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김인선: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최근 남쪽에선 환경개선으로 '도시양봉'이 주목받고 있는데요. 도심 주택이나 건물 옥상에서 꿀벌을 키워 꿀을 채취하는 것이 자연과 공존하는 가치 있는 산업이라고 여기기 때문이에요. ‘도시환경개선과 양봉이 무슨 관계가 있지?’라고 생각하시겠지만 국제식량농업기구(FAO)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세계 식량의 90%를 차지하는 100대 농작물 중 71개가 꿀벌의 수정에 전적으로 의존한다고 해요. 그러니까 ‘양봉’은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데 꼭 필요한 거죠. 이렇게 의미 있는 양봉일을 하는 탈북민이 있었습니다. 경상남도 마산에서 국화양봉원을 하고 있는 이국화 씨. 10개의 벌통으로 시작해 200통의 벌을 키우고 있는 이국화 씨의 꿀맛 인생이야기, 지난 시간에 이어 들어봅니다. 한 마디로 꿀벌과 함께 하며 꿀맛 인생을 살고 있는 이국화 씨였죠?
마순희: 맞습니다. 마산에서 양봉사업을 하고 있는 꿀벌처럼 부지런한, 꿀맛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이국화 씨의 이야기였습니다. 한국정착 7년 차인 이국화 씨는 경상도 태생인 남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렸는데요. 진짜 벌꿀을 먹고 싶은 마음에 품삯 대신 받은 10개의 벌통이 국화 씨를 양봉업으로 이끌었습니다. 올해로 양봉일을 시작한지 5년째, 10개의 벌통은 200통이 됐으니 20배 사업이 커진 셈입니다.
김인선: 보통 양봉일은 봄, 여름이 가장 바쁜 시기라고 알고 있는데 국화 씨는 어떤가요?
마순희: 항상 바쁜 것 같아요. 국화 씨가 가장 먼저 생산하는 것은 이른 봄 아카시아꿀입니다. 북한 우리 고향에서 먹던 피나무꿀과 비슷해서인지 저는 아카시아꿀이 좋더라고요. 그 다음 5월경에는 밤꽃이 필 때라 밤꿀을 생산하더라고요. 아카시아꿀보다 향기가 진하고 색깔도 거의 투명한 노란색의 아카시아꿀보다는 약간 짙은 색이었습니다. 영양성분으로 따지면 약효도 좋다고 하는데 우리 집 식구들은 잘 안 먹어서 저는 아카시아꿀만 삽니다. 밤꿀을 채취하고는 그 다음엔 잡꿀을 생산하더라고요. 여러 가지 꽃들이 만발하는 여름이라 이것저것 여러 가지 꽃들이 섞인 꿀인데 영양이나 약효가 뛰어나다고 해요. 국화 씨네는 꿀도 생산하지만 꿀벌집에서 추출한 프로폴리스, 북한에서는 왕벌젖이라고 부르던 로얄젤리 등 여러 가지 제품들을 생산하기도 해요. 벌통 수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건강제품을 판매하는 양봉원으로 발전했거든요.
그런데다 국화 씨네는 감 농장도 함께 하고 있어서 한가할 때가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이 또 감 수확철이거든요. 양봉만 하더라도 10월 말 경부터는 꿀벌의 월동준비로 바쁜 계절이기도 하고요. 양봉장은 산마루 감 농장 옆에 위치하고 있는데 시내에서도 차를 타고 산길로 30분 정도는 족히 올라가야 하는 곳입니다. 그 길을 국화 씨는 외제차를 타고 씽씽 달리고 있더라고요. 회사에 출퇴근할 때에 차를 샀는데 처음에는 차를 몰고 산길 오르기가 너무 겁이 나서 평지길만 운전하고 산길은 남편이 운전해서 올라가곤 했대요. 그러던 어느 날 매일 마중을 나오던 남편이 그날따라 마중 나오지 않았더랍니다. 산길이 워낙 험하기도 하고 길이 좁기도 해서 위험하다는 생각에 운전할 생각도 못 하던 국화 씨였는데 정작 남편이 없으니 막막했겠죠.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굳게 먹었대요. 목숨 걸고 탈북도 했는데 절박한 마음이면 무엇을 못 하겠는가 하는 생각에 다시 운전대를 잡고 산길로 오르기 시작했다는데요. 무사히 도착했을 때 국화 씨의 온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더랍니다. 얼마나 두려웠을 지 그 심정이 헤아려 지더라고요. 한 번 차를 몰고 올라 간 다음부터는 자신감이 생겨서 어떤 험한 길도 씽씽 달리게 되더래요. 지금 국화 씨는 못 하는 일이 없답니다. 감 농장도 국화 씨가 운영하고 양봉도 역시 국화 씨 몫이죠. 이렇게 열심히 일한 뒤엔 꿀맛 같은 휴식시간을 갖는다는데요. 한해 농사를 마감하고는 해마다 1월이면 국화 씨와 남편이 함께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겁니다. 한 해 동안의 묵은 피로도 다 가셔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또 한 해를 시작할 수 있게 하는 힘을 재충전하는 거죠.
