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탈북민의 적성에 맞는 직업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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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아침 최저 기온과 낮 최고 기온의 차이가 큰 요즘입니다. 이렇게 일교차가 큰 날씨에는 건강관리에 유념해야 하는데요. 매일 꾸준히 걷기만 해도 도움이 된다고 해요. 빠른 속도로 걷는 것이 더 좋지만 가볍게 걷는 것도 괜찮다고 하는데요. 누군가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 걷기 운동을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보 이상 걷게 되기도 하죠. 오늘의 주인공도 하루 만보 이상은 거뜬히 걷는 분이라면서요?

마순희: 네. 타치폰에 자동적으로 하루 걸음 수가 기록되는 덕분에 비교가 되는데요. 저도 현장에서 주로 근무할 때에는 일부러 걷지 않더라도 매일 만보 가량은 찍히지만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경우에는 걸음 수가 현저히 줄더라고요. 현장근무자가 아니라면 일부러 시간 내서 운동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성공시대에서 소개해 드릴 사례자의 경우 일부러 시간을 내서 걷지 않아도 하루 만보는 거뜬합니다. 한국전력공사에서 검침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올해 나이 49살 된 신은경 씨인데요. 검침원이 하는 일이 자신이 맡은 지역의 각 가정을 방문하여 전기사용량을 나타내는 계량기의 숫자를 기록하는 일이잖아요? 집 주인이 부재중이면 메모를 남기고 다시 방문을 하는 경우도 있고 언덕길이나 수많은 계단을 오르내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루 걸음 수가 엄청 쌓이게 됩니다.

탈북민들에게 생소한 한국전력의 검침원

탈북민도 도전할 수 있을까?

김인선: 은경 씨를 통해서 검침원이라는 직업이 처음 소개되는 것 같아요. 탈북민에게는 생소한 직업이 아닐까 싶은데요. 신은경 씨는 어떻게 알고 그 일을 시작할 수 있었을까요?

마순희: 저도 그게 궁금했습니다. 저 역시 은경 씨를 알게 되면서 검침원이라는 직업에 대해 알게 되었거든요. 북한 말로는 단체복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한국전력이라는 회사 표식이 달린 회색 유니폼을 입고 업무를 수행하는 은경 씨의 모습이 그렇게 돋보일 수가 없더라고요. '아! 우리 탈북민들도 저렇게 대기업에서 근무하기도 하는구나' 하는 자부심도 들었습니다. 많은 탈북민들이 여러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찾는 것처럼 신은경 씨 역시 검침원 일을 하기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2003년에 한국에 입국한 후로 과수농장 일용직, 단무지공장, 식당, 산후조리원, 기계부품조립공장, 판매사원, 계약직 공무원 등 자신을 받아주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일했다는 은경 씨입니다. 여러 가지 일을 경험해 보면서 알게 된 사람들도 많고 새로운 일을 접할 때마다 은경 씨에게는 다양한 경력이 축적됐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이런저런 정보를 접할 기회도 많아졌고 더 나은 직업을 찾으면서 실패를 맛보기도 했습니다. 비교적 짧게 표현했지만 이 모든 과정들은 12년 동안 있었던 일들입니다. 은경 씨는 12년이 지나서 자신의 적성에 맞는 제대로 된 일자리, 바로 검침원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인선: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네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탈북민들을 위한 일자리 찾기 책'을 써도 될 것 같은데요. 사연이 많은 분들이 그런 말을 하시더라고요. 내가 살아온 이야기는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하다고요. 신은경 씨도 그런 말을 종종 하신다면서요?

세 번의 체포와 두 번의 북송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탈북

마순희: 네. 맞습니다. 은경 씨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으니까요. 은경 씨는 고난의 행군이 한창이던 1997년에 북한을 떠나 중국에서 5년 가량 불법 체류자로 숨어 살았는데요. 그 과정에서 원치 않은 결혼과 출산도 경험하고 세 번의 체포와 두 번의 북송으로 처절함을 온 몸으로 느끼기도 했습니다. 북한 감옥에서 옥살이를 할 때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 생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수없이 많았고 또 한 번 북송된다면 다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았기에 은경 씨는 대한민국으로 올 결심을 했습니다. 은경 씨는 중국에 아이를 두고 3국을 거쳐 어렵게 한국에 도착했고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수료한 후 2003년에 전라남도 나주에 집을 배정받았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았을 때 더 이상 쫓기는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답니다.

