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내 운명, 요리강사 윤명희 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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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김인선: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남한 사람들에게 한식 요리를 가르치는 탈북민이 있습니다. 군산에 있는 한 요리직업학교에서 강사로 맹활약 중인 57살 윤명희 씨인데요. 그 자리에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공부를 하고 노력을 했을까요? 무엇보다도 요리용어에 영어가 많아서 힘들었을 텐데요. 요리 강사가 된 명희 씨의 이야기, 지난 시간에 이어서 전해드립니다. 윤명희 씨는 북쪽에서 교원대학을 나왔으니까 다른 분들에 비해서 영어가 좀 더 수월했겠죠?

마순희: 명희 씨는 북한에서 교원대학은 나왔지만 외국어 과목은 러시아어였습니다. 음식용어, 조리용어는 영어가 태반인데 알파벳 밖에 모르니 일일이 영어를 쓰고 한글로 번역해서 외우는 수밖에 없었다고 해요. 명희 씨 역시 한식요리사 공부가 만만치 않았고 자격증을 따기까지 엄청 고생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아는 탈북민 정착기관 하나원의 동기생들도 직업훈련으로 한식요리사 공부를 했지만 실기 시험에서 떨어졌다면서 시험에 합격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이야기했습니다. 한식요리사 시험에 아홉 번을 떨어졌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자신은 오기가 생겨서라도 반드시 자격증을 취득하고야 말겠다면서 외래어가 너무 많아서 용어를 해설해 주던지 따로 우리를 위해 교재를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하더군요.

따로 교재를 만들 수는 없지만 하나센터 선생님에게 부탁해서 함께 교재를 이해할 수 있게 도움요청을 연결해드린 적도 있었거든요. 그만큼 한식조리사 자격증 따기가 쉽지 않은 거겠지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당시 시험에 응시한 여섯 명 중에서 합격자는 명희 씨 혼자였다는 겁니다. 제가 부산에 있는 탈북여성의 사례를 떠올리며 용어 때문에 어렵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왜 아니겠냐면서 열 번이건 스무 번이건 무작정 외우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뭐가 있겠느냐고 하더라고요.

김인선: 남들보다 조금 빨랐지만 들어보니까 어렵게 영양사 자격증을 땄다고 했는데요. 식단관리부터 영양교육 같은 일을 할 수 있으니까 학교나 복지시설, 병원까지 취업할 곳이 많잖아요. 취업으로 잘 연결이 됐나요?

마순희: 아니요. 영양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지만 50이 넘는 명희 씨가 취업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습니다. 병원이나 어린이집, 요양시설의 일자리를 찾아보고 있던 어느 날 직업학교의 교장선생님이 전화가 왔더랍니다. 요리학교에서 강사를 모집하고 있는데 신청해 보고 싶지 않은가 하는 전화였습니다. ‘교육생이었던 내가, 탈북자인 내가 과연 강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지만 그래도 명희 씨는 용기를 내서 면접을 봤고 최종적으로 요리강사로 채용돼 지금까지 군산 명문 요리직업전문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겁니다.

김인선: 힘든 과정이 있었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자격증을 따고 군산 요리전문학교에 강사로 취업도 했어요. 이제 한 숨 돌렸으면 좋으련만 북한 음식이 아니라 한식을 가르치기 때문에 명희 씨가 겪었던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아요.

마순희: 맞습니다. 가장 그를 힘들게 했던 것은 탈북자에 대한 편견이었습니다. 한 수강생이 강사가 탈북자라고 하니 수강을 포기하는 일까지 있었다는데요. 명희 씨는 학원에 피해를 주면서까지 학원에 있을 염치가 없다고 다른 일자리를 찾겠다고 했답니다. 하지만 원장님은 ‘명희 씨는 강사의 일자리가 필요하고 나는 명희 씨가 필요하다’며 명희 씨를 믿고 지지해 주었습니다.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워 명희 씨는 최선을 다해서 학원을 위해 일을 하게 됐던 거죠. 나이 지긋한 교육생들에게는 누이동생처럼, 그리고 어린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는 어머니처럼 친절하게 하나하나 가르쳐 주면서 때로는 농담도 섞어 가면서 재미있게 수업을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윤명희 씨는 수강생들 속에서도 인기가 많아졌습니다. 명희 씨의 실력은 입소문을 타게 됐는데요. 더 좋은 조건으로 명희 씨를 데려가려는 곳까지 생겼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명희 씨는 다른 곳에 갈 생각은 꼬물도 없었고 지금도 그 마음이랍니다.

