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김인선: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남한에서는 아침마다 보게 되는 진풍경이 있는데요. 8시부터 9시 사이에 노란색 버스가 엄청 많이 다닌다는 겁니다. 동네마다 있는 이 버스들은 아이들을 태우고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으로 가는데요. 오늘의 주인공이 바로 이 어린이집과 관련이 있다면서요?
마순희: 네. 오늘의 주인공 김성희 씨는 경기도 수원시에 있는 한 어린이집에서 보육교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성희 씨는 2015년부터 지금의 어린이집 보육교사로 취직해서 지금까지 4년째 어린이집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김인선: 남한의 경우에 갓 태어난 아이부터 5살까지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봐주는 곳이 어린이집이고요. 5살부터 7살까지 다니는 곳을 유치원이라고 하는데요. 북한과는 차이가 많이 있나요?
마순희: 네. 여섯 살부터 일곱 살까지 아이들의 경우 유치원에 다니는 것은 남북이 비슷하지만 북한에선 그보다 어린 아이들이 다니는 곳은 어린이집이 아니라 탁아소라고 부른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또 남한의 경우 갓 태어난 아이도 어린이집에 다니지만 북한의 경우에는 그렇게 어린아이를 맡길 수 없습니다. 보통 네, 다섯 살이 돼야 맡길 수 있는데요. 맞벌이를 하지 않는 가정에서는 아기를 탁아소에 맡길 수 없습니다. 유치원도 엄마들이 일하지 않는 전업주부인 경우엔 북한에서는 부양가족이라고 하잖아요. 이런 경우에는 여섯 살이 되면 유치원에 보내도 되고 안 보내도 무방한 거죠. 그런데 일곱 살이 되면 학령 1년 전 의무교육에 속하기 때문에 무조건 유치원에 보내서 학교 가기 전 교육을 받아야 한답니다.
김인선: 남한의 경우 유치원은 자율적으로 보낼 수 있지만 안 보내는 부모는 거의 없죠. 어린이집도 마찬가진 거 같아요.
마순희: 네 맞아요. 한국에 와 보니 일하지 않는 엄마들도 아기들을 어린이집에 맡길 수 있더군요. 어린이집에 맡기지 않고 집에서 키우는 경우에는 육아지원금을 받기도 하고요. 그뿐 아니라 ‘아이 돌봄 서비스’라고 사정이 생겨서 애들을 돌봐줄 사람이 필요할 때에는 미리 신청하면 집으로 찾아와서 아이들을 돌봐주는 그런 봉사직이 있어서 정말 많이 놀라웠습니다. 놀라운 것은 또 있었는데요. 북한은 탁아소나 유치원을 기업이나 농장에서 운영하고 있어도 모두가 하나의 체계로 운영이 되잖아요. 그런데 한국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물론 북한도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보육기관들과 지방의 탁아유치원하고는 수준에서 차이가 많이 나긴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보육 체계는 국가가 책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개인이 운영하는 보육 기관이 많고 비용의 차이에 따라 사립 유치원, 영어 유치원, 자연 유치원 등 그 종류도 다양하더라고요. 유치원의 운영계획을 듣고 부모의 판단에 따라서 유치원을 선택할 수 있어서 충격이었답니다. 더욱이 노란색 어린이집 차량들이 매일 아침 애들을 실어가고 실어오는 모습들을 북한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답니다.
김인선: 그렇군요. 한국에서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풍경인데 말이죠. 그렇게 엄마들은 아이들을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보내고 잠깐의 자유 시간을 갖거든요. 하지만 성희 씨는 집에서도 아이를 돌보는 거고 밖에서도 아이를 돌봐야 하니까 힘들 것 같아요.
