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푸드트럭 모는 북한여자(2)

0:00 / 0:00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김경빈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2006년에 한국에 입국한 경빈 씨는 3년 동안 식당 일을 하면서 돈을 모았고 노점 장사를 시작했는데요. 이런 경험들을 토대로 푸드트럭 창업까지 하셨잖아요?

마순희: 맞습니다. 김경빈 씨는 이동식 식당이라 할 수 있는 푸드트럭을 시작한 분입니다. 화물차에 조리시설까지 갖추어져 있어서 이동한 곳에서 음식장사를 할 수 있는데요. 보통 푸드트럭에서는 적게는 한 가지, 많아야 2-3가지 음식을 판매하지만 경빈 씨의 푸드트럭은 떡볶이와 어묵, 함경도식 순대 등 다양한 음식을 판매했습니다. 좁은 공간에서 음식을 만들어야 하고 손님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경우가 있어서 조리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 음식으로 단일 품목을 선정하는데, 경빈 씨는 5개 이상의 음식을 마련했습니다. 덕분에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경빈 씨의 푸드트럭을 찾고 있었습니다.

김인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푸드트럭이 될 수 있었던 건 기본이 탄탄했기 때문이었는데요. 김경빈 씨의 경우 오래 전부터 음식장사를 하고 싶어 했고 푸드트럭 사업에 필요한 조건들도 미리 갖추어 뒀었죠?

마순희: 네, 맞습니다. 3년 정도 식당 일을 하면서 남한 음식문화와 사람들의 식성에 대해 알아갔고 식당 일을 하는 틈틈이 요리학원에 다니면서 음식 만드는 법도 배웠습니다. 또 화물차 운전이 가능한 자동차 면허증도 취득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음식 솜씨도 있었기에 경빈 씨는 자신 있게 푸드트럭 창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창업을 위해 3년 이상을 준비한 것 외에 경빈 씨는 북한에서도 장사의 경험이 있었는데요. 고난의 행군 시절 생계유지를 위해 장사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자본이 비교적 적게 드는 노트 장사를 시작으로 나중에는 자본이 많이 들어가는 레자(장판)장사로 키워나가는 모습에 경빈 씨 스스로도 많이 놀랐다고 하는데요. 자신에게 강단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됐다고 했습니다.

중국서 돈 벌어 귀향하려다 북송

결국 자유 위해 한국행

장사수완도 좋았던 경빈 씨는 좀 더 큰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강단 있게 중국행을 선택했는데요. 중국 시골에서 살면서 농사도 짓고 순대 장사도 시작했습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장사를 했기에 경빈 씨는 세 바퀴 자전거에 순대를 싣고 이동하면서 노점 장사를 했는데요. 그 기간이 3년 정도 됐습니다. 경빈 씨의 손맛이 좋아 순대 장사는 잘 됐고 어느 정도 돈을 벌었기에 경빈 씨는 북한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요. 불법체류자로 체포되어 북송이 되는 바람에 감옥에서 갖은 고생을 하게 됐습니다.

김인선: 북송으로 북한에 가게 된 탈북민의 경우 재탈북을 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경빈 씨의 경우엔 어땠나요?

마순희: 네. 중국에서 살아 본 사람들이 거의 다 그러하듯 자유를 경험한 경빈 씨는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다시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하지만 불법체류자로 항상 숨어 살아야 하는 중국에서 언제까지나 살 수는 없었습니다. 마침 한국행을 함께 할 지인을 만났고 경빈 씨는 그동안 악착같이 모았던 돈을 모두 북한의 가족에게 보내고 멀고도 위험한 한국행을 단행했습니다. 2006년 5월, 경빈 씨는 한국에 도착했고 정착을 시작했습니다. 자유를 찾아 목숨 걸고 찾아 온 한국에서의 정착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북한과 달리 발전한 남한의 모습도 놀라웠고, 언어의 장벽도 높았고, 음식문화도 많이 달랐습니다. 그러나 경빈 씨는 조금도 기죽지 않고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북한에서 왔으니 북한말을 쓰는 것이 당연하고 처음 왔으니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경빈 씨는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고 합니다.

