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남한사람들의 편견을 깬 탈북남성(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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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강영식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그동안 자녀들을 위해 희생하고 애쓰는 탈북 엄마들에 대한 이야기는 많았는데요 상대적으로 아빠들에 대한 사례가 적었어요. 물론 가정적이고 좋은 아빠로 성공시대에 소개된 분들이 계시긴 했지만 여전히 탈북 남성, 북한 남성 하면 가부장적이고 거친 면이 있다는 선입견이 있거든요. 그런데 강영식 씨를 통해 그런 선입견을 떨칠 수 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탈북여성보다 남성이

더 정착하기 어렵다?

마순희: 네. 그렇습니다. 세상 모든 부모가 자녀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겠지만 보여지는 면은 제각각이니까요. 애정표현도 잘하고 감정표현도 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겉으로 드러나게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강영식 씨가 묵묵하고 조용한 성격입니다. 북한에서 지낼 때는 무산광산에서 굴착기 운전공으로 일했고 한국에 와서는 고속철도 건설현장 일부터 굴착기를 만드는 공장 일 등 주로 몸을 쓰는 일을 했는데도 차분한 성격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현장 일을 하다 보면 말과 행동이 거칠어진다고 하는데 강영식 씨는 예외였습니다. 탈북민들 중에는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술에 의지하는 경우도 있고 마음의 병이 생기는 경우도 있는데 영식 씨는 술에 의존하지도 않고 북한에 두고 온 자녀들을 생각하며 2002년 말, 한국에 도착한 후부터 지금까지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보냈습니다.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온 후부터 바로 일을 시작해 지금까지 영식 씨는 쉬지 않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영식 씨는 일이 힘들어서 그만 둔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처음 시작한 고속철도 건설현장 일도 작업이 마무리됐기에 다른 일자리를 찾았던 것이었고, 새롭게 찾은 굴착기 만드는 공장 일도 5년 만에 그만 둔 이유가 회사의 폐업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2009년부터 실내장식용품(인테리어) 자재를 생산하는 회사에 취직해서 철판 가공과 절단 등 여러 가지 일을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마다 작업환경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작업 현장도 기계 이름도 생소해서 명칭부터 하나하나 다시 배워 나갔고 함께 일하는 사람과의 관계도 원점에서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언어소통에서부터 어려움이 생기니 작은 오해가 시작되고 불편함이 생기고 얼굴을 붉히는 언쟁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탈북민들이 겪는 사회생활 부적응

근면과 성실로 버틴 영식 씨

단독 급여 인상 공표로 인정받아

김인선: 어떤 상황에서도 근면성실하고 차분했던 강영식 씨였기에 큰 문제없이 잘 해결했을 것 같은데요?

마순희: 맞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고 했던가요. 강영식 씨는 남들이 쉴 때에도 쉬지 않고 열심히 청소를 했고 기계부품 이름을 하나하나 외워 나갔습니다. 강영식 씨의 근면 성실함 앞에는 다른 어떤 무기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동료들은 영식 씨의 서툰 언어를 이해하고 닫혔던 마음을 열었습니다. 사장님은 다른 직원들보다 강영식 씨의 급여를 더 올려 준다고 직원들 앞에서 공표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진심 어린 노력과 성실함을 잘 알고 있는 직원들도 누구나 당연하다고 받아들였고 영식 씨는 '진심을 담아 일하면 누구나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10년을 영식 씨는 실내장식용품(인테리어) 자재를 생산하는 회사에서 일했습니다.

김인선: 영식 씨가 그렇게 성실하게, 억척스럽게 일을 하는 이유가 북한에 두고 온 자녀들이었다 면서요?

마순희: 맞습니다. 여느 탈북민처럼 영식 씨도 북한에 남겨진 가족을 데려오기 위해 아글타글 돈을 모았고 각방으로 연계를 위해 노력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중국에 도착한 두 남매가 인터넷을 통하여 아버지를 찾는다는 기사를 영식 씨의 지인들이 접하게 됐고 강영식 씨의 사연을 알고 있었던 지인들이 연락을 취했습니다. 최종적으로 영식 씨의 두 자녀가 맞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고, 영식 씨는 한국에 온 지 10여 년 만에 사랑하는 가족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시름시름 앓고 있었던 아내는 하늘나라로 떠나갔고, 두 자녀는 아버지를 찾아서 중국으로 탈출했다는 겁니다. 중국에서 탈북민들의 인터넷 소통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자녀들이 아버지를 찾는 사연을 올렸던 것이 결정적인 소식통이 된 것이죠.

