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과거의 영상이 하나 있는데요. 2010년, 전 세계 로라스켓트 선수들이 기량을 겨루는 롤러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권대회 남자 주니어 2만 미터 결승전 영상이에요. 1위를 달리던 콜롬비아 선수가 결승선을 2미터 정도 남겨두고 일찌감치 우승을 예감해 괴성과 함께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여유롭게 결승선으로 향하는 사이, 뒤따르던 선수가 전력 질주해 마지막 순간에 먼저 결승선을 통과해 크게 화제가 됐습니다. 그 선수가 바로 대한민국의 이상철 선수였죠. 지난 4월에 열린 쇼트트랙, 즉 속도빙상 세계선수권 여자 3000미터 계주경기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1, 2위를 확신하고 기쁨에 찬 캐나다와 네덜란드 선수 사이에서 마지막 순간에 0.034초 차이로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선수가 바로 한국의 최민정이었거든요. 그래서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는 한국인들에 대해 전 세계가 다시 한 번 놀라게 됐죠.
끈기와 집념은
남북 국민의 타고난 특징?
마순희: 아, 그 영상. 저도 봤었는데요. 오늘 다시 보니 그 때의 짜릿했던 쾌감을 다시 한 번 생생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국인의 특성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게 집념과 끈기인데요. 그런 걸 보면 남한과 북한이 역시 같은 민족이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특히 우리 탈북민들만 봐도 알 수 있는데요. 많은 탈북민 분들이 끈질긴 근성을 가지고 성공을 이룩하고 또 성공을 위해 지금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끈질긴 근성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탈북여성분이 한 분 계십니다. 함경북도의 한 철도역에서 조차공으로 일하다가 1997년에 탈북을 시도한 이진숙 씨인데요. 총 6번의 북송을 당하고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탈북을 결행한 근성 덕분에 2004년에 대한민국에 입국해서 행복한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김인선: 북송으로 모진 시간을 보냈다는 탈북민 분들이 참 많은데요. 횟수가 거듭될수록 더 엄중하게 처벌을 받는다고 들었거든요. 6번이나 북송을 당한 진숙 씨가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을 지 가늠조차 못하겠는데요. 어떤 사연으로 진숙 씨는 그렇게도 여러 번 탈북을 했을까요?
마순희: 진숙 씨는 한국에서는 맞벌이 부부라고 하는 직장세대로 부부가 함께 일한 덕분에 아들을 키우며 그럭저럭 가정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지만 고난의 행군으로 직면한 생활의 어려움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생활형편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갔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까지 사망하면서 진숙 씨가 지탱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까지 사라졌습니다. 그렇다고 한없이 무너질 수는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어린 아들을 살려야 한다는 마음으로 진숙 씨는 7살 된 아들을 친척집에 맡기고 돈을 벌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하지만 불법체류자로 살아야 하는 중국에서의 삶은 탈북민 모두에게 매 순간이 살얼음판입니다. 진숙 씨의 경우 불의의 수색으로 잡혀 북송되기가 일쑤였습니다.
김인선: 북송되면 대부분 수용소에서의 생활이 처참하다 못해 죽음을 맞기도 하잖아요. 그걸 6번이나 견디신 건가요?
6번의 북송에도 또 탈북을 해야만 했던 이유
마순희: 네. 북한 수용소에서 인간 이하의 폭력과 생활을 강요당할 수록 불안하긴 해도 진숙 씨는 중국에서 지냈던 삶에 대한 동경이 더 커졌습니다. 그래서 진숙 씨는 수용소에서 나온 후 얌전히 지내는 척 하다가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다시 탈북했습니다. 북송돼 갈 때마다 아들의 자라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여섯 번째 북송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가혹했다고 합니다. 먹을 것은 물론이고 씻지도 못 하다 보니 머리에도 서캐가 하얗게 매달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반주검이 되어 나온 엄마를 보면서 열네 살 아들이 다시는 못 봐도 좋으니까 제발 잡혀 나오지 말라고 해서 엄마를 울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김인선: 계속되는 엄마의 탈북을 보고 원망할 법도 한데 진숙 씨의 아들은 오히려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것 같아요. 아들에게 미안해서라도 북한에 남아 있을 법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숙 씨가 또 탈북을 감행했던 이유가 뭔가요?
