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관점을 갖게 된 조명희 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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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2020년, 새해가 되고 처음 인사드리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 한해도 열심히 살아가는 탈북민들 많이 소개해 주세요.

마순희: 네. 기자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이 방송을 통해서 우리 탈북민들이 남한에서 어떻게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있는지를 새해에도 기자님과 함께 소개해드릴 수 있게 되어 감사한 마음이랍니다. 또한 이 방송을 듣고 계시는 모든 분들께서도 하시는 일마다 더 큰 열매를 맺는 한 해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새해에도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전해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김인선: 올해도 잘 부탁드릴게요. 자 그럼 2020년 첫 성공시대 주인공은 어떤 분이시죠?

마순희: 네. 오늘은 강원도의 춘천시청에서 근무 중인 조명희 씨를 소개해드릴게요. 최고보다는 최선을 다 하는 명희 씨는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정착 이야기의 주인공인데요. 고난의 행군으로 가장 어려웠던 1998년에 탈북했습니다. 탈북 후 중국에서 10년을 지낸 뒤 2008년에 한국 땅을 밟았으니 올해로 한국정착 13년차가 됐네요.

김인선: 13년이면, 남한사람 다 된 거죠. 그런데 한국생활만큼 중국에서도 꽤 오래 계셨어요.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을 중국에서 있었으니 그만큼 사연이 많겠죠?

마순희: 네, 우리 탈북민들 누구나 그러하듯 명희 씨 역시 탈북과 중국 체류 10년간 잊을 수 없는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답니다. 그나마 북한에서 만큼은 별 탈 없이 지냈는데요. 명희 씨는 북한에서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후 열차원으로 취직했고 하루의 결석이나 지각도 없이 성실히 근무를 했다고 합니다. 여기저기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그 일이 얼마나 즐거웠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통행증이 있어야 어디든 갈 수 있었던 그때, 열차원들은 노선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직업상 이동이 비교적 쉬웠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고난의 행군 시절엔 열차원들도 살아가기 힘들었다고 하는데요. 명희 씨도 당국이 금지하는 여러 가지 물건들, 이를테면 골동품 같은 것들을 몰래 전달해주는 일을 해주고 조금씩 수수료를 받아서 생활에 보태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숨겨놓았던 골동품들이 열차 안전원의 불시 검문에 모두 압수당하게 된 일이 생겼는데, 그 금액은 명희 씨가 몇 년을 벌어도 만져볼 수 없는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물어줄 형편도 못 되는데 물건을 의뢰한 사람들이 대부분이 북한식으로 말하면 문세꾼들이라고 하는데 폭력성이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명희 씨는 그들의 협박을 피해 숨어서 지내야 하는 처지가 된 거죠.

김인선: 하루 이틀도 아니고... 같은 북한에서 견디기 힘들죠.

마순희: 네. 그래서 명희 씨는 더는 견디지 못 하고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하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중국에서 명희 씨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여느 탈북여성들처럼 중국인 남자에게 팔려가게 됐는데요. 마음에도 없는 남자와 가정을 이루게 되었지만 딸을 낳아 키우면서 중국말도 열심히 배웠고 중국 공안의 단속을 피해 여러 도시로 피신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 중국공안에 체포되어 북송의 위기에 처했던 일도 있었다는데 명희 씨는 그때 ‘차라리 잘 됐다, 가족이 그리워서라도 북한에 가고 싶은데 차비가 없어서 못 갔었다. 북송한다니 어서 보내 달라’고 하면서 살아온 기구한 운명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의 진솔하고 처절한 이야기가 경찰들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본인들이 돈을 모아서 벌금을 대신 내고 풀어주었던 적도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어렵게 중국생활을 하다가 명희 씨는 2008년, 11살 딸을 데리고 대한민국에 입국했습니다.

김인선: 중국 공안이 벌금을 대신 내주고 풀어줬다는 얘기는 난생 처음 듣네요. 중국에서 많이 힘드셨겠지만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도 듭니다. 한국에 와선 어땠을까요. 직행으로 한국에 오신 분들은 남북의 생활문화 차이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지만 중국을 거쳐서 오신 분들은 좀 더 빨리 적응을 하는 편이라고 알고 있거든요.

