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2022년 임인년, 검은 호랑이의 해가 시작되고 처음 인사 드리는데요. 며칠 지났지만 새해 인사부터 해볼게요. 청취자 여러분 그리고 마순희 선생님! 검은 호랑이의 기상과 풍요로움, 그리고 여유까지 가득한 한 해 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새해를 축하합니다.
마순희:네, 선생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에는 행복과 평안이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우리 라디오를 듣고 계시는 청취자 분들께서도 호랑이의 기운을 받아 건강하고 행복한 일들로 가득하길 바라고 또 하고자 하는 일 모두 이루시길 소망하며 항상 웃음 가득한 한해 보내시길 바랍니다.
사실 이렇게 새해 인사를 전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체감은 별로 안 나더라고요. 그 전에는 새해 첫 날이라고 하면 굉장히 의미 있고 기다려지는 명절이었습니다. 맛있는 음식도 해 먹고 설빔이라고 새 옷과 새 신발을 신게 되니 명절을 기다리는 맛이 있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요즘엔 설날이, 더구나 양력 설 같은 때는 잘 쇠지도 않다 보니 명절 같지 않더라고요. 북한에 살 때에는 ‘설날에 배곯으면 1년 내내 배를 곯는다’는 속설도 있어서 떡도 만들고 만두도 빚고 또 콩을 불려서 직접 콩나물을 기르기도 하고 여러 가지 반찬도 준비해서 나름대로 푸짐하게 명절을 지내곤 했었답니다. 고난의 행군이 덮치기 전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음식을 나누다 보면 정작 집에서 만든 떡이나 반찬보다 이웃집 음식이 더 많을 정도였던 때도 있었거든요. 음식 이야기에 빠질 수 없는 탈북민이 계신데요. 통일요리연구가로 널리 알려진 장유빈 씨입니다. 2022년 성공시대의 첫 번째 주인공으로 오늘은 장유빈 님에 대해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김인선:저도 이분 TV에서 봤어요. 요리 실력으로 참가자들 간의 경쟁을 하는 요리경연 프로그램에 출연하셨던 그 분 맞으시죠?
마순희:맞습니다. 선생님도 보셨군요. 저도 TV 화면에 낯익은 얼굴이 나오기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17등을 기록하고 중도에 탈락해서 아쉬웠지만 9천명이 도전한 경연대회였다는 걸 감안하면 엄청난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벌써 6년 전인 2016년도 일이네요. TV프로그램 요리경연대회에서는 최종 결선 진출에 실패했지만 이미 유빈 씨의 요리 실력은 수많은 경진대회에서 증명됐습니다. 2014년 '제12회 강원관광서비스 경진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했고 2015년에는 '제9회 전국 연(蓮)음식 경연대회'에서 은상, '제1회 아시아 한식 국가대표 선발 요리경연대회' 시니어 부문 금상 등 다수의 요리대회에서 입상하는 영광을 누렸으니까요. 특히 2016년도에는 대한민국 요리명인 선발대회에 참가했는데 북한 전통음식인 쟁반냉면과 어북쟁반, 증편, 만두 등을 즉석에서 얼마나 잘 만들어 냈었던지 그날 여성가족부 관할 아래에 있는 명인회로부터 대한민국 전통음식 제1호 명인으로 지정 받고 명인 인증서까지 받았습니다.
김인선:어느 한 분야에서 종합적으로 최고 수준의 기능을 보유한 분을 명인, 장인이라고 하는데요. 음식 분야에선 향토적인 식재료를 얼마나 사용하는지, 조리법을 비롯해서 전통성을 얼마나 갖추었는지 등 세부적인 심사항목도 다양해서 선정되기가 굉장히 까다롭더라고요. 전통음식 명인, 장인으로 선정된 분들은 다수의 요리경연대회 심사 자격을 얻고 심사위원의 역할도 할 수 있는데요. 장유빈 씨가 그분들 중 한 분이시네요.
마순희:맞습니다. 많은 분들에게 인정받는 명인이 된 장유빈 씨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저도 감동인데 유빈 씨 본인은 얼마나 벅찼겠습니까. 감개무량하다며 무척 기뻐했습니다. 사실 유빈 씨 외에도 요리 고수로 알려진 탈북민들이 몇 분 계신데요. 2019년에 소개했던 김치사업가 윤선희 씨가 대표적입니다. 그분도 한식대첩이라는 경연프로그램에서 북한음식을 선보였고 현재까지 북한음식점과 북한식 김치사업을 활발하게 하고 있습니다. 장유빈 씨도 마찬가지인데요. 북한음식으로 사업을 하면서 음식으로 재능기부 요리지도와 강의 등을 하며 바쁘게 지내고 계십니다.