마순희: 아무래도 엄마의 자유 시간으로 본다면 그렇겠죠. 그런데 성희 씨는 집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게 더 어렵게 느껴졌다고 해요. 아이도 잘 키우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니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왕 공부하는 거 직업으로 연결되면 더 좋겠다 싶어서 보육교사를 하게 된 셈이죠. 성희 씨가 보육교사가 된 얘기를 하자면 먼저 성희 씨의 남한생활부터 말해야 할 것 같은데요. 성희 씨는 2003년에 탈북해서 중국에서 6년 정도 살다가 2009년 한국에 왔습니다. 혼자 몸으로 열심히 사는 성희 씨를 보고 탈북 선배들이 가정을 이루면 한국에서 더 잘 정착할 수 있다고 하더랍니다. 그러면서 남성을 소개해 줬는데 그 사람이 바로 지금의 남편인 거죠. 결혼하고 1년 후 첫 아이가 태어나게 되면서 직장생활을 더 할 수가 없었어요. 30대 초반의 젊은 혈기인지라 일도 하고 싶더랍니다. 그래서 성희 씨는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됐다는데요. 인터넷으로 집에서도 공부를 할 수 있는 사이버대학에서 아동보육학과에 입학한 겁니다. 학과 공부뿐 아니라 사회복지사, 아동보육교사 자격증, 컴퓨터 자격증까지 취득하면서 미래를 준비했고 둘째 아들을 출산한지 3개월 이후인 2015년부터 어린이집 보육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김인선: 남한의 경우 결혼한 여성이 임신과 출산, 육아의 문제로 직장을 그만두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러다가 다시 일을 시작한다는 게 생각보다 어렵거든요. 그런데 성희 씨는 아이를 키우면서 공부도 하고 취업준비를 했으니 잠 잘 시간도 부족했겠어요.
마순희: 맞습니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에는 쏟아지는 잠 때문에 공부하기가 더 어려웠다고 하는데요. 잠을 참아가면서 컴퓨터 공부까지 했답니다. 결국 둘째를 출산하기 몇 주 전에 자격증까지 취득했다고 하니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두 아이를 키우며 취업준비를 했지만 그 노력을 쉽게 인정받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성희 씨는 나름대로 준비를 많이 했기에 취업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죠. 취업을 위해 제출해야 하는 서류, 이력서에 북한의 학교를 썼더니 면접을 보는 분들이 어디에 있는 학교냐며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보더랍니다. 그래서 졸업한 학교는 함경북도에 있다고 대답을 했더니 얼굴색이 확 변하면서 탈북민이라 못 받겠다고 하더랍니다. 남북한의 문화적 차이나 언어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어느 학부모가 탈북자에게 자신의 자식을 맡기겠냐고 하더랍니다.
김인선: 아무래도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들의 경우에는 한창 말을 배우는 나이다보니까 엄마들이 선생님들의 말투에 예민하게 반응을 하긴 해요. 아이들이 선생님의 말투를 따라하게 되니까요.
마순희: 맞습니다. 그래서 성희 씨가 탈북자라는 이유로 몇 번의 거절을 경험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희 씨는 제가 만났을 때 전혀 북한 말투가 아니었고 서울사람들과 다르지 않았어요. 그동안 회사 생활도 하고 대학공부 4년을 하고 또 남편도 한국분이라 말투를 고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해요. 그리고 성희 씨가 출근하는 곳은 탈북민이 많이 사는 수원입니다. 탈북 여성의 아이들이 많아지면서 오히려 남북한을 다 같이 경험한 성희 씨의 경우에는 오히려 장점이 되기도 했답니다. 일하는 탈북 여성이 자신의 아이를 맡기는데 교사가 성희 씨처럼 같은 탈북민이라면 더 믿음도 가고 말도 잘 통하니까요.
그런데 성희 씨의 집이 지금 근무하는 어린이집에서 멀다 보니 두 아이를 태우고 아침저녁으로 승용차로 출퇴근해야 했습니다. 아내가 혼잡한 교통상황에서 출퇴근하는 것이 늘 불안하다는 남편이었기에 자신의 출근 거리가 좀 멀어졌지만 아예 집을 수원으로 옮긴 것입니다. 지금은 걸어서 5분 남짓한 거리에 성희 씨가 근무하는 어린이집이 있더라고요.
김인선: 부럽네요. 일하는 엄마들은 친정 엄마나 남편의 도움이 없으면 돌봐주는 사람을 고용하거나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잖아요.
마순희: 그렇죠. 성희 씨의 친구들은 행복한 결혼생활과 적성에 맞는 직업까지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은 성희 씨를 부러워하면서 자신들도 좋은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하기도 한대요. 성희 씨에게 앞날의 희망이나 꿈에 대해 물어보았는데요. 힘들다가도 어린이들의 밝은 웃음을 보면 모든 피로가 다 가셔지는 것 같다면서 아무래도 자신에게는 어린이집 보육교사가 천직인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성희 씨는 지금처럼 온 가족이 건강하고 애들을 키우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희망이라고 하더라고요.
김인선: 어린이집 보육교사 김성희 씨의 얘기를 들어봤는데요. 아이를 낳은 탈북여성들도 얼마든지 재취업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준 것만으로 그녀의 도전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탈북민들의 성공과 그 기준에 대해 들어보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어린이집 보육교사 김성희(가명) 씨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