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순종하지 말고 적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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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김명길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명길 씨는 2009년에 한국에 입국했는데요. 탈북을 하게 된 계기가 남한에서 날아온 낙하물 때문이었죠?

마순희: 네, 맞습니다. 김명길 씨의 고향에는 간혹 남한에서 날려 보낸 낙하물인 풍선이 떨어졌는데요. 그 안에는 먹을 것과 생필품이 담겨 있었습니다. 북한 정부에서는 남한에서 날려 보낸 물건에는 독이 발려 있으니 만지지도 말고 신고하라고 주민들에게 지시를 내렸는데 명길 씨는 지침을 지키지 않고 낙하물 안에서 필요한 물건을 가졌습니다. 여성화장품을 비롯한 질 좋은 필수품은 작업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그 일이 문제가 됐습니다. 남한 선전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명길 씨는 체포의 위기에 처했고 살기 위해 명길 씨는 탈북을 했습니다. 1993년 압록강을 건넌 명길 씨는 공안의 눈을 피해 산 속에 숨어 지냈습니다. 먹을 것을 위해서는 위험하더라도 인가를 찾을 수밖에 없었던 명길 씨는 산길을 헤맸고 노인 혼자 살고 있는 산막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노인은 말 한마디 통하지 않은 중국인이었는데 명길 씨의 행색을 보고는 밥도 주고 잠을 잘 수 있도록 해 줬습니다.

김인선: 중국에 온 후로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했던 명길 씨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제공해 준 거죠. 산 속에서 숨어 지내는 동안 명길 씨의 몸이 많이 상했을 텐데 노인의 배려가 큰 힘이 됐겠네요.

탈북 후 만난 생명의 은인과 귀인들 덕에

180도로 바뀐 내 인생

마순희: 맞습니다. 노인은 명길 씨의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명길 씨는 마당 한 켠에 이겨 놓은 진흙덩어리로 노인에게 보답을 하게 되는데요. 산막 벽을 발라 집을 보수해 주는 일이었습니다. 겨울에 땔 장작을 패서 가지런히 쌓아 놓는 것부터 산막 구석구석을 챙겼습니다. 알아서 척척 일을 잘하는 명길 씨를 보고 노인은 동네 사람들에게 소개해 주었습니다. 명길 씨는 소개 받은 집의 일도 모두가 만족해 할 정도로 완벽하게 해냈습니다. 탈북 남성들의 경우 중국에서 일해도 제대로 보수를 못 챙겨 받는 경우가 허다한데 명길 씨는 달랐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명길 씨를 믿고 일을 맡겼고 그에 상응하는 노동의 대가도 지불했습니다.

김인선: 명길 씨를 찾는 마을 사람들 중에는 그 지역의 공안 간부도 있었잖아요?

마순희: 네. 그 간부는 혹시라도 탈북민 검거 명령이 내려 올 때면 먼저 소식을 알려서 명길 씨가 피신하도록 해줄 만큼 명길 씨를 신뢰했습니다. 그 덕분에 명길 씨는 중국에서 관리업무까지 맡게 되었고 아래에 사람들을 두고 작업을 지시하는 수준까지 됐습니다. 안정된 수입에 안정된 일자리까지 있다 보니 명길 씨는 중국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고 1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중국말도 능숙하게 구사하고 자신의 거처도 마련했을 정도로 명길 씨는 중국 생활에 완전히 적응했습니다. 그런 명길 씨에게 어느 날 또 다른 큰 선택의 기회가 왔습니다. 그 마을 인근에 한국 관광객들이 찾아왔는데 그 안내를 맡은 이가 조선족 사장이었고 명길 씨는 통역을 위해 불려갔던 것입니다. 조선족 사장은 자신의 가족들도 모두 한국에 있다며 명길 씨에게 중국에서의 불안한 삶보다는 한국에서의 새로운 삶이 어떻겠냐고 권유했습니다.

