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주변에 여름휴가 떠나는 분들이 많은데요. 휴가계획 있으세요?
마순희: 그럼요. 손자, 손녀들의 방학에 맞춰서 휴가를 가려고요. 그런데 저도 그렇고 세 딸들도 각자 하는 일들이 달라서 시간을 맞추는 것이 쉽지가 않네요. 바다로 갈지, 계곡으로 갈지를 정해야 하는 행복한 고민도 필요했고요. 사실 어렵게 휴가기간을 맞췄었는데 하필 그 기간에 비가 와서 다시 시간을 맞춰보려고요. 가족들과 휴가를 보내는 것이 이제는 익숙해졌거든요.
우리 탈북민들도 사람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처음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와서 얼마 동안은 하나원 동기들이랑 휴가를 보내는 경우가 있어요. 하지만 점차 정착하면서 가정도 생기고 또 지역이나 회사에도 친지들이 생기니 자연히 휴가도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보내게 되더군요. 그리고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가족들도 많고요. 그런데 제가 오늘 소개해 드릴 분은 바빠서 휴가 한 번 떠나기도 쉽지 않은 분이에요. 전세버스로 학원차를 운전하는 김희철 씨의 한국정착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김인선: 전세버스라면 학원에 소속된 차가 아니라 학원과 계약을 따로 한 운행 전문 버스라는 거잖아요. 혹시 버스가 오늘의 주인공 김희철 씨 본인 것인가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김희철 씨가 한국정착 5년 만에 자신의 이름으로 장만한 중형 버스였습니다. 김희철 씨에게 한국 정착이 힘들지 않았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워낙 한국에 오기 전에 힘든 일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한국에 정착하면서 겪은 어려움은 어려움도 아니었다고 말하더군요. 김희철 씨는 취업하기도 힘들고 처음 일하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겪기는 했지만 그것은 정착하는 데서 겪어야 했던 시행착오였지 결코 어려움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희철 씨가 처음 인력회사에 등록하여 시작한 아르바이트, 북한식으로 말하면 부업이라고나 할까요? 아르바이트로부터 타이어제조회사부터 화물트럭 운전과 식당종업원, 그리고 택시기사 등 많은 직업들을 경험하면서 알뜰하게 모아 온 돈으로 자신의 버스를 장만하기까지 5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고 합니다.
김인선: 알뜰살뜰 열심히 돈 모으는 남성분들이 사실 흔치 않거든요. 특히 탈북 남성들은 더 한 거 같던데 혹시 아내나 아이들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저축을 하셨을까요?
마순희: 김희철 씨는 제가 만났던 2017년까지는 독신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에 정착한지 7년이 되어 오는데 아직 가정을 이루지 않고 있더라고요. 북한에 가족들이 있고 또 러시아에 갔다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탈북을 하게 되었던 희철 씨였기에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나 죄책감 같은 것이 더 남달랐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래서 더 한 푼 두 푼 알뜰하게 저축하지 않았나 생각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탈북민들이 저축을 하기가 쉽지 않은데 김희철 씨는 조금 특별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인선: 모르는 분들이 많은 것 같던데, 탈북민에겐 우대상품이 있더라고요.
마순희: 네, 은행들마다 탈북민들을 위한 우대상품들이 많습니다. 보통 시중은행의 이자율이 2%대라면 탈북민들에겐 6-7%의 높은 이자를 주기도 하니까요. 기한이나 한도가 제한돼 있지만 굉장히 조건이 좋은 편이죠. 그런데 우리 탈북민들 경우에는 열심히 일하면서 돈을 벌지만 그 돈이 자신만을 위한 돈이 아니라 북한의 가족까지 함께 살아야 하는 거라고 말하는 분들이 꽤 있거든요. 실제로 북한에 많은 돈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그래서 저축하는 것이 더 힘든 상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희철 씨 경우에는 가족들이 모두 국경과는 먼 곳에 있다 보니까 연락할 방법도 없어서 그냥 열심히 돈을 저축했을 것입니다. 탈북민들 거의 모두는 통일이 되면 북한 가족들과 지인들 앞에 떳떳한 모습으로 만나고 싶다는 마음과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에서 더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김희철 씨도 자신의 당당한 모습을 언젠가는 북한의 가족들에게 보여 줄 날이 올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더 열심히 살고 계신다고 하더라고요.