마순희: 북한을 떠난 후에야, 그러니까 중국생활을 체험하면서 북한이 어떤 나라인지를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일단 중국만 해도 북한과 달리 굶어죽을 염려는 없고 돈을 벌어 조금이라도 북한의 식구들을 도와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 어떤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다시 탈북을 하게 되는 것이고 또 그래야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진숙 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위험한 길에 아들과 동행할 수 없다는 마음에 피눈물을 삼키면서 아들과 헤어졌고 중국에서 번 돈을 북한에 보내면 친척집에 있는 아들이 지내는데 보탬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중국생활을 하면서 한국에 대한 정보도 어느 정도 알게 됐습니다. 6번 북송 후 마지막 일곱 번째 탈북 때에는 죽더라도 한국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한국에 가면 아들도 데려올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에 이별의 아픔도 충분히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진숙 씨는 첫 탈북 후 8년 만인 2004년에 한국땅을 밟았습니다.
남한정착 첫 고민
돈은 버는데 왜 모이지 않을까?
김인선: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한국에서 제 2의 인생 첫 걸음을 잘 내딛었으면 좋겠네요. 진숙 씨의 한국정착 첫 걸음에는 청신호가 켜졌을까요?
마순희: 네, 한국에 입국할 때 진숙 씨 나이가 40세였습니다. 얼마든지 공부도 하고 더 나은 일자리를 찾을 수도 있는 나이였지만 그때 진숙 씨는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할 형편이 못 됐습니다. 이것저것 일자리를 가릴 형편도 안 됐습니다. 진숙 씨가 첫 탈북 후 6번의 북송을 겪는 동안 친척집에서 지내야만 했던 아들 때문이었습니다.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살 수 있으면 반드시 아들을 데려오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한국에서는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고 하루라도 빨리 브로커비용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진숙 씨는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교육을 마치고 나가면 당장 첫날부터 열심히 일해야지, 그리고 버는 돈의 30%만 쓰고 나머지 70%는 무조건 저축을 해야지 하고 단단히 결심했습니다. 진숙 씨는 당시 한국에서는 일한 만큼 돈을 벌 수 있다는데 왜 길거리에서 살아가는 노숙자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는데요. 하나원을 나와서 일해 보니 바로 알게 됐다고 합니다. 먹고 마시고 돈 쓰는 것도 자유의지로 정하는 일이라 수입의 절반 이상을 저축하면서 산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직접 경험했던 것입니다.
저축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에 진숙 씨는 정착 초반에 조건은 보지 않고 일당 높은 일만 생각하고 찾았다고 하는데요. 일은 많이 하는 것 같은데 돈이 모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당이 꽤 높은 편인 건물 공사현장에서 일을 돕는 막일을 시작했는데 하루 최소 일당이 한국돈 10만원, 약77달러 정도 됐지만 하루 일이 끝난 후 바로 돈을 받는 일당 개념이다 보니 번 돈을 바로 써 버리기도 하고 일이 고되다 보니, 일하고 난 다음날 몸이 아파서 일을 안 나가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진숙 씨 생각만큼 돈이 안 모였습니다. 그래서 진숙 씨는 월급이 적더라도 안정된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이삿짐을 옮겨주는 이삿짐센터에서 일해 보기도 하고 식당 일도 하면서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아갔습니다. 최종적으로 진숙 씨는 다른 일보다 월급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지만 집 가까이에 있는 상가건물 청소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정착 2년만의 일이었습니다. 2006년부터 시작한 청소 일을 진숙 씨는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김인선: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은 후 진숙 씨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일이 상가건물 청소 일이었는데요. 안정적인 일자리를 통해 브로커 비용을 마련하고 아들을 데려올 수 있었을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