김인선:한국에서 북한 전통음식 전문가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장유빈 씨인데요. 어떤 일이든 하루아침에 고수가 될 수는 없잖아요. 유빈 씨의 경우는 어땠을까요?
마순희:맞습니다. 사실 유빈 씨는 북한에서 어렸을 때부터 요리를 접하면서 성장했습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에 이르기까지 모두 음식솜씨가 뛰어나서 인근에 소문이 자자한 분들이었다고 하는데요. 결혼식을 하거나 동네의 대소사가 있는 집들에서 늘 요리를 요청 받기도 하고 결혼식이면 빠지지 않는 폐백음식이나 상차림도 유빈 씨네 집에서 전문 담당이었습니다. 덕분에 유빈 씨는 어려서부터 자연히 음식솜씨를 익히게 됐습니다. 유빈 씨는 12살 때부터 요리를 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유빈 씨의 아버지도 탄광의 간부였고 음식솜씨 좋은 할머니와 어머니 덕분에 유빈 씨네는 고난의 행군으로 먹고 살기가 그렇게 힘들 때에도 굶을 걱정 없이 살았다고 합니다. 고난의 행군으로 온 나라가 어려웠을 때 유빈 씨는 직장에 나가는 날보다 집에서 요리를 함께 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습니다. 전기사정으로 직장에 나가는 날보다 집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유빈 씨는 가정의 부업이었던 상과자 만들기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식재료가 넉넉지 못 하다 보니 잔치상에 떡으로, 혹은 설탕을 녹여서, 아니면 무 등으로 꽃, 수박, 잣송이, 포도 등 모형들을 예쁘게 만들어서 잔치상을 차리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웬만한 솜씨가 아니면 그런 잔치상 차림을 맡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빈 씨는 상과자 만들기가 가능했다고 하니 솜씨가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예상이 됩니다.
김인선:아들 있는 집에서 유빈 씨를 며느리 삼고 싶어서 줄을 섰겠어요. 최고의 신붓감이라고 탐내는 남성분들도 많았다면서요?
마순희:네. 예쁘고 요리도 잘하는 착한 딸이었던 유빈 씨는 제대군인 총각과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얼마 뒤에 딸도 태어났지만 결혼생활은 유빈 씨에게 결코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 했다고 하는데요. 가부장적인 남편의 폭력 때문이었습니다. 대부분 먹고 살기 위해 탈북을 결심하지만 유빈 씨의 경우엔 남편의 폭력을 피해 딸을 친정어머니에게 맡기고 2000년에 중국으로 탈북했습니다. 중국에는 연변대 교수로 지내는 작은 아버지를 비롯해서 친척들도 여럿 있어서 크게 불안하거나 외롭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빈 씨는 그냥 얹혀살지 않고 식당 주방에서 일을 했고 열심히 돈을 벌어서 북한에 보내 주었다고 합니다.
김인선: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 가더라도 가장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청소 일이나 식당 일이 아닐까 싶어요. 설거지나 뒷정리 같은 보조업무에 필요한 인력은 늘 부족하니까요. 하는 일에 비하면 로임도 많지 않고 힘들어서 금세 그만두는 경우가 많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장유빈 씨는 같은 식당 일을 했어도 업무가 달랐다면서요?
마순희:맞습니다. 보통 신분이 불안정하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탈북여성들인 경우에는 식당에서 일하더라도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 뒷정리 등 보조업무가 차례지는 경우가 많지만 중국에 살고 있는 친척들의 도움으로 유빈 씨는 그리 크진 않아도 꽤 괜찮은 식당의 주방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익혀 온 요리솜씨 덕분에 얼마 안 가서 주방에서도 인정받게 되고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게 됐습니다.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유빈 씨는 주방에서 일하는 요리사 청년과 사귀게 되었고 그는 혼자 외롭게 지내는 유빈 씨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습니다. 두 사람은 결혼을 했고 얼마 뒤에는 아들도 태어났습니다. 그대로 중국에서 살아도 좋았겠지만 운명은 그들 두 사람을 대한민국으로까지 오게 만들었습니다.
김인선:유빈 씨가 마주한 운명이 뭘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볼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네. 감사합니다.
김인선: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 김인선에디터 : 이예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