학원에 있는 직원과의 관계에서도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과 잘 지내면서 강사로서 자리매김하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고 하더군요. 명희 씨가 소속된 학원은 정부의 취업훈련기관으로 지정된 곳이라 강의 외에 서류제출 등의 실무적인 업무도 해야 했는데 아무래도 서툴다보니까 하나하나 물어서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한, 두 번은 대답을 해주지만 귀찮아하는 것 같기에 스스로 방법을 찾았습니다. 사무실 정리정돈, 청소와 기타 살림은 워낙 깔끔하고 성실하고 부지런한 명희 씨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고 다른 직원들이 미처 하지 못하는 걸 도와줬더니 어느새 누구나 할 것 없이 ‘우리 윤 선생님’이라 부르면서 잘 지내게 됐답니다. 제가 원장님에게도 우리 탈북자 출신 강사님에 대해 이렇게 믿어주시고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했더니 오히려 자신이 더 고맙다고 하더군요. 명희 씨가 함께 근무하겠다고 하는 한 자신은 끝까지 함께 할 거라면서 탈북민들이 다 명희 씨 같다면 함께 일하지 못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고 하셨답니다.

김인선: 하지만 아무래도 자격증 과정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보니까 수강생들이 자격증을 잘 따야 하잖아요. 부담감이 있겠죠?

마순희: 물론 직업전문학교의 강사라면 수강생들이 자격증도 따고 취업과 연결되는 것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감이 없을 수 없습니다. 명희 씨도 마찬가지라고 해요. 그래도 자신이 직접 교육을 받고 자격증을 취득한 경험이 있기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교육생의 입장에서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거죠. 그래서 한 가지라도 더 잘 가르쳐서 전원이 시험에 합격하고 자격증도 따고 또 취업과 연결되게 하기 위해 마음을 쓰게 된다고 합니다. 가끔 자격증을 취득했다고, 취업했다고 연락하는 교육생들의 전화를 받을 때가 가장 행복하고 뿌듯하다고 하더군요. 교육생 중에는 방학을 이용하여 자격증을 취득하러 오는 중고등학교 학생들도 있고 일반 수강생과 정부보조를 받아 배우는 교육생들도 있는데요. 그 중엔 창업희망자도 있고 현재 요식업에 종사하는 분들, 또 정년퇴직한 후 요리로 제2의 인생을 계획하고 오시는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명희 씨는 연령층도, 직업군도 각이한 교육생들의 특성에 맞게 직업훈련을 잘 해서 전원이 합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대한민국 국민인 자신의 영예로운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명희 씨를 만나러 갔을 때에 명희 씨는 20여 명의 수강생을 앞에 두고 한식 수업을 하고 있었는데요. 북한 출신 강사의 수업을 받는 한국 사람들의 진지한 모습이, 그리고 하나하나 지적해 가면서 열심히 가르치는 강사의 열정어린 모습을 지켜보면서 저 자신이 윤명희 씨가 얼마나 돋보이고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답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정착 사례가 많은 분들의 귀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김인선: 자기가 하는 일에 미친 듯이 몰입해야 성취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한두 번쯤 몰입하는 것으로는 안 되고 매일 매순간 반복해서 몰입해야 한다는 거죠. 또 그것을 즐길 수 있어야 성취하고 원하는 것을 이루어낸다고 하는데요. 윤명희 씨는 남한 음식, 한식에 몰입을 하고 가르치는 것에 열정을 쏟아붓는 선생님인 것 같습니다. 또 명희 씨가 살아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만 해도 탈북 후배들도 보고 배울 게 많아서 삶 자체가 교육자인 것 같은데요. 선생님은 명희 씨의 운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