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이 코로나비루스로 2년 넘게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못 하다 보니 삶의 목표도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장거리 달리기(마라톤)를 완주하기 위해서, 자녀들과 전국일주, 세계일주 여행을 하기 위해서, 손주들과 공놀이를 하기 위해서 등 코로나로 못 했던 것들을 위해 더 건강을 챙기게 된 것 같은데요. 탈북민들 중에도 뭔가를 해 내야겠다는 목표, 꿈이 생기면서 건강도 회복하고 급격하게 성장을 하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마순희: 맞습니다. 목표가 있으면 좌절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건강이 제일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탈북민들이 한국에 정착하면서 가장 먼저 하는 일 중의 하나가 탈북과 제3국을 거치는 험난한 노정에서 망가진 건강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공시대에서 소개해 드릴 분도 그런 분이신데요. 2005년에 탈북하여 중국에서 4-5년의 험난한 생활을 거치고 2010년에 대한민국에 입국한 오민정 씨의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민정 씨는 탈북여성들이 가장 선호하는 사무직으로 도서관에서도 근무하고 탈북민 동료상담사로 몇 년간 일하다가 지금은 자신의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멋진 삶을 살고 있는 오민정 씨지만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는데요. 대한민국에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안고 입국했지만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 입소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수술부터 받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안타깝게도 정말 많은 탈북여성들이 한국까지 오는 과정에서 몸과 마음이 많이 상하게 되는데요. 살아남기 위해서 또 정착하기 바빠서 자기 몸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민정 씨 역시 마찬가지였던 거죠?
외상하던 국경경비대 군인들
빚 대신 중국에서 큰돈 벌게 해주겠다 제안
마순희: 네. 그렇습니다. 민정 씨의 경우 북한에서 지낼 때 국경지대의 읍내시장에서 자그마한 식품가게를 열고 생계를 이어 나갔는데요. 2005년에 갑자기 두만강을 건너게 됐습니다. 민정 씨가 운영하는 식품가게는 밑천이 적게 드는 자그마한 가게로, 조금만 외상값을 받지 못 하면 자금이 돌아가지 못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가고 제때에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가게를 운영해 나갈 수 없었던 거죠. 그런데 민정 씨의 식품가게를 찾는 손님 중에 두만강 국경경비대 군인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배가 고프다 보니 외상으로 식품을 가져가고는 제때에 돈을 갚지 않는 일이 태반이었는데 그나마 매상을 올리는 것이 군인들이다 보니 민정 씨는 울며 겨자먹기로 물건을 팔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군인들은 불법으로 도강하는 사람들의 뒤를 봐 주고 뭉칫돈이라도 받으면 외상값을 물기도 했지만 물건 값을 지불할 때까지 무턱대고 기다려 줄 수 있을 정도로 밑천이 든든한 가게도 아니었던 민정 씨는 군인들에게 빚 독촉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때 군인들이 민정 씨에게 빚을 갚는 대신 중국에 가서 돈을 벌 수 있게 도움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군인들은 중국에 가면 광산노동자들이 일하는 곳에서 식당에서 일할 수 있도록 선을 놓아주겠다는 협상 조건을 민정 씨에게 건넨 거죠.
김인선: 북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중국에서 몇 달만 일해도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이 있잖아요. 민정 씨도 분명 그런 소문을 들었을 테니 군인들의 말을 거절하기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군인들에게 속아 두만강 건너
결국 한족 남성에게 팔려가
마순희: 맞습니다. 당장 가게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이었던 민정 씨였기에 군인들의 제안은 거절하기 힘든 유혹이었습니다. 눈 딱 감고 한 달만 참으면 집안형편이 필 거라는 기대를 안고 민정 씨는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하지만 군인의 소개로 깊은 산속의 광산에 갔더니 식당에서 일하는 일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민정 씨를 산동 출신의 한족 남성에게 팔아 넘겼던 것입니다. 경비대 군인에게 이미 대가로 돈을 지불했다기에 민정 씨는 오도가도 못 하고 산속에서 한족 남성과 살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동거였지만 한족 남편은 좋은 사람이었고 금방 임신까지 됐습니다. 착한 남편에 아이까지 생기고 얼핏 보면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현실은 참혹했습니다. 민정 씨는 지금도 꿈에서라도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이 있다고 하는데요. 중국정부의 산아제한정책으로 북한 여성들이 중국에 와서 애를 낳으면 '지성반'이라는 단속기관에서 벌금을 받아 가는데 그 '지성반'이라는 이름만 떠올려도 몸서리가 쳐지기 때문입니다. 민정 씨는 지성반을 피해 사느라 시내에는 나가지도 못 하고 산속에서 애가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숨어 살아야 했습니다.
