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벌써 4월이 됐어요. 포근해진 봄 날씨와 함께 벚꽃이 개화하는 시기인데요. 아쉽게도 코로나비루스 때문에 마음 편히 봄을 만끽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코로나 때문에 여행을 못 가는 사람들이 도심 호텔에서 쉬면서 여행 기분을 내는 일이 많아졌어요.
마순희: 맞습니다. 저 역시 며칠 전에 호텔에 다녀온 경험이 있습니다. 둘째딸이랑 손녀와 함께 여의도의 한 호텔에서 점심을 먹었거든요. 저희처럼 대부분의 방문객들이 미리 예약을 하고 왔고 체온측정부터 거리두기를 한 좌석배치까지 방역수칙을 잘 지키고 있더라고요. 게다가 평소에 접하기 드문 음식 맛에 친절한 서비스까지 받으면서 안전하게 대접받고 온 기분이었습니다. 기념으로 사진도 한 장 찍고 왔는데요. 북한에서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랍니다. 한국에 온 지 한참 지난 저에게도 여전히 낯선 문화인데요. 여름휴가도 멀리 못 갈 때는 바다로 가는 바캉스가 아니라 호텔로 가는 호캉스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여행 온 분위기를 낸다며 비싼 돈을 지불하고 호텔에서 즐긴다는 것이 생소하기는 하지만 코로나로 마음 놓고 여행을 다니지 못하는 요즘 같은 시기에는 그렇게라도 한 번씩 일상에서 벗어나 기분전환(힐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하지만 예전엔 호텔문화에 대해 미처 생각을 못했었습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는 좀 가깝게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이미 8년 전에 우리 탈북민들 중에도 호텔문화를 접한 분이 있더라고요. 그분을 오늘 소개해 드릴게요. 이번 성공시대의 주인공은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호텔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희철 씨입니다.
김인선: 호텔업무 대부분이 고객을 상대하는 일이잖아요. 친절이 생명이라 내공이 좀 쌓여야 할 수 있는 일인데 김희철 씨는 어떻게 호텔에서 일을 하게 됐을까요?
마순희: 희철 씨가 딱히 호텔에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한 건 아니고요. 직업소개소를 통해 알선 받은 곳이 우연하게도 호텔이었습니다. 김희철 씨는 호텔에서 건물의 출입문과 조형물, 건물외형의 노화를 점검하고 보수하는 일들을 하는 영선기사로 근무하고 있는데요. 직접 손님을 상대하지 않는 기술자로 일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처럼 호텔에서 근무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호텔문화를 알게 됐다고 합니다.
김인선: 직업소개소를 통해서라고 하지만 기술자로 입사를 하려면 조건을 갖추어야 하거든요. 보통, 낯선 환경에서 무언가를 시작할 때 자신의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일을 선호하는 편이잖아요. 그렇다면 김희철 씨는 북쪽에 있을 때부터 기술자였을까요?
마순희: 아니요. 김희철 씨는 북한에서 황해남도 은파군의 한 농촌에서 농사일을 하셨던 분입니다. 고난의 행군시기에도 굶지 않을 정도로는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1999년에 함경북도 무산에 살고 있는 누나네 집으로 놀러 갔다가 중국에 살고 있는 친척들의 소식을 접하게 됐습니다. 북한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평생 농촌에서 농사일을 면할 수도 없고 어렵게 입에 풀칠을 한다 해도 돈을 벌 수는 없었기에 희철 씨는 중국에 있는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중국으로 들어갔답니다. 비록 숨어살았지만 상상도 못했던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경험하게 됐고, 1년 반 동안 적지 않은 돈을 벌게 됐습니다. 거기에 친척들이 모아준 돈까지 합치니 북한에서 여유 있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희철 씨는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가던 중 국경경비대에 붙잡히게 됐고 가지고 가던 돈을 모두 빼앗겼습니다. 목숨 걸고 번 돈을 뺏긴 것은 물론 구치소에서 고생도 했는데요. 누나네 가족들이 뒷돈을 주고도 청진시의 도 보위부까지 잡혀가서 죽을 고생을 하고서야 겨우 풀려났다고 합니다.
