저번에도 했었죠? 그 책자에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부터 지방 도시들에 이르기까지 자세한 정보들이 실려 있는데 탈북민들은 그 책자를 보고 자신의 정착지를 결정합니다. 책자를 통해 접한 제주도는 관광지라고 하지만 그래도 육지와 떨어져 있다 보니 조용한 섬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거든요. 저도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살아보고 싶은 곳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요. 영화 씨는 달랐던 겁니다. 지금은 제주도에 300여 명 가까운 (2018년까지 270여 명) 탈북민들이 정착하고 있지만 신영화 씨가 정착을 하던 2007년경에는 제주도에 사는 탈북민이 정말 얼마 안 되었을 것 같습니다.

김인선: 제주살이 괜찮았을까요? 선입견이긴 합니다만 섬사람들이 텃세가 좀 있다고 하잖아요. 게다가 제주도 사투리는 북한말보다 더 못 알아듣겠더라고요.

마순희: 맞습니다. 영화 씨도 제주도 방언을 알아듣기가 가장 어려웠다고 하더군요. 요양보호사로 취직한 후에는 어르신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방언이 심해서 몇 번을 다시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말들도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초기 정착의 어려움을 이겨 나갈 수 있게 힘을 준 것은 지금의 남편이라고 합니다. 영화 씨가 남편을 만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함께 일하면서 영화 씨의 성품을 알게 된 한 요양보호사 동료가 참 좋은 사람이라며 한 번 만나보라고 몇 번을 이야기했지만 처음에는 귀담아 듣지도 않았거든요. 두 번씩이나 남편 때문에 아픔을 겪었던 영화 씨였기에 다시는 그런 아픔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고 말 그대로 조용히 살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처럼 말없이 영화 씨의 어려움을 다 이해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늘 도움을 주는 그의 진정성에 점차 영화 씨의 마음도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 남편이 없었다면 오늘 자신의 성공적인 삶도 없었다고 말할 정도인데요. 중국 조선족인 남편은 신영화 씨의 믿음직한 생활의 동반자랍니다. 든든한 남편이 있지만 좋아하는 일, 잘할 수 있는 일이 있기에 영화 씨는 앞으로도 요양보호사 일을 계속할 생각이라고 합니다. 사실 지금도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하면 양로시설, 요양시설, 복지시설 등 다양한 곳에 취업이 가능한데요. 특히 나이 들어서도 자신의 건강만 걱정 없다면 언제까지라도 일할 수 있는 평생직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신영화 씨처럼 경험도 풍부하고 성실하고 능력 있는 요양보호사라면 어디서든지 대환영일 겁니다. 돌아보면 주변에는 해 보지도 않고, 하기도 전에 겁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일을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신영화 씨처럼 누가 보건 말건 알아주건 말건 묵묵히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최선을 다하는 탈북민들의 성공적인 사례를 소개해드릴 때마다 존경심과 함께 저 자신이 가슴 뿌듯함을 느끼곤 합니다.

김인선: 오늘도 성심을 다하고 있는 신영화 씨, 그리고 이 땅의 수많은 요양보호사 분들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