김인선: 부럽습니다. ‘열심히 일한 자, 즐겨라’ 라는 말처럼 국화 씨는 즐겨도 되는 충분한 자격이 있는 것 같은데요. 또 그만큼의 경제적 여유도 있다는 거겠죠? 예전에 텔레비전에 양봉하시는 분이 나왔는데 3개월에 13만 3천달러에서 17만 7천 달러(1억5천~2억)의 수익을 올린다고 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거든요.
마순희: 네, 충분히 그만한 수입을 올리고 있을 겁니다. 저희들도 해마다 국화 씨네 꿀을 사 먹기도 하는데요. 금년에는 좀 늦게 주문했더니 다 매진되고 없더라고요. 처음에는 생산해도 판로가 걱정이었는데 이제는 판매 걱정을 전혀 안 해도 되는 상황이 된 거죠. 정말 누구나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답니다.
김인선: 벌써 매진됐다니까 아쉽네요. 내년엔 국화 씨가 채취한 꿀을 저도 한번 사 봐야겠어요. 자주 술 마시는 남편 때문에 저희 집엔 꿀이 떨어지면 안 되기도 하거든요.
마순희: 아하 그러시네요. 술 마시고는 꿀물을 타서 마시는 것이 거의 당연한 일로 되어 있으니 말이죠. 저희도 항상 집에 꿀이 떨어지진 않고 있거든요. 그런데 식구들이 묵은 꿀은 잘 안 먹어요. 그래서 제철 과일을 갈아서 주스로 만들어 먹을 때에 묵은 꿀을 넣어 먹기도 해요. 사실 북한에서는 꿀을 그렇게 흔하게 먹지는 못 했답니다. 저는 그래도 정양소라고 후방사업을 하는 분야에서 일을 했었기에 꿀을 다른 사람들보다는 쉽게 접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업지에서 꿀을 생산했으니까 동원을 가면서 술이나 담배 같은 것들을 가지고 가서는 양봉을 하시는 어르신들에게 드리고 꿀을 얻어 오기도 했거든요. 한 병 정도 얻어 오면 약처럼 요긴하게 쓰곤 했었습니다. 애들은 먹고 싶어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었지만요.
한국에 와서는 꿀이 없어서 못 먹을 일은 없으니까 떡을 찍어 먹기도 하고 음식에 설탕 대신 넣기도 합니다. 요즘은 먹기 싫어서 안 먹는데요. 가끔 명절 때에 딸들이 모여 오면 꿀에 달걀노른자와 밀가루를 섞어서 개어 얼굴마사지를 한다고 얼굴에 바르기도 한답니다. 겨울이면 손이 거칠어진다고 꿀에 설탕가루를 섞어서 손에 바르고는 1회용 비닐장갑을 끼고 시간이 경과하면 씻어내기도 하는데 확실히 살결이 부드러워진 것 같기는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저희들끼리 웃고 떠들기도 해요. 북한에서는 없어서 못 먹었는데 한국에 와서 피부까지 꿀로 호강을 한다고요.
김인선: 국화 씨의 사례를 듣고 ‘아~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하는 분들이 참 많을 것 같아요. 국화 씨처럼 양봉일을 시작해 보려는 경우도 많을 것 같은데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귀농, 귀촌을 생각하는 사람들 중 비교적 초기자본이 적게 들어가는 양봉에 관심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탈북민들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은데요. 국화 씨처럼 이미 양봉을 하시는 탈북자 분들도 여럿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국화 씨는 자신에게 양봉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양봉을 배울 때 심정을 생각하면서 아낌없이 지식을 전수해 주기도 한답니다. 한 가지를 배우고 또 다음 수업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또 한 가지를 배울 수 있는 것이 안타까웠던 국화 씨였기에 벌통을 사 가는 사람들이 양봉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선배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꿀벌처럼 부지런한 이국화 씨의 국화양봉원이 앞으로도 더 튼튼하게 번창하고 그의 삶 이야기가 많은 탈북민들의 귀감이 되고 목표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귀농을 희망하는 많은 사람들이 제2, 제3의 ‘이국화’들로 이 땅에 뿌리내리는데 그의 정착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김인선: 일터에서도 가정에서도 달콤한 꿀이 떨어질 것 같은 이국화 씨의 이야기. 그야말로 꿀맛 사랑, 꿀맛 인생입니다. 앞으로도 국화 씨의 삶이 달달하기를 바라면서 마순희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