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막내딸의 제안으로 탈북하게 된 선생님

0:00 / 0:00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한국에서는 지난 5월부터 야외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는 등 코로나비루스의 위험에서 차츰 벗어나고 있는데요. 이에 따라 학교들도 학생들의 정상적인 등교와 수업에 이어 학부모를 학교에 초청해 공개수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2년간 한국의 초, 중, 고등학교는 주로 집에서 인터넷을 이용해 비대면 수업을 해왔는데요. 오랜만에 공개수업을 통해 부모님들이 아이들 수업과 점심 급식 환경을 직접 체험하기도 하고, 학교와 학부모가 소통의 시간을 갖기 때문에 이것저것 준비해야 할 게 많은 학교 선생님들이 가장 바쁜 시기가 아닐까 싶어요.

마순희: 네. 남한이나 북한이나 자녀교육에 대한 관심은 다를 바 없고 학생들의 교육을 책임지는 선생님들의 역할이 중차대하기에 공개수업을 해야 하는 선생님들이 지금 가장 바쁜 시기일 것 같습니다. 새 학기에 아이들을 맞이하는 것처럼 학부형들을 맞이할 준비로 선생님들 마음이 무척 분주할 것 같은데요. 제 손주가 초등학교 때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자기네 반은 교장선생님이랑 다른 선생님들이 들어오는 공개수업도 한다고 말이죠. 한국에서는 교사들의 수업능력 향상을 위한 공개수업까지 있어서 선생님들이 준비할 부분이 정말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인선: 한국에서 교사로 일하는 탈북민들도 좀 계시잖아요? 그분들도 바쁘시겠네요.

북한 교원 출신 탈북민이

주로 선택하는 직업은?

마순희: 네. 많지는 않지만 몇 분 계시긴 합니다. 북한에서 교원이었다고 해도 한국에 와서 교사가 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인데요. 북한식 교육과는 많이 다른 한국에서 교사로 근무하려면 교육 대학교에서 다시 공부를 하고 임용고시를 거쳐야만 정규 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원이었던 탈북민 중 상당수가 시험 통과가 어려운 정규 교사 대신 탈북학생들이 많이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 학생들의 상담과 관리를 전담하는 코디네이터 선생님으로 일합니다. 혹은 교원이 아닌 아예 다른 직업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은데요. 오늘 성공시대에서 소개해 드릴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에서는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근무했지만 한국에 와서는 다른 길을 걸으며 성공적인 정착을 하신 분인데요. 서울의 한 지역에서 상담소를 운영하면서 탈북민들의 정착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박선희 씨입니다.

김인선: 북한에서 교원을 했을 정도면 선희 씨의 출신성분이나 집안 형편은 나쁘지 않았을 것 같은데, 탈북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지네요.

마순희: 네, 북한에서 교원대학을 졸업하고 북한식으로 말하면 혁명의 새 세대를 키워내는 직업혁명가라고 불리는 교원으로 근무했으니 선희 씨의 출신성분이나 집안 형편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고난의 행군으로 나라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북한 주민 모두가 힘들긴 마찬가지였겠지만 교원들의 어려움은 특히나 더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배급을 안 주면 시장에서 장사를 하든,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팔든 하다못해 음식장사라도 해야 하는데, 선생님들은 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치느라 시간도 없고 무엇보다 선생 체면에 장마당 장사를 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테니까요.

고난의 행군으로 먹고 살기 어려워

법 위반했다가 달라진 인생

선희 씨가 살던 함경남도의 경우 두만강 가까이도 아니라서 고난의 행군 때 더 힘들었다고 합니다. 살기 위해 이것저것 불법인 것을 알면서도 위반하기도 해야 하는데 그것이 탄로가 났었다고 하는데요. 그 일로 남편이 먼저 보위부에 잡혀갔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선희 씨와 자녀들도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인민군대에 나간 아들과 지방대학에 가 있는 아들은 어쩔 수 없지만 고등중학교에 다니는 막내딸에게는 험한 꼴을 당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고 또 그런 수모를 그대로 겪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마침 중국에 친척이 있었기에 선희 씨는 막내딸을 중국의 청도에 있는 4촌 오라버니댁으로 보냈습니다.

