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한국에선 코로나비루스의 사망률이 0.13%로 떨어지면서 코로나비루스가 독감 정도로 여겨지고 있는데요. 지난주부터는 실외에서 마스크, 얼굴가리개를 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입니다. 그래선지 지난주는 5월 5일 어린이날부터 5월 8일 어버이날까지 가정의 달을 맞아 나들이를 나선 사람들이 정말 많았는데요. 서울에서 강원도까지 평소 2시간 반 정도면 도착 가능한데 이번 연휴엔 7시간이 걸렸다고 하더라고요. 놀이동산에도 사람들이 몰리면서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었다고 하고요. 덕분에 고속도로에서 근무하시는 분들이나 유원지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정신없이 바쁘셨을 텐데요. 탈북민들 중에도 고속도로 요금소에서 통행료를 받는 일하시는 분들이 많으시잖아요?
정착 초기 탈북민들 중
고속도로 요금수납원이 많은 이유
마순희: 맞습니다. 우리 탈북민들 중에도 고속도로 요금소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 성공시대에서 소개해 드리기도 했는데요. 다른 직업들에 비해서 사람들과 어울려서 하는 일이 아니다 보니 언어적 이질감을 많이 느끼는 초기 정착하시는 분들에게도 큰 무리 없이 근무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요금소에서 근무했던 분들이 꽤 되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회사와 사회로부터 각종 보장을 받을 수 있는 4대보험이 가능한 직장이기에 요금소에서 일을 하게 되면 취업장려금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어디 그뿐인가요. 하루 8시간 근무로 여유시간이 많아 일하면서 자격증 취득도 할 수 있어 우리 탈북민들이 많이 선호하는 직종이기도 합니다. 특별한 기술이나 전문성이 없더라도 누구나 성실히 근무하기만 하면 되는 직업인데다가 도로공사에서 많은 신입생들을 계속적으로 채용하다 보니 취직이 용이해서 초기정착하는 탈북민들이 많이들 일하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성공시대 주인공도 고속도로 요금소에서 한국정착을 시작한 탈북민 중의 한 사람인데요. 2012년에 한국에 입국한 올해 나이 50살 된 조민주 씨입니다.
김인선: 고속도로에서 근무하시는 분들을 보면, 여성의 경우엔 주로 고속도로 이용요금을 받는 업무를 하고 남성의 경우에는 설비관리나 과적차량 단속 등의 업무를 하시더라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통행료를 받는 요금소 업무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탈북민들이 초기 정착할 때에 많이들 지원하는데 민주 씨도 마찬가지였나 보네요.
마순희: 맞습니다. 민주 씨는 2012년에 한국에 도착하여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의 생활을 마친 후 거주지인 경상도에 정착하자마자 부업부터 시작했습니다. 가사도우미 일자리였는데요. 한국생활이 처음이라 뭐가 뭔지도 모를 때였지만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일이라고 하기에 선뜻 하겠다고 나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민주 씨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북한을 떠나 중국이나 3국에서 몇 년씩 살다가 온 탈북민들과 달리 민주 씨는 북한에서 거의 직행으로 한국에 도착한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북한에서 만져보지도 못한 여러 가지 가전제품을 어떻게 다룰 수 있었겠습니까. 모든 것이 서툴렀습니다. 게다가 집주인이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여기는 어떻게 청소하고 또 저기는 일반세탁세제가 아닌 살균이 가능한 세제인 락스로 해야 한다는 등 구체적으로 지시를 하기도 했습니다. 민주 씨는 주인이 눈에 차지 않아 한다는 것이 여실히 보였습니다. 그 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면서 민주 씨는 내가 이렇게 한국에 와서 남의 집 청소나 해 주려고 왔는가 하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고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남한 와서 청소, 설거지로 시작하는 탈북민
자괴감에 빠지다
김인선: 청소전문가로 큰 성공을 거두는 사람들도 있고, 그런 직업에 만족하는 분들도 늘면서 직업에 귀천이 없는 세상이 되어가고는 있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직업적 차별이 존재하긴 하죠. 특히나 북한에서 출신성분이 굉장히 좋았다거나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편이라 고생을 모르고 살았던 분들은 처음 한국에 와서 그런 분위기에 적응을 더 못하시더라고요.