김인선: 중국 정부에서는 1978년부터 가구당 1자녀인 경우에 혜택을 주고 2자녀 이상일 경우 감봉, 벌금, 승진제한 등의 불이익을 주는 산아제한정책을 시행해 왔으니까요. 2013년부터 조건부로 두 자녀를 허용했고 2016년부터 조건 없는 두 자녀 정책으로 선회했지만 1978년부터 2013년 사이에는 산아제한정책이 엄격했던 시기였기에 호적이 없는 사람도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탈북 여성이 낳은 아이는 어땠을지 쉽게 예상이 되는데요. 민정 씨의 경우 2005년에 탈북을 했으니까 마찬가지 상황이었던 거죠.
중국 단속반 피해
물도 전기도 없는 산속에서
비참하게 살았던 6년
마순희: 그렇습니다. 민정 씨네는 할 수 없이 산속에서 숨어 살아야 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산속이다 보니 민정 씨는 갓난아기를 업고 진흙을 이겨서 귀틀집을 지었습니다. 겨울이면 귀틀집이 눈 속에 묻혔고 식수나 빨래는 눈을 녹여서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깊은 산속도 안전한 피신처는 못 되었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지성반에서 기어코 민정 씨를 찾아냈고 벌금을 내라고 빚 독촉을 했습니다. 민정 씨 부부는 남루했지만 유일한 안식처였던 귀틀집을 버리고 또 다른 곳으로 피신해야만 했습니다. 민정 씨는 지성반의 단속을 피해서 이곳저곳의 산속을 옮겨 다니며 살아야 했던 6년 세월의 그 생활은 꿈에도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기억이라고 했습니다.
김인선: 갓난아기 때부터 4-5살이 될 때까지 병원 갈 일도 많은데, 어린 아이를 키우면서 산속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보통 중국에서 지내면서 한국 소식을 접하게 되는데 민정 씨의 경우 외진 산속에서 지냈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을 것 같거든요. 어떻게 민정 씨는 한국행을 결심할 수 있었을까요?
선교사 통해 알게 된 한국
북한에서 교육받았던 것과 너무 달라
결국 한국행 결심
마순희: 한국 교회의 알선 덕분이었습니다. 중국에서 숨어 살아야만 하는 탈북민들을 돕는 선교사들이 있는데요. 민정 씨도 그런 분들과 만나게 된 거죠. 아기가 다섯살이 되면서부터 몇 십리 떨어진 시내에 간혹 나갈 일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시내에 있는 한 교회에 들르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거기에서 한국에 대한 정보, 그리고 탈북민들이 어떻게 한국에 가서 잘 살고 있는지 하는 정보들도 듣게 되었는데요. 처음 한국행을 권유 받을 때에는 솔직히 호기심보다 거부감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도 인적조차 없는 산속에 숨어서 인삼밭 경비 서면서 살다 보니 한국에 대한 정보를 접할 기회가 전혀 없었고, 민정 씨가 알고 있는 한국은 40년 세월 북한에서 받은 세뇌교육 뿐이라 안 좋은 감정만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민정 씨는 교회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조금씩 한국에 대해 알게 됐고 아이의 장래와 착한 남편이 북한여자와 산다는 죄 아닌 죄로 매번 벌금을 물면서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남편 역시 아이의 미래를 위해 민정 씨에게 중국을 떠나도 좋다고 했습니다. 북한에서도 중국에서도 아이를 놓고 떠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야속하다는 생각을 하며 민정 씨는 어렵게 한국행을 결심했습니다.
김인선: 누구보다 고단했던 중국생활을 했던 민정 씨니까 한국행은 조금이라도 수월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민정 씨의 여정은 어땠을까요?
6개월여 고단한 여정 끝에 도착한 한국
과연 그녀의 한국생활은 평탄할까?
마순희: 한국교회의 주선으로 브로커와 연결되었지만 한국으로 가는 길은 6개월에 걸친, 말 그대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신분을 숨겨가면서 국경을 넘어야 했고 캄캄한 밤길로 수십 리 밀림 속을 헤쳐 나가야 할 때도 많았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태국의 난민수용소에서의 생활이었다고 하는데요. 좁은 공간에서 200여 명이 수용되어 있다 보니 작은 일에도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다툼이 일어나기 일쑤였고 밤에 잘 때에는 반듯이 누워 잘 자리가 없어서 늘 모로 누워서 자야 했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6개월에 걸치는 어려운 한국행을 마치고 마침내 2010년 6월에 대한민국에 입국하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민정 씨의 고단한 삶은 언제쯤 끝이 날까요? 너무도 많은 고생을 하고 어렵게 도착한 한국에서는 민정 씨가 웃을 수 있는 일들만 가득했으면 좋겠는데요. 민정 씨의 한국정착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볼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