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탈북민의 적성에 맞는 직업찾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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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신은경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은경 씨는 2003년에 한국에 입국한 뒤 전라남도 나주에 거주지를 배정받고 한국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요. 지금은 전기사용량을 기록하고 점검하는 검침원 일을 하고 있지만 그 일을 하기까지 정말 많은 일들을 경험했잖아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은경 씨는 과수농장 일용직을 시작으로 휴대폰 만드는 회사, 치킨집 시간제 근로자, 산후조리원 청소 일, 단무지공장, 식당, 기계부품조립공장, 판매사원, 계약직 공무원 등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결혼도 했는데요. 은경 씨는 2004년 일하던 식당의 사장님 소개로 평범한 회사원인 남한 남성을 만났습니다. 그분도 외지에서 회사생활 중이었기에 혼자인 은경 씨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 주었습니다. 은경 씨는 심리적으로 그 남자분에게 많이 의지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행복할 것만 같던 남남북녀의 결혼

생각지 못한 종교로 인한 고부갈등

하지만 행복하기만 할 것 같았던 결혼생활은 남편과 함께 시댁이 있는 부천으로 이사하면서 하나하나 무너졌습니다. 불교신자였던 시어머니는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는 은경 씨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그것을 빌미로 두 사람 사이에는 사사건건 갈등이 그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남편과의 사이에 딸도 낳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거기에 또 하나의 큰 사건이 생겼는데요. 은경 씨가 중국에 있는 딸까지 데려오면서 고부간에 갈등의 골은 더 깊어졌습니다. 남편은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지만 어머니와 은경 씨 사이에 있는 갈등을 지혜롭게 해결해 나가지 못 했습니다. 무엇보다 중국에서 데려온 은경 씨의 딸에게까지 불화의 영향이 미치자 은경 씨는 결혼 5년 만에 이혼을 하게 되었고 우울증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게 됐습니다.

김인선: 가장 의지하고 싶었던 남편과의 이혼이 은경 씨에겐 너무나 큰 상처가 된 거죠. 그런데 마음의 병도 모자라 은경 씨의 몸에도 이상반응이 나타났다고요?

마순희: 네. 우울증 치료를 받는 도중 두 번의 수술까지 받게 됐습니다. 온몸의 힘이 자주 빠지고 어지럽고 머리도 자주 아프기는 했지만 은경 씨는 우울증 증세라고 간과했었는데 우울증 치료 과정에서 다른 검사를 하다가 뇌동맥류라는 충격적인 진단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은경 씨는 자신이 스스로에게 얼마나 무관심했었는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 데려온 큰 딸이 치료 중인 엄마의 병간호도 하려고 애썼고 동생도 돌보면서 제법 엄마의 보호자 구실을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은경 씨는 더는 딸에게 짐이 될 수 없다는 생각과 함께 친구처럼 의지하는 마음도 생기더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두 딸들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자신의 건강을 회복하자, 그리고 앞으로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무엇이든 배워야겠다'라고 은경 씨는 굳게 결심했습니다.

은경 씨는 이혼 후 홀로서기를 해야 했고 두 딸과 함께 살 집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고맙게도 김포에 있는 임대주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 탈북민들이 한국에 나와서 자기 이름으로 국민임대주택을 받았다가 반납을 하게 되면 다시 받기가 쉽지 않거든요. 은경 씨의 경우 결혼을 하면서 주택을 반납을 했었기에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알아보고 서류를 준비하고 신청을 했던 건데, 다시 한 번 임대주택을 제공받은 것입니다. 은경 씨는 애들과 함께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는 보금자리가 마련되었다는 생각에 잠을 설칠 정도로 만족감을 느꼈고 더 열심히 살아야한다는 다부진 각오를 했습니다.

이혼 후 달라진 인생

처음으로 내 운명의 주인으로 살다

김인선: 이혼의 아픔과 두 차례에 걸친 수술까지 이겨냈잖아요. 은경 씨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또 어떤 일을 하더라도 잘 해낼 것 같은데요?

