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노력이 필요하다, 밤자골농원 김영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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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지난 7일이 겨울이 시작된다는 입동이었잖아요. 확실히 입동이 지나면서 추워졌어요. 저는 이렇게 날씨가 추워지면 길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간식에 자꾸만 눈길이 가더라고요.

마순희: 저도 그래요. 저는 옥수수 삶는 냄새에 못 견뎌서 지나는 길에 삶은 옥수수를 종종 사 먹곤 한답니다. 즉석에서 구워서 파는 고구마, 군밤까지 정말 간식거리가 다양한데요. 다른 먹거리에 비하면 군밤은 비싼 편이더라고요. 그렇지만 그런 밤을 직접 생산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가격 걱정은 안하고 실컷 먹지 않을까 싶은데요. 오늘의 주인공 김영희 씨가 그럴 것 같습니다. 영희 씨는 이름도 정겨운 밤자골 농원의 주인인데요. 밤 농사와 북한에서는 추리라고 하는 자두 농사를 짓는다고 해서 밤자골 농원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하더라고요.

김인선: 지금까지 ‘마순희의 성공시대’에서 소개한 탈북민 중에 농사짓는 분들 많으셨는데요. 그 중에 밤 농사하는 분은 또 처음이네요.

마순희: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북한에서 농촌에서 살지 않았다 해도 농촌을 모르고서는 살 수가 없을 정도로 익숙한 환경이고 또 북한을 떠나서 중국에서 몇 년 정도씩 체류하면서 대부분 대도시보다는 농촌에서 농사한 경험이 많다 보니까 농촌 생활에 대한 거부감도 그만큼 덜하지 않을까요? 또 어떤 분들은 남쪽 번화한 도시의 복잡한 생활보다 자연 속에서 조금은 여유로운 삶을 선택하는 경우들도 있고요.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은 그와는 좀 거리가 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인선: 농사 경험이 전혀 없다는 건가요?

마순희: 그렇죠. 영희 씨는 북한에서도 기업소에서 선전대 성원으로 근무했기에 농사를 해 본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 영희 씨가 농촌에서 살게 된 데는 그만의 이유가 있었는데요. 김영희 씨가 한국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2003년이었습니다. 처음 거주지인 충주시에 정착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많지 않았기에 흔히 접할 수 있는 식당일부터 시작했는데 말투도 다르고 식당에서 쓰는 용어들도 서로 달라서 처음에는 힘든 시간도 있었다고 해요. 하지만 이것 역시 내가 겪어야 할 일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하나하나 배우면서 일해 나갔다고 하는데요.

영희 씨의 성실한 모습을 지켜 본 단골손님 중 한 분이 자신의 지인을 소개해 주더랍니다. 지인의 소개로 만났지만 서로가 좋은 감정으로 자주 만나 정을 나누면서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고 영희 씨는 자연히 남편을 따라 농촌생활을 하게 된 거죠. 처음엔 시부모님이 물려주신 임야에 밤 나무와 자두 나무 묘목을 새로 심고 가꾸는 정도였다는데요. 지금은 6000그루의 밤 나무와 자두 나무가 탐스러운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

김인선: 김영희 씨와 남편은 남남북녀 부부셨군요. 그래서일까요? 동네에서 이 부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고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영희 씨는 남편을 만나 농촌 생활을 한 지 이제 13년 차가 됐는데요. 충주시내에서는 김영희 씨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더라고요. 영희 씨 집에 찾아가보니 인기를 더 실감할 수 있었는데요. 이들 부부가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많은 정착사례자들을 만나다 보면 남남북녀가 부부로 살아가는 사례들을 심심치 않게 접하게 되는데요. 남북한의 문화적 차이도 있고 생활습성이나 관습 같은 것들도 차이가 많아서 쉽지만은 않다고 해요. 영희 씨 부부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남편은 성실하지만 조금은 과묵한 성격이고 영희 씨는 활달한 성격이다 보니 농원 홍보와 대외활동은 거의 영희 씨의 몫이었습니다.

영희 씨는 농원의 크고 작은 모든 실무 업무들과 농사일을 하는 짬짬이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활동도 빼놓지 않고 참여 중인데요. 자신이 그렇게 든든히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된 데는 믿음직한 남편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영희 씨는 한참이나 자랑했습니다. 봉사활동뿐만 아니라 영희 씨의 대외활동에 있어서 남편이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고 있는 모습과 그런 부부의 생활을 말해 주듯 온 방안 벽 위에는 각종 상장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요. 그 중에는 전국노래자랑 상장도 걸려 있었답니다.

