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네. 안녕하세요.
김인선:얼마 전, 인터넷을 검색해 보다가 굉장히 재미있는 글을 발견했는데요. 오래전에 화제가 된 내용이에요. 2015년도에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연령별 성공한 인생 기준표'인데요. 10대부터 100세 이상까지 성공의 기준을 쭉 나열했더라고요. 10대는 성공한 아버지를 뒀으면 성공이고, 20대는 학벌이 좋으면 성공, 30대는 좋은 직장, 40대는 경제력, 50대는 공부 잘하는 자녀가 있으면 성공이래요. 그리고 60대는 아직 돈 벌고 있으면 성공이고, 70대는 건강하면 성공, 80대는 집에서 밥을 차려주면 성공, 90대는 전화 걸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성공, 100세 이상은 아침에 눈 뜨면 성공이라고 합니다. 이 기준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웃프다' 였어요. 웃기지만 슬프다는 거죠.
마순희:웃기면서도 슬프다는 그 표현이 맞는 것 같아요. 현실을 반영한 글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연령별 성공한 인생 기준표를 보면 제 나이 언제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60대는 해당되는 것 같아요. 한국에 와서 경제활동을 하며 돈을 벌고 있었으니까 성공의 기준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고 70대는 건강하면 성공이라고 하는데 건강하게 아직 일하고 있으니 지금을 성공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재미도 있고 현실을 반영한 기준표인 것 같아 제 상황을 접목시켜 보긴 했는데요. 탈북민 전체를 놓고 본다면 이 기준에 단순 접목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우리 탈북민들 중에는 많은 성공사례가 있는데 저마다의 성공에 대한 기준이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40대는 경제력이라고 했는데 우리 탈북민 중에는 40대에 큰 경제력이 없어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아낌없이 봉사활동을 하고, 그걸 성공으로 여기며 긍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또 50대에는 공부 잘하는 자식 때문에 긍지가 높은 사람들도 많지만 본인 스스로를 위해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서 대학에 진학도 하고 관련 부분에서 자신들의 꿈을 펼쳐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의 삶을 통해 성공의 기준은 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저희 성공시대 주인공들을 통해서 확인이 되고 있잖아요? 어떤 삶을 성공이라고 하느냐는 결국, 자신이 성공 기준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판단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성공시대에서는 모든 것은 생각에 달렸다고 말하는 김명순 씨의 이야기를 들려 드릴게요. 사실 명순 씨라고 처음부터 긍정적인 생각으로 살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탈북과 한국 정착을 거치면서 변화됐는데요. 명순 씨는 ‘따뜻한 마음과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면 부자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지금은 자신의 일을 하면서 대학 공부도 하고 자격증도 취득하고 또 시간이 될 때마다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면서 마음의 부자로 살아가고 있는 친구죠.
김인선:마음먹기에 따라 즐거움이 괴로움이 될 수도 있고, 괴로움도 즐거움이 될 수가 있는 거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는데, 이게 굴곡진 삶을 많이 겪어본 사람들 아니면 잘 안 되더라고요. 그런데 김명순 씨도 북한에서부터 평범한 삶은 아니었다고요?
마순희:네, 맞습니다. 얼핏 보면 좋아 보인 삶이었지만 명순 씨의 삶은 평범하지 못했습니다. 명순 씨는 북한사람들이 다들 부러워하는 평양에서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꽤 유명한 가수였고 어머니도 배우로 활동하고 있었기에 자라면서는 배고픈 고생을 모르고 유복하게 살았습니다. 끼가 많으신 부모님 덕이었는지 명순 씨는 어려서부터 노래도 잘하고 화술도 좋았기에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후 웬만한 처녀들은 다들 욕심 내는 연구실 해설강사가 되어 남부럽지 않게 사회생활을 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명순 씨의 삶은 순탄한 것 같았는데, 명순 씨가 시집갈 나이가 되어 배우자 선택을 하면서부터 모든 일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꽤 괜찮은 집안들에서 명순 씨를 며느릿감으로 점 찍었는데, 명순 씨의 아버지 문제로 번번이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김인선:출신성분에 문제라도 있었나요?