마순희: 네. 그랬습니다. 이혼의 아픔과 두 차례에 걸친 어려운 수술을 이겨내면서 은경 씨는 자기 인생이면서도 늘 누군가에게 끌려만 다녔던 지난날이 바보같이 느껴지고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라고, 주인답게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건강이 회복되면서 은경 씨는 2011년 굿피플 자유시민대학에 11기로 입학했습니다. 자유시민대학은 기독교재단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으로 탈북민을 대상으로 하는데요. 남한생활 6개월부터 5년, 24세~45세 사이면 지원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은경 씨는 38살이었기에 대상자에 해당됐습니다. 은경 씨는 기초정착교육부터 취업반과 창업반까지 심화교육을 받으며 남한사회에 대해 새롭게 배워 나갔습니다.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수업이 있다 보니 언어소통이 수월하고 마음이 맞는 같은 탈북민들을 스스럼없이 만날 수 있었고 남한의 각 분야의 전문가들로부터 남한사회와 문화, 경제개념과 관리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12년 간의 수많은 시행착오와

다양한 교육 끝에 선택한 나의 직업

김인선: 자유시민대학에서 새로운 출발을 잘 할 수 있는 직업도 찾았을까요?

마순희: 맞습니다. 은경 씨는 8개월 동안 자유시민대학의 교육과정을 수료하면서 2012년 김포시청에서 진행하는 자활프로그램을 신청했고 평생학습제 사무보조로 일을 할 수 있게 취직이 되었습니다. 수강생모집과 수강 접수, 전화상담 등으로 1년 계약직이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재계약의 기회가 없는 일이었기에 계약이 만료된 이후 은경 씨는 다른 일을 찾았습니다. 때마침 한 탈북민 단체를 통해 한국전력에서 검침원을 모집하고 탈북민도 공개 채용한다는 소식을 알게 됐고 도전했습니다. 최종적으로 은경 씨는 합격했고 3개월간의 수습기간을 거쳐 정식으로 검침원이 되었습니다. 한국정착 12년 만에 안정된 일자리를 찾은 것입니다.

김인선: 검침하는 일이 익숙해지면 일하는 시간을 조율할 수 있지만 초보자의 경우엔 고되고 어려운 일이거든요. 주소만 보고 세대를 찾아가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집집마다 계량기 위치가 달라서 외우는 일에만 시간 투자를 많이 해야 하는데 은경 씨가 그 일을 잘 할 수 있었을까요?

마순희: 검침원에 대해서 잘 아시네요. 은경 씨가 희망에 넘쳐 입사했지만 검침원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엔 거리가 멀고 아무도 다니지 않는 시골마을에 배정되다 보니 사람의 발길이 끊긴지 오래된 길이나 인적이 드문 산길을 따라 검침하러 다녀야 했습니다. 어디선가 뱀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하고 산짐승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그럴 때마다 은경 씨는 등골이 오싹하고 식은땀이 흘러내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근무환경이 열악했지만 은경 씨는 포기하지 않고 맡겨진 업무는 스스로 끝내고야 말았습니다. 사실 정착하면서 처음부터 그런 직업에서 일했다면 그 가치를 모를 수도 있었겠지만 은경 씨는 한국정착 후부터 약 10년 동안 온갖 일을 다 해보았기에 한국전력공사에 입사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탈북민 후배들에게 한 마디:

영원한 일자리는 없다

준비하는 사람에게만 기회가 올 뿐

그래서 은경 씨는 조금 힘들 때도 있지만 자신의 업무에 긍지감을 가지고 책임성 있게 맡은 일을 빈틈없이 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은경 씨는 건강과 조건이 허락한다면 정년퇴직할 때까지 이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강한 애착을 드러낼 정도입니다. 하지만 은경 씨는 점차 검침하는 일도 기계로 할 수 있게 되면서 검침원의 일자리가 점점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며 대처할 수 있는 준비를 늘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후배 탈북민들에게도 무슨 일이든 일단 해 보라는 신은경 씨, 그래야 자신에 대해 알게 되고 기회도 잡을 수 있다는 은경 씨의 조언을 되새기면서 청취자 여러분도 각자 올바른 선택으로 더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힘찬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김인선: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더라고요. 그 길 위에서 넘어지지만 않아도 좋은 거고요. 넘어지더라도 툴툴 털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있으면 얼마든지 잘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은경 씨처럼 말이죠. 앞으로 어떤 길을 마주하든 은경 씨가 지금처럼 잘 걸어가기를 바라면서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