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오미크론 변이 확산세가 굉장한 요즘입니다. 조심스럽게 일상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다시 움츠러들고 있습니다. 외출을 최대한 자제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안에서만 보낸다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마순희: 맞아요. 오미크론이 워낙 전염성이 높다 보니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밖에 나가기를 꺼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어쩌다 쉬는 날 서울에 올라와도 어지간해서는 집 밖으로 안 나가게 되더라고요. 예전이라면 지인들과 만나서 식사자리도 갖고 외식을 했겠지만 지금은 최대한 집밥을 먹으려고 합니다. 저희는 식구들이 거의 다 어른이라 시중할 일은 없지만 선생님처럼 애들이 어릴 경우에는 삼시 세끼를 차리고 치우는 일을 다 해야 하니 고충이 더 클 것 같습니다. 중간중간 간식까지 챙겨야 할 테니 정말 정신이 없을 것 같아요.
김인선: 맞아요. 간식 얘기는 정말 공감이 돼요. 저희 아이가 밥을 잘 안 먹고 군것질을 그렇게 하거든요. 쌀밥 대신 라면이나 국수를 찾고 2-3시간에 한 번씩 과자나 사탕 같은 간식거리만 먹는데요. 그런데 성인들도 집에 있다 보니 주식보다 간식을 즐기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탈북민들 중에도 간식을 즐겨먹는 분들이 많으실까요?
탈북민이 애정하는 북한의 대표간식 “명태포”
마순희: 아, 그럼요. 탈북민들은 한국에서 북한주민들의 대표간식인 명태포, 마른 명태를 즐겨먹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겨울이면 흔하게 먹을 수 있는 간식거리가 옥수수튀기를 포대로 해놓고 심심할 때마다 먹는 것이 유일했습니다. 간식 얘기는 고향에 대한 추억을 불러오네요. 옥수수 튀기와 함께 마른 명태는 우리 북한에서 겨울이면 누구나 좋아하는 간식거리였지요. 겨울이 되면 집집마다 처마 밑에 명태를 죽 걸어서 말렸었거든요. 긴 겨울밤이면 아궁이 불에 살짝 구워서, 아니면 마른 명태로 찢어서 심심치 않게 먹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탈북민들이 한국에 와서 초기정착 교육을 받는 하나원에서 생활할 때 매점에서 가장 많이 찾는 품목이 낙지(마른 오징어)와 마른 명태였습니다. 한국뿐 아니라 해외에 살고 있는 탈북민들도 명태를 사서 먹는데요. 직접 명태를 말려서 판매하는 탈북민도 있습니다. 함경북도가 고향인 김도정 씨인데요. 고향의 맛이 그리워서 명태를 말리기 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오늘 성공시대에서는 도정 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인조고기밥, 두부밥, 북한식 순대, 옥수수 국수…
고향의 맛 그리워 북한음식 만들어 파는 탈북민들
김인선: 타국이나 타지에 사는 분들 중에 고향의 맛이 그리워서 혼자 만들어 먹다가 장사를 시작했다는 분들이 많으시더라고요. 탈북민들도 마찬가지인 거죠. 그런데 주로 인조고기밥이나 두부밥, 북한식 순대, 옥수수 국수 등을 판매하는 분들이 많거든요. 하지만 도정 씨는 명태를 선택했어요. 어떻게 이런 결단을, 남들과 다른 판단을 할 수 있었을까요?
마순희: 네. 도정 씨의 경우 처음엔 본인이 먹으려고 명태를 말리기 시작했는데요. 지인들에게도 그 명태를 선물로 나눠주면서 점차 입소문을 타게 됐고 사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도정 씨의 고향이 함경북도의 바닷가이다 보니 누구보다도 명태를 많이 접할 수 있기도 했었고 또 음식솜씨 좋으신 어머님 밑에서 명태요리를 많이 먹으며 자랐다고 하더라고요. 한국에서 정착하는 동안 탈북민 누구나 그러하듯이 도정 씨도 외로움이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힘들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어머니의 손맛이었습니다. 엄마의 손맛을 기억으로 더듬으며 도정 씨는 직접 음식을 만들어 봤습니다.