어렵게 한국으로 온 자녀들 앞에서

회사 대표의 평생 잊지 못할 말 한 마디…

“너의 아버지는 회사의 기둥이고 자랑”

중국에 있다는 두 자녀를 데려오는 데는 적지 않은 자금이 필요했는데요. 워낙 성실하게 일하고 있는 강영식 씨 일이라 사장님도 발 벗고 나서서 도움을 주었답니다. 덕분에 영식 씨의 두 자녀는 한국에 무사히 입국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하나원을 수료하고 처음 오던 날 영식 씨는 아들을 데리고 회사에 나가서 인사를 시켰다고 하는데요. 사장님은 한국까지 아빠를 찾아오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잘 왔다고 하시며 봉투에 현금 100만원, 800달러가 넘는 돈을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너의 아버지는 우리 회사의 기둥이고 자랑이라고 칭찬해 주셨는데, 그때의 고마움을 영식 씨는 지금도 잊지 못 한다고 합니다.

김인선: 소식도 없던 아버지였지만, 또 그래도 낯선 곳에서 잘 적응해 인정받고 있는 아버지를 보는 자녀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마순희: 그동안 아버지 없이 고생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도 컸지만 원망도 없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영식 씨의 아들도 아버지가 자신들을 데려오기 위해 어떻게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지를 잘 알게 되면서 달라졌습니다. 이제부터는 자신도 아빠의 힘이 되어 드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학교공부는 물론 집안의 크고 작은 일까지 아빠의 손이 미칠 세라 알아서 해내기 시작했습니다.

김인선: 자녀들이 도와준다고 해도 남자 혼자 아이를 키우면서 산다는 게 쉽지 않거든요. 주변에서 좋은 분 소개시켜주겠다고 주선해 주는 분은 없으셨을까요?

한국에 와서 그가 재혼을 하지 않은 이유

마순희: 네. 특별히 소개를 받지도 또 원하지도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지금도 강영식 씨는 혼자 살고 있는데요. 워낙 내성적인 성격이기도 하지만 혼자 사는 것이 더 편하다는 강영식 씨입니다. 자녀들의 학업문제로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역의 복지관이나 방과 후 교실 등에서 많은 도움을 받게 되어 두 자녀도 대학을 졸업하고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했습니다. 현재 강영식 씨의 두 자녀는 모두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가끔씩 주말이면 귀여운 손자, 손녀들의 재롱을 보는 것이 낙이라는 강영식 씨입니다. 오래지 않아 세 번째 손주도 태어날 것이라며 자랑하더라고요.

김인선: 고난의 행군 시기부터 탈북, 한국정착까지 고생은 많이 하셨지만 이야기가 점점 해피 엔딩, 행복한 결말을 맞는 것 같은데요. 한국에서 살면서 지금의 해피 엔딩에 이르기까지 어떤 점이 가장 힘드셨을까요?

마순희: 우리 탈북민들 중에서 정착하면서 여러 가지 사기에 걸리지 않았던 사람이 얼마 없듯이 영식 씨도 기억하기조차 싫은 다단계 사기를 당했던 적이 있습니다. 자식들을 데려오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알고 지내던 북한사람이 그렇게 월급만 받아서 어떻게 애들 학원비까지 충당하겠느냐며 큰돈을 벌게 해 준다고 그를 꼬드겼습니다. 결국 지인의 말에 넘어갔고 그동안 벌어놓았던 1만 2천175달러(1500만원)를 고스란히 잃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는 그 사기꾼도 죽이고 자기도 죽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어린 자식들을 키우고 공부시키려면 살아야만 했습니다. 강영식 씨는 지금도 그때가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영식 씨도 어느덧 60대 중반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다니던 회사는 그만두고 지금은 지역의 아파트 단지에서 경비원으로 근무하고 있는데요. 여전히 새롭게 자신에게 맡겨진 업무에 최선을 다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부끄럼 없이 일하며 생활해 왔다고 자신할 수 있다는 강영식 씨. 앞으로의 여생도 늘 행복하길 바라고 또 진심으로 응원하는 마음입니다.

김인선: 강영식 씨의 사례를 통해 모정만큼 부정도 깊고 크다는 것을 느꼈고요. 성실함 만큼 강한 무기는 없다는 것을 배웁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