그 후 희철 씨는 고향으로 갔습니다. 살던 곳으로 갔으나 이미 그곳에서는 나라를 배반한 도강자라고 낙인이 찍혀서 말도 못 할 수모를 겪었다고 합니다. 사실 무산이나 혜산처럼 국경지역에서는 도강자나 탈북자가 워낙 많다 보니 중국에 갔다 온 것쯤은 큰 일이 아니라고 여기지만 황해남도 같은 내륙 지방에서는 워낙 도강자가 드물기도 하고 세상 물정에도 국경지대에 비하면 어두운 편이다 보니 큰 반역자나 잡은 듯 야단법석이었다고 합니다. 희철 씨는 더는 그곳에 있을 수도 살 수도 없었고 다시 중국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데요. 중국에서 몇 년을 살다 보니 이번엔 한국에 대해 알게 됐고 한국행을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발목이 잡혔는데요. 몽골에서 잡혀 다시 북한으로 나가 3년의 감옥생활을 겪어야 했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후 희철 씨는 먼저 중국을 통해서 한국으로 간 어머니의 소식을 듣게 되었고 어머니를 통해 2009년, 꿈에도 그리던 대한민국에 입국하게 됐습니다.
김인선: 다들 목숨 걸고 탈북을 하시지만 그 어떤 분보다 참 어렵게 탈북하셨네요. 그나마 먼저 탈북하신 어머니 덕분에 한국에 적응하기는 좀 낫지 않았을까요?
마순희: 김희철 씨가 한국으로 오는데 필요한 브로커 비용을 대준 것도 어머니셨고요. 심적으로 큰 힘이 된다는 것이 가장 크죠. 하지만 그렇게 어렵게 어머니가 계신 한국에 왔지만 김희철 씨 역시 여느 탈북민처럼 한국 정착이 쉽지 않았습니다. 하나원을 나오면서 처음 배치 받은 곳이 공장이 많아서 취업하기 좋다고 생각한 경상북도 구미였다고 합니다. 혼자 몸이라 가족 부양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지만 한국에 먼저 정착한 어머니에게 의지할 어린 나이도 아니기에 부지런히 일자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북한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아 외국인은 받아주면서 탈북민은 받지 않겠다고 말하는 곳도 있어서 마음에 큰 상처를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희철 씨는 자신이 노력하면 꼭 취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부족한 부분을 하나하나 배워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운전면허를 취득했고 다음에는 컴퓨터학원을 등록하고 열심히 배워서 컴퓨터 관련 자격증도 취득했습니다. 취업을 하려면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중장비학원에 등록해서 기술을 배웠지만 취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연이은 취업실패로 고민하던 중 하나원 시절에 함께 생활하던 친구들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전기학원을 졸업하면 취업하기도 쉽다고 서울로 올라오라고 한 것입니다. 북한에서 살 때에도 전기부분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희철 씨는 서울로 향했고 친구들과 함께 전기학원을 다니면서 기술을 열심히 익혔습니다. 학원을 마친 후에는 자격증도 취득했고요.
김인선: 이번에는 취업으로 연결이 됐을까요?
마순희: 네. 노력의 결실을 이루었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여러 가지 일을 하다가 직업소개소를 통해서 지금의 호텔 영선기사로 취직하게 되었으니까요. 전기학원을 졸업하고 전문기술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직업소개소에 등록을 했다고 바로 취업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엔 소개소에서 하루 일한 만큼 돈을 받는 일용직 일을 연결해주었다는데요. 희철 씨는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의 성실성을 알게 된 직업소개소에서 희철 씨에게 호텔에서 전기기술자를 채용한다는 정보를 알려 주었고 희철 씨는 면접을 보고 취업에 성공한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호텔은 우리들과는 거리가 먼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기술자로 탈북민도 일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김희철 씨를 통해서 알게 됐습니다.
김인선: 기술이 있으면 취업할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다양한데요. 분야도 다양하고요. 찾아보면 탈북민이 일할 곳이 정말 많다는 것을 알려준 김희철 씨의 삶이 다른 탈북민들에게 힘이 될 것 같습니다. 희철 씨의 삶과 성공에 대한 이야기,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 짓고 다음 시간에 다시 이어가 볼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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