김인선: 경빈 씨는 속된 말로 '깡'이 있는 분이시네요. 악착같이 버텨내는 힘이 정말 강한데요. 거기에 적응력과 성실함, 준비된 자세까지 갖추었기 때문에 푸드트럭 사업도 과감하게 시작해서 지금까지 쭉 할 수 있지 않았나 싶네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경빈 씨는 여러 식당 일을 하면서 한국의 음식문화에 대해 익혀갔습니다. 육수 내는 방법 같은 비법을 배우기도 하면서 경빈 씨는 어떻게 하면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하며 연구했습니다. 이런 과정들이 있었기에 경빈 씨의 푸드트럭은 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푸드트럭 이름도 특색있게 붙였는데요. 자신의 고향인 함경도의 맛을 자랑하고 싶어서 '함경도 아지매 서울에 떴다'라고 푸드트럭 이름을 지었답니다. 그 이름처럼 함경도 아지매, 경빈 씨는 서울에서 강단 있게 잘 정착해 갔는데요. 탈북민 지원단체들의 사업에 대해서도 관심 있게 지켜보다가 참여했습니다.

함경도 아지매 서울에 떴다!

그게 바로 ‘탈북민 푸드트럭 지원사업’ 인데요. 탈북민의 소자본 창업을 지원하기 위해 2016년 통일부와 한국마사회, 현대자동차그룹이 업무협약을 체결해 이루어졌습니다. 경빈 씨는 푸드트럭 계획서 심사와 면접을 통해 운영자로 선정됐고 준비과정을 거쳐 본격 운영에 들어갔는데요. 처음부터 장사에 필요한 충분한 경험이 있었던 경빈 씨는 푸드트럭 사업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경빈 씨는 사업적인 면으로만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거의 모든 탈북민들이 한국에 와서 가장 하고 싶은 일 중의 하나가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을 데려오는 것이라고 말하는데요. 경빈 씨는 세 자녀 모두를 한국에 데려왔습니다. 그 과정 중에 자신의 모든 일들을 전적으로 믿고 도움을 주던 한국인 남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도 이뤘습니다.

김인선: 경빈 씨는 일도, 사랑도 다 차지하셨네요. 그런데 한 가지 걱정스러운 부분이 있어요. 탈북민 지원사업의 경우 여러 사람에게 골고루 기회를 주기 위해서 2-3년 정도로 기간이 정해져 있으니까요. 2016년에 시작한 경빈 씨의 푸드트럭 사업,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을까요?

마순희: 푸드트럭 사업을 지속할 수는 있는데요. 장소 제공 등의 지원은 지속적으로 제공되지 않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 사람에게 기회를 주어야 하는 사업이다 보니 2년에 한 번씩 재계약을 하고 있습니다. 푸드트럭 영업은 위치를 어디로 정하는지가 관건이라고 하는데요. 경빈 씨가 처음 장사를 할 수 있었던 곳은 유동인구도 많은 곳이라 매출이 상당했습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후에는 경빈 씨 스스로 판매할 장소를 선정해야 했습니다. 초창기 때만큼 판매가 잘되는 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경빈 씨는 세 아들을 공부시키겠다는 간절함과 함께 열심히 노력하는 탈북민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강한 포부로 악착같이 장사를 했습니다. 경빈 씨는 하루 13시간씩 일하면서 쉬는 날에도 재료 준비 등 장사 준비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탈북민 지원만 바라기보다

자신감으로 스스로 이뤄내야

최근 3년간은 코로나비루스 여파로 장사가 더 안 됐지만 경빈 씨는 힘든 시간을 무사히 보냈습니다. 그런데 최근 경빈 씨에 대한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지난 4월, 과로 등으로 면역력이 떨어졌을 때 걸린다는 대상포진 진단으로 입원치료를 받으면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하는데요. 앞으로는 경빈 씨가 건강관리도 유념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경빈 씨의 열정은 휴식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데요. 자신의 경험이 푸드트럭 창업을 희망하는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 운명의 주인은 나 자신이라는 확고한 신념으로 항상 당당한 자신감과 열정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성공하지 못 하는 인생은 없다고 말이죠. 앞으로 요식업을 더 크게 발전시키고, 많은 탈북민들을 취직시켜 함께 즐거운 정착을 이룩하겠다는 김경빈 씨의 당찬 포부가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고요. 하루 속히 건강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김인선: 희망과 자신감이 있다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는 경빈 씨의 말, 기억하시죠? 그 전에 자신감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갖추어야 할 조건들은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