마순희: 네. 민주 씨 역시 심적으로 힘들었을 겁니다. 민주 씨는 대부분의 탈북민들처럼 중국에서 몇 년을 체류하다가 온 사례가 아니라 북한에서 직행하여 한국에 오다 보니 모든 것이 더 적응하기 어려웠을 테니까요. 사실 민주 씨는 북한에서 이발사로도 일했고 장사도 하면서 큰 어려움 없이 살긴 했습니다. 민주 씨의 남편도 혜산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직선도로건설장에서 대대장으로 근무했는데요. 모든 것을 자력갱생이라고 했기에 없는 자재도 자체로 해결해야 했고 밤을 밝히면서라도 공사 기한을 맞추어야 했습니다. 이런 어려운 업무를 계속하면서 민주 씨의 남편은 몸도 마음도 점점 지탱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민주 씨의 남편은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두통을 호소했고 특별한 약이 없다 보니 어느 날부터인가 아편에 손을 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통증을 이기려고 조금씩 입에 댔던 아편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중독으로 이어졌습니다. 민주 씨는 나날이 망가져 가는 남편의 모습을 그대로 지켜 볼 수만 없었습니다. 남편의 아편중독을 고쳐보려고 민주 씨는 남편과 함께 중국으로 들어갔습니다.
김인선: 오직 남편의 건강회복만 생각하고 떠난 중국행이었는데, 민주 씨 부부에게 곤란한 상황이 생겼다면서요?
살기 위해
모든 잘못을 아내에게 덮어씌운 남편
마순희: 그렇습니다. 수액주사 한 통도 맞기 힘든 북한에서는 남편을 치유할 수 없다는 생각에 중국에 들어가서 남편을 반드시 고치고 말겠다고 마음먹고 떠난 길이었는데 남편이 중국에서 잡혀 북송이 됐습니다. 남편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북한에 남아 있는 두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서 중국에 있는 민주 씨에게 모든 잘못을 덮어 씌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민주 씨는 북한으로 넘어 갈 수도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남편에 대한 원망보다도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아야 남아 있는 두 자식들을 지킬 수 있는 남편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라 민주 씨는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다 잘못했다고, 죽더라도 다시 강을 건너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준비할 때 북한의 친척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다시 넘어 올 생각을 절대로 하지 말라고, 그러면 민주 씨 뿐 아니라 온 가족이 살아남지 못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민주 한국행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아편이 마약인 줄도 모르고 공공연하게 재배하면서 사람들을 아편중독에 걸리게 하는 북한정권을 끝없이 원망하면서 눈물로 떠난 길이었습니다. 민주 씨의 눈물은 마를 새가 없었는데요. 제3국을 거쳐서 한국에 도착한 후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는 동안 남편이 사망했다는 가슴 아픈 비보를 접해야 했습니다.
김인선: 사별 후유증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고 하더라고요. 특히 배우자와의 사별을 경험한 사람은 2-3년 동안 힘든 시간을 보낸다고 하는데요. 제 주변으로도 그런 분이 계세요.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우울증 같은 마음의 병까지 생겼거든요. 마음의 상처를 치료할 새도 없이 민주 씨는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뎠을까요?
남편의 죽음에도
슬퍼할 여유가 없었던 아내
마순희: 민주 씨는 남편의 사망소식을 듣고도 충분히 슬퍼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제대로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기는커녕 낯선 한국땅에서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힘겨운 과제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며칠은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졌다는데요. 실컷 울고 나니까 감정이 추슬러지고 마음가짐도 달라졌습니다. 오로지 북한에 남아있는 자녀들에 대한 걱정뿐이었습니다. 자식들에게 돈을 보내주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생각을 바꾸니 청소하는 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습니다. 가사도우미 일뿐 아니라 식당에서도 1년 정도 일하면서 돈을 모았고 열심히 모은 돈은 북한에 있는 자식들에게 보냈습니다.
김인선: 오로지 자녀들 생각뿐인 민주 씨인데요. 애끓는 모정에 대해 그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냐만 아주 조금이라도 민주 씨 자신을 위한 시간이 있었으면 좋을 것 같아요. 마음을 이제 막 다잡은 이후로 민주 씨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볼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