고향 생각에 아파트 베란다에 말리기 시작한 명태…
친구들에게 입소문 나면서 용기 내 시작한 명태사업
명태 요리도 그 중 하나였는데요. 한국에서는 명태를 너무도 쉽게 살 수 있다 보니 요리를 하는 것뿐 아니라 직접 말려 보기도 했습니다. 매일 명태를 먹고 싶다는 생각에 아파트 베란다에서 말렸다고 하는데요. 먹어 보니 맛도 좋았답니다. 그래서 도정 씨는 명태를 넉넉하게 사서 말린 후 친구들에게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도정 씨가 만든 음식과 마른 명태를 먹어 본 친구들이 모두 음식점을 차려도 되겠다고 하고 마른 명태를 더 요청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호응이 좋았기에 도정 씨는 명태를 주력 상품으로 한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됐습니다.
김인선: 김도정 씨 얘기를 듣다 보니까 갑자기 이런 속담이 생각나요.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 자라서 크게 될 사람은 어릴 때부터 남달리 장래성이 엿보인다는 뜻인데요. 김도정 씨에게 딱 맞는 표현 아닐까요?
마순희: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알면 알수록 김도정 씨는 여러 가지로 남다른 모습이 엿보였는데요. 탈북 계기도 새로운 세계를 향한 도전이었다고 말하더라고요. 도정 씨는 어린시절부터도 남달랐습니다. 북한에서 여자축구선수라고 하면 누구나 대단하다고 할 정도인데 도정 씨는 축구선수로 활약했습니다. 하지만 도정 씨는 구속을 싫어하고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성격이었기에 조직생활에 얽매인 북한에서 살아가는 것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전도유망한 축구선수가 탈북한 이유
새로운 세계를 향한 도전을 위해…
새로운 세계를 향해 탈북을 결심했고 부모님에게 자신의 생각의 전했습니다. 도정 씨는 부모님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탈북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부모님의 승인을 받고 동료와 함께 브로커의 안내를 받으며 중국에 무사히 도착했으니까요. 당시엔 한국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북한 사람들 사이에서 한국에 대한 인식이 좋지도 않을 때였기에 한국으로의 직행은 생각도 하지 못했고 도정 씨는 중국에서 4년 정도 살게 됐습니다.
김인선: 중국에서 탈북민들의 삶은 보통 말로 하기 힘들 정도로 어렵다고들 하는데, 지금까지 도정 씨의 얘기를 들어보면 남들과는 좀 다르지 않았을까 싶어요. 도정 씨의 중국생활은 어땠을까요?
마순희: 네. 김도정 씨는 중국에 도착해서 그래도 꽤 괜찮은 남성을 소개 받았고 결혼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중국에서 불법체류자로 살아야 하는 생활이 불안하고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유도 없이 생활총화를 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어렵게 살아야 하는 북한의 생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성실했던 도정 씨는 남편을 도와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면서 큰 무리 없이 살아갔고 두 사람 사이에 아들도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살면서 TV를 통해 한국에 대해 점차 알게 되었고 한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도정 씨는 중국에서 만난 남편에게 한국행에 대한 상의를 했고 자신이 한국에 가면 정착금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고 한국으로 향했습니다.
중국 남편에게 정착금을 보내주기로 약속하고
불안한 중국을 떠나 한국행을 선택한 도정 씨…
남편도 신원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항상 불안한 삶을 살기보다는 차라리 도정 씨를 한국으로 보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으로 보내 주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이 법적으로 부부로 살고 있는 것도 아니기에 도정 씨의 결심을 말릴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도정 씨는 탈북할 때에도 무작정 떠난 것이 아니라 부모님을 설득하고 동의 하에 떠났는데 중국에서 한국으로 올 때에도 도망치듯 떠난 것이 아니라 남편과 협상하고 아들을 맡기고 비교적 마음 놓고 한국에 온 것이어서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인선: 몰래 도망친 것이 아니라 남편을 설득하고 아들을 맡겨둔 뒤에 중국을 떠날 수 있었으니 조금은 심적으로 편안했을 것 같아요. 떠나는 발걸음이 너무 무겁지 않았던 것처럼 한국까지 가는 길도 순탄했으면 좋겠는데요. 도정 씨의 한국행 여정은 어땠을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김인선, 에디터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