북송에 대한 두려움으로

폭약을 곁에 두고 잤던 13년

중국에서 잘 지내고 있었지만 명길 씨는 여전히 불법체류자였습니다. 언제 공안당국에 잡혀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중국 생활을 이어 온 명길 씨는 숙소에 폭약을 설치해 두고 살았습니다. 혹시라도 적발되어 다시 북한으로 끌려가게 되면 차라리 그냥 자폭해 버리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13년을 살아온 명길 씨였으니 조선족 사장의 한국행 권유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명길 씨는 아무리 중국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는다 해도 결국 불법체류자이고 하루하루 불안에 떨어야 하는 삶 대신 한국행을 선택했습니다. 한국에 가서 최선을 다 한다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명길 씨는 13년을 지낸 중국을 떠났고 2009년 11월 태국을 거쳐 대한민국에 입국하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중국에서 불안한 신분으로도 능력 하나로 13년을 살아온 명길 씨잖아요. 여느 탈북민 분들과는 다르게 명길 씨의 한국정착은 걱정이 안 되고 오히려 기대되는데요?

마순희: 기대하시는 것처럼 명길 씨는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 생활부터 완벽했습니다. 하나원 교육의 매 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배움에 열중했습니다. 사회에 나가서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건강관리, 신체단련에도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명길 씨는 하나원을 수료한 후 거주지인 안산시에서 한국정착을 시작했고 곧바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다니던 교회의 집사님이 일용직 자리를 제안하자 흔쾌히 수락했던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해야 한다는 생각에 명길 씨는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초반에는 남북의 언어표현이 달라서 어려운 점도 있었지만 명길 씨는 모른다고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심적으로 힘들 때면 하나원 교육 시에 배웠던 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적응하라'를 되새겼습니다. 명길 씨는 한국생활에 잘 적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갔고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르면서도 배우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일하니 직장 내에서도 점차 그를 인정하기 시작했고 탈북민인 그의 채용을 꺼리던 남한 회사의 간부들까지 명길 씨를 인정하게 됐습니다.

탈북민이 잊지 말아야 할 한 마디

순종이 아니라 적응하라

김인선: 자질과 실력으로 인정받기까지, 명길 씨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겠어요. 직장 내에서 신뢰감이 꾸준히 쌓인 것도 있겠지만 김명길 씨의 능력을 모두가 인정하게 된 계기는 뭘까요?

마순희: 어느 날 중요한 설비를 운전하던 기능공이 개인 사정으로 출근하지 못 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동안 짬짬이 운전기술을 연마해 오던 명길 씨가 운전공 못지않게 기계를 운전하여 생산에 차질이 없었고 직장 동료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이처럼 명길 씨는 입국 후 5년 동안 이룰 목표를 정해 놓고 살았기에 누구보다 정착이 빨랐습니다. 그의 목표는 5년 동안 월급으로 1억(7만7천 달러) 모으기, 내 집 장만하기, 세 가지 이상의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었는데 명길 씨는 결코 쉽지 않은 그 모든 목표를 다 이루었습니다. 명길 씨는 현재 지게차, 특수용접, 에너지관리사 등 여러 개의 자격증을 취득했는데요. 남들처럼 학원에 다니며 공부해서 자격증을 딴 것이 아니라 일하면서 짬짬이 독학으로 공부해서 딴 자격증들이라서 의미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명길 씨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보물인 가정을 이룬 것이 그 모든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한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이야기하는데요. 한국정착 후 명길 씨는 같은 탈북민인 지금의 부인을 만나 가정을 이뤘습니다. 회사에서는 태양광을 전기로 쓸 수 있는 태양광설비 설치전문가로, 가정에서는 자상한 남편으로, 딸에게는 친구 같은 아빠로 행복한 정착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통일이 되면 북한 땅에 가서 태양광설비 설치전문가로서 자신이 배운 지식과 쌓은 경험과 비법으로 전기가 부족했던 고향땅을 빛내고 싶다는 당찬 포부를 안고 오늘도 김명길 씨는 힘찬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명길 씨의 좌우명이 ‘시간을 소중히 사용하라’라고 합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라는데요. 하루하루 최선을 다 해 살아가는 것이 성공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김명길 씨의 사례를 통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김인선: 목표를 정하는 것도 어렵고요. 고민 끝에 정한 목표를 이루는 것은 그보다 더 어렵습니다. 자신이 정한 목표를 다 이뤄낸 김명길 씨의 비법! 바로 시간활용이었죠? 청취자 여러분의 오늘 하루는 어떠셨나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