김인선: 선희 씨가 막내딸의 안전을 위해서 기약 없는 생이별을 선택한 거네요. 가족 중에 누구라도 보위부에 잡혀 가면 빼내기 위해서 뒷돈을 마련해야 하거나 인맥을 총동원해서 해결하는 경우도 있지만 생사조차 알지 못하게 됐다는 경우도 많던데, 선희 씨네는 어땠나요?

2년 만에 만난 딸의 위험천만한 제안?

마순희: 네. 선희 씨의 경우 그동안 교원으로 근무하면서 연계가 있었던 인맥들을 모두 동원하여 가까스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꽤 걸렸는데 거의 2년이 걸렸다고 하더라고요. 금방 데려올 줄 알았던 막내딸과도 2년 가까이 떨어져 지냈던 것입니다. 선희 씨는 가족이 함께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중국에 막내딸을 데리러 청도로 향했습니다. 2년 만에 만난 딸은 선희 씨에게 북한으로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고 하더랍니다. 그동안 중국에서 세상 물정을 깨친 딸은 북한이 아니라 우리가 갈 곳은 한국뿐이라고 오히려 선희 씨를 설득했습니다. 평생을 당에 충성하며 열심히 살아 온 부모님이 어떻게 보위부에 끌려갔고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는지를 잘 알고 있기에 대한민국에 가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2년이라는 시간, 온갖 고초를 다 겪어왔던 선희 씨에게도 북한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일도 아니고 교육자였던 선희 씨였기에 북한을 떠날 생각까지는 못했고 막내딸로 인해 갑자기 한국행을 결심한다는 것이 엄청난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김인선: 보통은 부모가 자식을 설득하는데, 선희 씨는 딸이 원해서 탈북을 하게 됐네요. 이렇게 갑작스럽게 결정한 두 사람의 탈북, 무탈하게 한국까지 오셨을까요?

마순희: 대부분의 탈북민처럼 힘든 고비가 많았죠. 특히 박선희 씨의 몸과 마음까지 건강상태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딸을 만나겠다는 마음 하나로 간신히 버티면서 청도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청도에 도착하자 긴장이 풀린 탓인지 선희 씨는 며칠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거기에 딸의 뜻으로 갑작스럽게 한국행까지 해야 하는 상황까지 겹치다 보니 선희 씨는 끝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중국은 북한과는 달라서 약도 많았고 해열제며 영양제며 좋은 주사까지 다 맞을 수 있어서 선희 씨는 겨우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선희 씨가 회복될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이 가까이 있었다는 장점은 단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청도는 대도시라 중국의 여느 농촌들과는 달리 탈북민들이 마음 놓고 숨어 있을 곳이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희 씨는 감시의 눈을 피해 조금이나마 기력을 차릴 수 있게 되자마자 막내딸의 제안대로 한국행을 선택했습니다. 선희 씨는 중국에 도착한 지 10여 일만에 한국으로 가기 위해 브로커와 연줄을 놓아 북경 영사관으로 향했고, 영사관에서 70일 정도 체류하다가 2004년 1월 대한민국에 입국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오자마자 병원신세를 지게 된 선희 씨

김인선: 무사히 한국에 도착한 탈북민들은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한국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교육을 받게 되잖아요. 하지만 선희 씨의 경우 건강문제로 초기 교육과정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면서요?

마순희: 맞습니다. 중국에 도착하기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 데다가 청도에 도착한 직후엔 거의 탈진상태였고 약과 주사로 기력만 겨우 되찾았을 정도였는데 한국까지 오면서 몸에 무리가 갔습니다. 탈북부터 한국 입국까지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긴박한 일정이었으니 오죽했겠습니까. 선희 씨의 몸도 마음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탈북민들이 한국에 도착하면 먼저 국군수도병원에서 종합적으로 건강상태를 점검하는데 그때 선희 씨의 상태는 환자나 다름없었습니다.

김인선: 정착에 필요한 교육도 중요하지만 몸을 가눌 수 있고 활동이 가능한 몸 상태가 우선이죠. 환자나 다름없었다는 선희 씨의 한국생활이 순탄해 보이지는 않는데요. 어떻게 건강을 회복을 하고 성공시대 주인공까지 될 수 있었을까요? 선희 씨의 정착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가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