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남한사람들의 편견을 깬 탈북남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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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여전히 마스크는 끼지만 나들이도 가능해졌고 날씨까지 좋아서 요즘 가족끼리 여행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아빠들이 그렇게 노력을 많이 한대요. 자녀들에게 좋은 아빠가 되고 싶어서요. 좋은 아빠는 어떤 아빠일까요? 돈 잘 버는 아빠? 운동 잘하는 아빠? 잘 놀아주는 아빠? 특별한 기준도 없고 저마다 생각도 달라서 정의 내리기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마순희: 네. 맞습니다. 모든 아버지들이 자녀들에게 좋은 아빠가 되어 주고 싶겠지만 때때로 본의 아니게 자식들에게 가슴 아픈 말을 하기도 하고 반대로 말로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 해서 무심하게 여겨지는 경우도 있을 텐데요. 분명 자녀들을 위해서 저마다 최선을 다 해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오늘 성공시대에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의 좋은 아빠로, 인생의 본보기가 되어 열심히 살아가고 계시는 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드릴까 합니다. 2003년에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수료하고 서울시 강서구에 정착해 살고 있는 강영식 씨가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영식 씨는 건설현장 일을 시작으로 굴착기 공장 등 직장을 다니며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내는 평범한 아버지 중 한 사람이랍니다.

898제대군인

무산광산에서 굴착기 운전하다

강영식 씨의 고향은 황해남도 신천군이었습니다. 영식 씨도 다른 탈북민 남성들처럼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인민군대에 입대해 군인생활을 시작했는데요. 군 생활을 하던 중 집단적으로 제대되어 무산광산에 배치 받은 일명 898제대군인 출신이었습니다. 영식 씨는 무산광산에서 굴착기 운전공으로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고 결혼 후 두 자녀를 키우면서 큰 문제없이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고난의 행군으로 갑자기 생활이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무산지방에는 아무 연고도 없었던 제대군인이었던 강영식 씨 경우에는 여느 사람들보다 더 막막했습니다. 온 식구가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던 때였지만 그렇다고 직장에 나가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대로 앉아 있으면 온 가족이 다 굶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영식 씨는 친구들과 함께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하지만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구사일생으로 목숨만 겨우 건졌습니다. 영식 씨는 살았다는 안도감보다 북한에 빈손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중국에서 숨어 지내는 것도 여의치 않았기에 영식 씨는 후일을 기약하며 한국행을 할 수 밖에 없었고 2002년 말 한국 땅을 밟게 됐습니다.

굶는 날이 더 많았던 고난의 행군 시기

살기 위해 탈북, 그리고 한국행

김인선: 2002년엔 어선을 타고 집단 귀순을 한 탈북민들이 계셨어요. 8월에 북한주민 21명(남자 14명, 여자 7명)이 서해를 통해 귀순했는데요. 인원 면에서 최대 규모의 집단 탈북이라 떠들썩했거든요. 강영식 씨도 이맘때쯤 탈북하셨던 거네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제가 영식 씨를 만난 것이 2003년 하나원에서였거든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영식 씨는 조용한 성격에 말수가 적은 편이었습니다. 묵묵히 모든 생활에 성실히 참가하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거든요. 타고난 본성도 있었겠지만 자녀들 생각에 말수가 더 적어졌던 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원에서 행복하게 뛰노는 아이들 모습을 보면서 북한에 두고 온 자식들 생각이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의 교육을 수료한 후 강영식 씨는 서울의 강서구에 정착했습니다. 어서 빨리 돈을 벌어서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을 데려와야겠다는 일념으로 일자리부터 찾았습니다. 낯선 한국 생활의 시작이었지만 영식 씨는 아직 40대라 일이 무섭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2003년 5월, 하나원을 나온 후 영식 씨가 처음으로 일자리를 찾은 곳은 서울과 춘천 사이를 잇는 철도, 경춘선 고속철도 건설 현장이었습니다. 한국사회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던 시기여서 생소한 것도 많았고 두려움도 컸지만 영식 씨는 몸을 아끼지 않고 성실하게 일을 했습니다. 그 덕분에 함께 일하는 분들과의 관계도 좋아졌습니다. 처음엔 탈북민에 대한 편견과 남북한의 다른 언어표현으로 오해가 생겨서 동료들이 영식 씨를 경계했지만 그의 성실성 앞에 혀를 내둘렀고 어떤 선배는 좀 쉬어가며 하라고 작업도구를 빼앗은 적도 있었다고 하니, 영식 씨가 얼마나 열심히 직장생활을 했는지 가늠이 됩니다.