하지만 낯선 한국땅에서 살아가는 건 마음먹은 만큼 쉽지 않은 일입니다. 무엇보다 은경 씨가 입국했던 때에는 탈북민들이 배정받은 거주지역에서 잘 지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하나센터가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탈북민 전문상담사도, 정착도우미도 없던 시절이었기에 친인척 하나 없는 탈북민들이 정착을 해 나가는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탈북민들이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분들이 몇몇 계시긴 했지만 본인이 노력을 많이 해야만 좀 더 빨리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는데요. 은경 씨가 그랬습니다. 정착지원금을 토대로 스스로 살아가야 했고 무엇보다 중국에 두고 온 딸을 데려오려면 돈부터 벌어야 했기에 일자리부터 찾았습니다. 은경 씨가 처음 시작한 일은 과수농장에서 배꽃 수정작업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김인선: 배꽃 수정작업에 따라 한 해 배농사 성패가 결정지어지기 때문에 각 과수원마다 공을 많이 들인다고 하더라고요. 무엇보다 전라도 나주는, 한국에서도 배가 가장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다 보니 과수농장도 많고 일손이 많이 필요하죠.

탈북민이라고 돈 대신 종이를 월급으로 줬다?

마순희: 맞습니다. 그래서 은경 씨가 비교적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손을 빌려 일일이 수정작업을 해야 하거든요. 수분가루를 솜털방망이에 묻혀서 배꽃 수술에 대어 주기만 하면 되는 작업이라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합니다. 은경 씨는 수정작업이 모두 끝난 후에 평생 잊지 못할 일을 경험했다고 하는데요. 배꽃 수정작업을 다 마치고 급여를 지급받는 날이었는데 글쎄 돈은 안 주고 누런 종이 6장을 건네더래요. 그래서 과수농가 대표에게, 자기가 탈북민이라고 돈도 안 주고 속이냐며 화를 냈다고 하는데요. 알고 보니 누런 종이가 수표였습니다. 수표가 현찰처럼 쓸 수 있는 증서이고 돈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은경 씨는 전혀 몰랐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은경 씨는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며, 사장님께 진심으로 사과했다고 하더라고요.

김인선: 나라마다 돈의 단위가 달라서 잘 모를 수 있어요. 은경 씨의 경우 북한돈이나 중국돈은 익숙해도 한국돈은 낯설 테니까요. 그런 경험을 통해서 한국돈의 종류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되고 좋은 거죠 뭐. 그나저나 배꽃 수정작업은 한시적인 일이잖아요? 은경 씨가 또 다른 일을 찾아야했을 텐데, 이번엔 좀 더 안정적인 일을 시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마순희: 급여도 좋고 직장도 탄탄하고 정기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누구나 원하지만 모두가 그런 일자리를 갖기는 어렵습니다. 관련 자격증이 있거나 학력, 경력 등 일정한 자격요건을 갖추어야 하니까요. 한국에 입국한지 얼마 안 된 탈북민의 경우 취업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기가 쉽지 않습니다. 요즘은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취업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교육이 있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거주지를 배정 받은 후에 아무런 조건 없이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하는 탈북민이 많았습니다. 은경 씨도 마찬가지였기에 이 일, 저 일 가리지 않고 했습니다. 휴대폰 만드는 회사, 치킨집 시간제 근로자, 그리고 산후조리원 청소 일도 했다고 하는데요. 당시 은경 씨는 불법이나 나쁜 일만 아니라면 어떤 일이든지 다 했다고 합니다.

탈북민의 좌충우돌 직업 도전은 계속된다

김인선: 개인도 그렇지만 사회 역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성장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지원금과 임대아파트 외에 탈북민들에게 꼭 필요한 맞춤 정책과 지원이 부족한 때였죠. 이후 한국정부는 물론 민간단체들에서도 탈북민에 대한 인식개선과 제도개선을 하고 있고 지금도 진행 중이잖아요? 탈북민과 동반성장한다고 표현해도 될 것 같은데요. 신은경 씨는 어떤 과정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볼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