마순희: 네. 사람마다 조금씩 사연들이 다르기는 하지만 중국사회에서 몇 년을 살다가 온 사람들은 한국의 자본주의에 적응하는 것이 비교적 쉬울 수밖에 없어요. 같은 사회주의라고는 하지만 북한에 비해 중국은 자본주의에 많이 가까운 편이거든요. 조명희 씨 본인은 쉽지 않았다고 여겼을 지 모르지만 직행으로 온 탈북민에 비해서는 분명 빨리 적응해 나간 편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회사에 다니면서 어린 딸의 공부와 방과 후 생활까지 책임지는 것에는 직행이든 중국경유든 탈북민 누구에게라도 쉽지 않은 일인데요. 명희 씨에도 어려움이 많았다고 합니다.

김인선: 한부모로 살아간다는 건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죠. 월급이 좀 괜찮다 싶으면 아이를 돌볼 시간이 안 되고, 아이를 돌볼 시간적 여유가 있다 싶으면 로임이 얼마 안 되니까요.

마순희: 맞습니다. 명희 씨도 처음엔 딸을 돌보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보니 정규회사보다 농장이나 식당 등에서 시간제 부업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로임이 일정치 않고 일하는 장소도 자주 바뀌다 보니 안정적인 생활 유지가 안 됐습니다. 정규적인 일자리를 찾는 것이 자신의 정착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으로 회사에 취직을 했는데 무척 힘들었다고 합니다. 아침 출근 시간과 아이의 등교 시간, 자신의 퇴근 시간과 아이의 하교 시간 등을 맞추는 것도 쉽지 않았고 하교 후 숙제를 봐주고 돌보는 일까지, 그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기엔 무리였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명희 씨 본인도 힘들고 어린 딸도 힘들어해서 딸을 지인이 추천해준 아동복지시설에 맡기게 됐다고 합니다. 지방에 있는 시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주 만나지 못했는데요.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본인이 찾아가든 딸이 찾아오든지 꼭 만날 수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김인선: 그래도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고 하는데... 떨어져 지낸 시간이나 거리만큼 명희 씨 모녀 사이가 점점 멀어졌을까요?

마순희: 아니요. 오히려 명희 씨 경우에는 시설에 보낸 후에 딸과의 사이가 더 좋아졌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사실 어린 자녀를 데리고 한국에 왔지만 젊은 여성들인 경우에는 새로운 환경에서 새 배우자를 만날 수도 있거든요. 한국 정착에 도움이 되는,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녀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혼란스러운 거죠. 보도, 듣도 못하던 사람이 아빠라고 곁에 있는 것도 그렇고 엄마의 사랑과 관심이 자신에게서 멀어진다는 생각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사사건건 엄마와 충돌하고 사이가 멀어질 수밖에 없거든요.

명희 씨네 모녀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명희 씨는 한국에 정착하면서 마음에 드는 남한 남성분을 만나게 됐는데 아무리 명희 씨가 딸과 남자친구 사이에서 노력을 한다 해도 해결이 안 되더랍니다. 그런 사정을 알게 된 지인이 천주교 쪽에서 운영하는 복지시설을 소개해주었고 직접 가보았더니 교육시설이나 제도가 너무 잘 되어 있어서 자신이 데리고 있는 것보다 딸에게 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는 마음에 그곳에 보내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김인선: 남편과 잘 지내고 싶다는 생각에 딸을 시설에 보냈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을 것 같아요. 사실 저도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요.

마순희: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명희 씨가 원한 건 행복한 가정이었습니다. 사실 중국에서 자식을 낳고 살았다고 하지만 본인의 의사나 선택과는 전혀 상관없는 가정생활을 강요당한 것이었잖아요? 이제라도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 건강한 가정을 꾸리고 평범한 여성이 되고 싶었을 겁니다. 하지만 남편과 딸에게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는 걸 명희 씨는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초기에는 힘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멀리 떨어져서 공부하는 어린 딸을 생각하면 명희 씨 마음도 말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김인선: 아이가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죠. 가족 모두의 이해와 배려, 노력이 필요할 텐데요. 명희 씨는 어떻게 그 시간들을 보냈고 건강한 가정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다음 주에 얘기 나눠 볼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