마순희:그렇습니다. 명순 씨는 혼사 얘기가 오가는 나이가 돼서 처음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남한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 부러운 것 없이 당당하게 살아가던 명순 씨에게는 너무도 큰 타격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마음에 차지도 않는 사람한테 시집가고 싶은 생각도 없었던 명순 씨는 30대 후반까지도 혼자 지냈습니다. 명순 씨는 차라리 아버지의 고향인 남한에 가서 더 성공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40살이 되던 2002년에 탈북하게 됐습니다.
김인선:좀 남다른 이유로 탈북을 결심하셨네요. 그런데 바로 한국으로 오는 직송이 아니면 탈북하는 데도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이 나라, 저 나라 돌아돌아 오잖아요. 명순 씨도 그런 과정을 겪었다면 그동안 안 해봤던 고생이 엄청 심했을 텐데, 탈북을 후회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마순희:후회를 해 본 적은 없다고 합니다. 차별 받으며 사는 것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도 있었고 중국으로 넘어 갔다고 해서 한국으로 곧바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니까요. 당시에는 돈만 있으면 신분증을 위조해서 한국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았었기에 명순 씨 역시 돈을 버는 것이 가장 절실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명순 씨는 식당에서도 일했고 집안일을 하는 가사도우미로, 또 환자를 돌보는 간병인 일도 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벌었습니다. 명순 씨는 처음부터 한국행을 목적으로 중국에 왔기에 자나 깨나 한국으로 갈 생각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탈북민들이 브로커의 안내를 받으며 3국을 거쳐서 한국으로 간다는 정보를 접하게 됐습니다. 명순 씨는 하얼빈에서 브로커가 있는 길림으로 갔고, 그곳에서 만난 브로커의 안내로 제 3국을 거치고 나서야 겨우 대한민국에 도착했습니다. 처음엔 2002년에 북한을 떠나 6년 만인 2008년에 한국에 입국했다고 한 마디로 정리했지만 이야기를 나누면서 공안에게 수색당할 뻔한 위기도 있었다며 위험천만한 고비들을 수없이 넘는 목숨을 건 노정이었다고 회상했습니다.
김인선: '현실의 하루는 무디지만 과거의 지난 세월들은 주마등이다'는 말이 떠오르는데요. 탈북 과정에서 그동안 안 해봤던 고생 많이 했으니까 한국에서의 생활은 좀 순탄했으면 좋겠어요. 명순 씨의 한국 정착 과정은 어땠나요?
마순희:네. 명순 씨의 한국정착은 탈북의 여정만큼이나 힘들었습니다. 한국생활을 제대로 시작도 하기 전에 탈이 났기 때문입니다. 탈북민 누구나 오랜 고생 끝에 한국에 도착하면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기본적인 교육을 받고 원하는 지역에 거주지를 배정받게 되잖아요? 명순 씨도 마찬가지로 서울에 집을 배정받고 일상생활을 시작하게 됐는데, 집에 도착한 순간 모든 긴장이 풀리면서 심하게 앓아 눕게 됐다고 합니다. 명순 씨는 어떻게든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고 배정받은 집을 하루 종일 청소하며 지금의 상황을 극복하자고 수없이 다짐도 했지만 명순 씨의 몸이 좀처럼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끼니도 제대로 챙겨먹지 않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습니다. 외출을 하는 건 교회에 가는 날 뿐이었다고 하는데요. 어느 날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길가에 쓰러졌습니다. 깨어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 응급실이었습니다. 당시 명순 씨는 깨어난 안도감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삶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하니 그 고통이 어느 정도였겠어요? 다행히 그때 적십자사에서 정착도우미로 활동하던 분들이 병원에 찾아왔고 명순 씨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었습니다.
김인선: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을 만큼 마음이 약해진 명순 씨에게 봉사자들의 온정이 잘 전해졌을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전해드릴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네. 감사합니다.
김인선: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