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설렘과 불안함이 공존하는 3월입니다. 일상적 방역·의료체계 전환에 대한 논의를 거쳐 일상생활의 변화가 시작됐는데요. 가장 큰 변화가 가족 중에 코로나비루스 확진자가 있어도 다른 가족은 일상생활을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백신 접종 여부와 상관없이 격리 의무가 면제되는데요. 확진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된 만큼 자신의 몸 상태를 잘 살펴야겠습니다. 운동은 물론 건강식, 보양식을 챙겨먹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마순희: 맞습니다. 백신을 맞는 것뿐 아니라 평소 건강관리를 잘하면 병치레를 하더라도 금방 털어버릴 수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의 오미크론 환자들만 보더라도 독감 증세 그 이상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 주변으로는 코로나 확진자가 여럿 있는데요. 모두들 감기처럼 2-3일 기침도 하고 열이 나는 정도더라고요. 백신도 맞고 면역력이 높은 사람들은 거의가 가볍게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건강식, 보양식을 챙겨 먹어서 면역력을 높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2007년 탈북, 2009년 한국 입국해
흑염소 농장 운영하는 정숙 씨
코로나 이후에도 일이 늘어
자신의 건강을 챙기는 것이 본인 뿐 아니라 주변이나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필요하다는 것을 더 절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어서인지 저도 그 전에는 잘 먹지 않았지만 홍삼진액이나 칡즙, 녹용음료를 열심히 챙겨먹고 있답니다. 여러 곳에서 선물을 받은 덕분에 다양한 건강보조식품을 먹고 있는데요. 탈북민들 중에 건강보조식품과 관련한 일을 하는 분들이 있는 덕분입니다. 오늘은 그분들 중의 한 분을 소개하면 좋을 것 같네요. 면역력 향상에 좋은 흑염소를 키우는 박정숙 씨인데요. 코로나로 일이 줄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 요즘, 정숙 씨는 오히려 일이 더 많아졌다고 합니다. 정숙 씨는 2007년에 탈북하여 중국을 거쳐 2009년에 대한민국에 정착했고 지금은 강원도 춘천에서 흑염소농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김인선: 예로부터 흑염소는 건강에 효능이 뛰어나서 찾는 사람들도 꾸준하고 소나 돼지에 비해 사육 기간도 짧아서 잘만 하면 꽤 괜찮은 축산업이라 할 수 있는데요. 기본적으로 사육 기술이 있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남한에서는 경험이 많은 분들에게 교육도 받고 비법을 전수받기도 하는데요. 박정숙 씨는 어땠나요?
마순희: 정숙 씨는 흑염소 사육을 위해서 따로 배울 필요가 없었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동물을 좋아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북한에서는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염소를 많이 키웠거든요. 저희 집에서도 염소를 키웠어요. 북한의 군부대들에서도 고난의 행군으로 모든 후방공급 사정들이 어려워지자 염소를 길러서 영양보충을 하게 하는 등 대대적으로 염소 키우기를 했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저희들에게 염소가 많이 친숙하다고나 할까요? 정숙 씨 역시 북한에서부터 염소를 많이 키워봤기에 한국에서 흑염소농장을 하는데 있어 큰 어려움도, 거부감도 없었다고 합니다.
누구나 배를 곯았던 고난의 행군 시기
정숙 씨 삶에 여유가 있었던 이유
김인선: 군부대에도 배급이 끊기고 염소를 길러서 먹어야 했을 만큼 힘들었던 기간, 바로 고난의 행군입니다. 그런데 박정숙 씨는 고난의 행군 시절에도 배를 곯지 않았다면서요?