사회성 부족하다는 탈북민에 대한 편견

성실함과 상대에 대한 배려로 인정받아

영식 씨는 내가 좀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성실하게 일하고 상대에게 맞추어 주다 보니 마음도 편하고 서로 간에 불편한 점도 사라져서 오히려 더 좋았다고도 합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영식 씨는 시간이 흐를수록 즐겁게 일을 할 수 있었고 7개월 후에 경춘선 고속철도 공사는 마무리 되었습니다. 지금의 서울과 춘천 사이의 경춘선 고속철로 구간 중 어딘가에는 영식 씨의 땀과 노력이 깃들어 있을 것입니다.

김인선: 현장 일을 처음 시작하면 현장에서만 쓰는 용어 때문에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또 요령도 없어서 힘들기만 하고 일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지속적으로 일을 해야 경험도 쌓이고 자신만의 요령이 생기는데요. 강영식 씨의 경우 7개월가량을 지속적으로 일하면서 현장 일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텐데 공사가 마무리돼서 아쉬웠겠어요.

마순희: 네. 고속철도에 자신의 노력이 녹아 있기에 뿌듯하면서도 작업이 마무리 되면서 일자리가 사라진 셈이 됐으니 아쉬움도 컸을 겁니다. 그러나 영식 씨는 새로운 일을 찾아야 한다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영식 씨의 성실함이 워낙에 정평이 났기 때문에 지인들의 추천과 소개로 바로 취업이 됐습니다. 강영식 씨는 고속철도 공사가 마무리 된 후 2004년 1월부터는 인천 남동공단에 있는 굴착기를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습니다.

김인선: 굴착기는 북한에서부터 영식 씨와 인연이 깊은 기계잖아요?

탈북민들의 흔한 착각

“북한에서 하던 일 남한에서도 가능하겠지”

마순희: 맞습니다. 강영식 씨는 무산광산에서 굴착기 운전공으로 직장생활을 했으니까요. 그런 이유로 영식 씨 역시 자신에게 익숙한 일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출근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기대와는 조금 달랐습니다. 굴착기 작동방법이 북한과는 많이 달랐다고 하는데요. 북한은 전기식이었지만 남한은 소음과 비산먼지 발생이 적은 유압식이었습니다. 또 기계부터 기계부품까지 모두 영어와 외래어로 되어 있어서 용어에 대한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식 씨는 타고난 성실성으로 그곳에서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고 용어가 익숙해질 때까지 반복적으로 암기했습니다. 해야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하고 맡겨진 일은 책임감 있게 해냈습니다.

김인선: 일에 대한 열정도 크고 동료들과의 관계도 좋았기 때문에 한 회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했을 것 같은데, 영식 씨는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또 다른 곳에 취업을 하게 됐다면서요?

마순희: 네. 영식 씨가 다니던 굴착기를 만드는 회사가 폐업을 하게 되면서 다른 직장으로 옮기게 됐습니다. 입사한지 5년 정도 됐을 때 회사가 문을 닫은 거죠. 어쩔 수 없이 영식 씨는 다른 회사를 알아봤고 2009년부터 경량철근, 실내장식용품(인테리어) 자재를 생산하는 회사에 취직해서 철판 가공, 절단 등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매 순간이 도전이었던 탈북민 아빠

또 다른 도전의 결과는?

김인선: 탈북민들에겐 낯선 세계에 산다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인데, 익숙해질 만하면 새로운 일을 도전하고, 또 익숙해지면 다시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거든요. 건설현장 일이나 굴착기 만드는 공장 일에 이어 실내장식용품을 만드는 일까지! 익숙하고 비슷한 현장 일도 있겠지만 정반대로 새롭게 익혀야 하는 일이 있었겠죠? 익숙함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강영식 씨가 이번에도 잘 해낼 수 있었을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볼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김인선, 에디터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