김인선: 가족에 대한 미안함은 알겠는데요. 그래도 벌써 올해 나이가 59살이시고 한국에 정착한지 10년이나 됐는데 좋은 인연을 찾으셨으면 좋겠네요.
마순희: 그럴 마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 김희철 씨는 북한에서 외화벌이 기관인 능라총국에서 러시아에 파견된 무역 일꾼이었다고 합니다. 러시아에서 그가 하는 업무는 소형버스로 노동자들의 출퇴근을 시켜주고 물자를 나르는 일이었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여유시간이 많았답니다. 희철 씨가 근무하던 곳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에 한인교회가 있어서 그 지역의 주민들이 그곳으로 예배 보려 힘들게 걸어서 다녔다고 합니다. 여가 시간이 많았던 희철 씨는 그 사람들을 태워다 주기도 하고 예배를 드릴 동안 밖에서 기다려 주다가 끝나면 태워다 드리기도 했다는데요. 그러다가 한, 두 번 예배당에 들어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자연히 설교를 듣게 되었는데 이 사실이 상부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종교 활동이 금지되어 있거든요. 1996년 이 사실이 본부에 알려지게 되어 송환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이를 알게 된 김희철 씨는 무작정 몸을 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도피의 길이 10년으로 이어졌지만 결국 체포되어 다시 러시아로 압송되기도 했답니다. 이런 사연으로 가족과 헤어진 희철 씨였기에 그리움과 미안함이 더 큰 것 같습니다. 여전히 가족을 잊지 못하고 가족이 그리울 때마다 일에 몰두하고 배움에 몰두하는 것으로 외로움을 이겨나갔다고 하던데요. 그런 그의 마음에 다른 생각이 쉽게 자리하지 못 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김인선: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고 돈을 모았던 거군요. 사실 남한에서 운전면허를 따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악바리처럼 공부했나 봐요.
마순희: 맞습니다. 러시아에서는 버스 운전경력이 적지 않았지만 한국에서 새롭게 면허시험에 통과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무엇보다 눈엔 익지만 이름들이 서로 달라서 단어 하나하나를 외우는 것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김희철 씨는 러시아에서 도피생활을 겪었던 힘들었던 때를 생각하면서 견뎌낼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자신을 품어준 대한민국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고 어떻게든 나라에 짐이 아니라 도움이 되는 인생을 살고 싶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부업으로 일을 하면서 저녁이면 학원에 다니면서 중장비 자격증도 취득하였고 버스운행을 위한 대형면허와 택시기사 면허까지 많은 자격증을 취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운전을 했지만 한국에서는 운전 경력이 없는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운전경력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화물트럭도 운전하고 택시기사로도 일했다고 하는데요. 화물트럭도 마찬가지였지만 택시기사의 급여도 희철 씨의 꿈을 이루는데 한참을 못 미치는 것이었다고 해요. 버스기사로 2-3년을 일하면서 경험도 쌓고 저축도 해서 자신의 명의로 버스도 사고, 그렇게 직업을 바꾸어 가면서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게 된 것입니다.
희철 씨를 보면 직업을 자주 바꾸는 것도 안 좋은 거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처음엔 부업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라도 정식으로 들어가기도 하고요. 부업으로 일을 해보면서 그 회사의 급여가 만족스러운지 또 하는 일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지를 판단할 수도 있으니까요. 자신과 안 맞을 때는 더 나은 곳으로 일하는 곳을 바꿀 수 있다는 것, 어찌 보면 배치 받은 곳이 곧 평생 일해야 하는 고정 직업이 되는 북한보다는 훨씬 더 유리하고 자유롭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지금 희철 씨는 버스기사로 2년, 전세버스기사로 5년차 근무를 하다 보니 안정적인 수입도 보장되고 이제야 자신 스스로 봤을 때에도 제 자리를 찾은 것 같다고 하더군요.
김인선: 아무래도 정착 초반에 고생을 많이 하셨던 것 같은데요. 여러 가지 경험 끝에 최종적으로 버스 기사 일을 하게 된 계기는 뭐였을까 궁금한데요. 김희철 씨의 못 다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과는 여기에서 인사드릴게요.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