마순희: 네, 그렇습니다. 좋은 집안에, 정숙 씨의 위치 또한 대단했으니까요. 박정숙 씨는 자랄 때부터 인테리였던 부모님 덕에 큰 고생을 하지 않고 고등중학교 과정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인민군대에 입대했는데 그것도 가장 선발되기가 어려운 공군부대에 수백 대 일의 높은 경쟁률을 뚫고 1990년 5월에 입대했습니다. 정숙 씨는 입대 후 통신결속소의 전투기 기록수로 복무했고 4년 후에는 여성지휘관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공부하고 다시 공군부대에 군관으로 복무했다고 합니다. 정말 좋은 곳에서 일을 한 거죠. 북한에서 공군은 군부대 중에서도 가장 대우가 좋으니까요. 오죽하면 최고 대우를 비행사 대우에 비길까요. 북한 전역에서 공수해 오는 고급 특산물로 비행사의 삶이 보장된다고 볼 수 있는데요. 부대 내에 식당에서 나오는 음식의 질도 최고 수준인데다가 비행사 가족이 받는 식료품도 모두 평양에서 특별히 내려온다고 하더라고요. 정숙 씨 역시 이 모든 혜택을 누리면서 살아온 거죠. 북한 공군부대에서 중대장까지 지낸 후 2002년 7월에 제대했고 9월에 공군비행사와 결혼했습니다. 정숙 씨는 제대를 했어도 남편이 공군비행사였기에 최고수준의 대우를 받으며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숙 씨에게도 시련이 닥쳤습니다.
공군비행사 남편 불의의 사고로 사망 후
하루에 중국 돈 100원 번다는 말에 압록강 건너
고난의 행군 시기도 큰 어려움 없이 잘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공군이라는 큰 틀 안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 안전막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결혼한 지 3개월 후 남편이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고 이후 정숙 씨의 생활은 급속도로 어려워졌습니다. 사실 순직자 가족이라 좋은 직장을 알선해 주었다고 하는데요.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정숙 씨는 배급도 안 나오는 직장 일이 정말 하기 싫었습니다. 결국 정숙 씨는 2005년부터 동사무소에 적을 두고 장사를 시작했고 생계를 이어 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혜산에서 원산으로 장사를 오가던 한 여성에게서 중국에 가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는 정보를 접했습니다. 자기와 함께 중국에 가면 하루에 중국 돈 100원도 벌 수 있다고 했다는데요. 중국 돈 100원이면 북한 돈으로 10만원에 해당하는 거금입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북한에서는 그런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었기에 2007년 10월, 정숙 씨는 그 여성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게 됐습니다.
김인선: 좀 더 잘 살기 위해 선택한 중국행이 많은 북한 여성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꿨잖아요. 대부분의 북한여성들이 브로커들의 거짓말에 속아 인신매매로 팔려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정숙 씨는 잘 알아보고 따라간 건지 걱정이네요.
마순희: 정숙 씨의 삶도 여느 탈북여성들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곳이라고 해서 따라간 곳이 인신매매로 팔려가는 곳이었습니다. 북한 여성들을 전문으로 매매 알선하는 곳이었는데 한 명당 얼마에 팔린다는 말로 표현을 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에게 여성들은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었습니다. 팔려간다는 것을 알게 된 정숙 씨는 도망을 가려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다섯 명이나 되는 건장한 남자들이 정숙 씨를 태워서 끌고 갔습니다. 보통 여성이라면 두려운 마음에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을 텐데 정숙 씨는 달랐습니다. 도망가려는 의지가 워낙 완강하니 인신매매단이 협상을 요청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들이 제안한 협상은 여기서 도망을 가면 자기네들도 곤란하고 도망가는 사람도 잡히면 어떻게 될지 전혀 장담할 수 없으니 차라리 산동성으로 가서 도망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의지 하나로 인신매매단과 협상한 정숙 씨
자신의 몸값까지 받아내고 도망쳐
김인선: 인신매매로 자신을 팔아 넘기려던 사람들에게 도망가는 방법까지 듣게 됐네요.
마순희: 그러니까요. 난 사람이라고 할까요? 웬만한 사람이라면 도망가라는 말을 듣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했을 텐데 정숙 씨는 인신매매단에게 또 다른 제안을 했습니다. 거기는 경계가 느슨하니 탈출하기도 쉬울 것이라고 하기에 그러면 얼마에 팔려 가는지 그 돈의 3분의 1만이라도 돈을 주면 그대로 조용히 가겠다고 했다는 겁니다. 너무도 당당한 정숙 씨의 기에 눌렸는지 인신매매단은 정숙 씨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정숙 씨는 한국 돈 50만 원 정도(415달러)를 받고 산동성으로 조용히 따라갔고 마을에 도착한 후 이틀 만에 도망쳐서 산으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김인선: 무시무시한 인신매매단에게서 돈까지 받아내 도망갔다는 분은 정말 처음 보네요. 그런데 다음 행로도 만만치 않습니다. 험한 산길을 잘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박정숙 씨의 못 다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가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