김인선: 영희 씨는 노래도 잘 하는 것 같은데요. 뭐든 그렇게 잘하니 남편이 영희 씨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마순희: 네, 사실 남편이 영희 씨의 든든한 후원자가 될 수밖에 없는 특별한 이유가 또 있었는데요. 영희 씨에게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더라고요. 탈북민 누구나 다 그러하듯이 영희 씨도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생활고에 못 이겨 중국에 있는 친척의 도움을 받으려고 강을 건넜는데요. 며칠만 다녀온다고 사랑하는 두 아들을 두고 떠난 길이, 그 길이 영영 돌아가지 못 하는 길이 되었습니다. 영희 씨 마음속에는 늘 두고 온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이 자리 잡고 있는 거죠.

김인선: 탈북민들의 공통된 아픔이죠.

마순희: 맞습니다. 여러 가지 일에 몰두하고 바삐 지내다가도 저녁이 되면 혼자가 되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짓는 분들이 참 많아요. 가정을 이룬 탈북민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데요. 아무리 배우자라해도 속마음을 다 모르니까요. 사실 영희 씨의 남편도 탈북민이라고는 영희 씨를 만난 것이 처음이었기에 북한이나 탈북민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영희 씨를 만나면서 많은 공부를 했다고 웃으면서 이야기하더군요.

김인선: 어떤 공부죠?

마순희: 탈북민들의 정착을 지원하는 남북하나재단에서 두 달에 한 번 나오는 ‘동포사랑’이라는 잡지가 있는데요. 탈북민들의 정착 사례를 소개하기도 하고 탈북민들과 관련한 교육이나 행사 소식을 담고 있는 책자거든요. 이 책자를 공부하는 것처럼 살펴봤답니다. 남편은 그 잡지를 통해서 탈북민에 대해서 그리고 탈북민인 아내에 대해서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지금도 ‘동포사랑’ 책자를 제일 기다리는 사람도, 열심히 탐독하는 사람도 다름 아닌 남편이라고 하더라고요.

덕분에 영희 씨 남편은 부인이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잘 알게 됐고 아픈 마음도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영희 씨가 좀 더 즐겁게 살기는 바라는 마음에 방 한 칸에 연주실을 마련해 주었다는데요. 여기에 피아노는 물론 손풍금, 기타 등 여러 가지 악기들이 갖추어져 있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드넓은 과원의 전원주택에서 영희 씨가 연주하는 행복의 악기소리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더라고요.

김인선: 사랑의 힘이네요. 누군가를 좋아하면 상대방의 모든 면이 좋아보인다고 하잖아요. 남한의 속담 중에 이런 게 있어요. ‘부인이 예쁘면 처갓집 말뚝을 보고도 절을 한다’! 영희 씨 남편을 보고 하는 말 같은데요. 그런데 사랑은 일방통행이 아니라고 하잖아요.

마순희: 정말 맞는 말씀인데요. 남편이 영희 씨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종갓집 장손이라고 하면 웬만한 여성들이 다 도리머리를 흔들 정도로 각광받는 남편감은 아니지 않나요? 영희 씨의 남편은 종갓집, 장손이었답니다. 1년에 모셔야 하는 제사만 서른 두 분이라고 하니 그 수고로움은 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아요. 하지만 영희 씨는 시어머님과 함께 그 일을 잘 감당하고 있었기에 일가 친척들 사이에서도 칭찬이 자자하답니다. 그런 영희 씨였기에 남편은 아내에게 항상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었고 더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군요. 부부가 함께 알찬 열매를 거두어가면서 봉사활동도 하고 취미생활도 하면서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 김영희 씨 부부에게 힘찬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김인선: 살다 보면 늘 좋은 일만 있지는 않죠. 사이 좋은 부부도 갈등이 있기 마련이고요. 하지만 김영희 씨 부부처럼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부부 사이가 더 돈독해지지 않을까요? 남쪽에 살고 있는 수많은 남남북녀 부부가 이들처럼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은 부부간의 사랑에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밤자골농원 김영희 씨에 대해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