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이진숙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진숙 씨는 고난의 행군으로 힘든 시기, 남편까지 사망하면서 먹고 살기 위해 7살 된 아들을 친척집에 맡겨두고 1997년 돈을 벌려고 중국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생활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잖아요?
마순희: 맞습니다. 중국에 가서 돈을 벌고 북한으로 돌아와서 아들과 함께 살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여느 탈북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진숙 씨는 인신매매자들에게 속아 중국의 한 농촌마을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북한처럼 먹고 살기가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큰돈을 벌거나 마음대로 쓸 수 있는 형편도 못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신변이 보장되지 못하다 보니 항상 쫓기는 몸이었습니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수색으로 잡혀가게 됐는데 진숙 씨는 중국에서 지냈던 삶을 동경했기에 재 탈북을 했고 무려 6번이나 북송을 당했습니다. 북송이 거듭될수록 북한 수용소에서 인간 이하의 폭력을 당하고 감시받는 생활을 했지만 또 다시 북한을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진숙 씨는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7번째 탈북을 했고 또 다시 북송되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생각에 한국행을 결심했습니다.
탈북 후 겪은 바깥세상 잊지 못해
7번째 탈북을 시도하다
김인선: 한국에 가면 아들을 데려올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마순희: 그렇습니다. 중국에서 지내면서 북한에서 알고 있던 것과 정 반대로 대한민국의 눈부신 발전과 풍요로운 생활모습을 TV를 통해 보게 되면서 한국이라면 아들을 데려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6번의 북송 후 2004년에 이진숙 씨는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 생활을 마치고 강원도의 한 지역에 정착을 한 진숙 씨는 일당을 많이 쳐주는 일부터 무작정 시작했습니다. 건설현장 일이었는데요. 일당은 많은 편이었지만 하루 일하면 몸이 아파 하루, 이틀씩 일을 못나가는 경우가 생기는 바람에 돈이 모이지 않았습니다.
적은 돈이라도 고정적으로 지급받을 수 있는 안정된 일자리를 찾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다른 일들도 경험했습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후 진숙 씨는 급여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집 가까이에 있고 매달 꼬박꼬박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상가건물 청소 일을 시작했습니다. 안정적으로 자리 잡으면 아들을 데려오겠다는 마음으로 진숙 씨는 열심히 일했는데요. 진숙 씨의 바람은 2012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진숙 씨가 한국에 정착한지 9년만이었고 마지막 북송 당시 14살이었던 아들은 22살이 됐습니다. 진숙 씨가 한국정착 초기부터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일하면서 돈을 벌었지만 아들을 데려오는 브로커비용이 만만치 않았고 또 그동안 아들이 살아갈 수 있게 북한으로 생활비를 보내주어야 했기에 시간이 꽤 걸렸던 것입니다.
김인선: 아들을 데려왔다는 기쁨도 컸겠지만 걱정도 많았을 것 같아요. 아무리 모자지간이라고 해도 떨어져 지낸 기간이 길고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된 시점이니까요. 몇 년 만에 같이 살게 되면서 부딪치는 일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15년 만에 만난 아들과의 관계
애틋할 수밖에 없는 이유
마순희: 그렇죠.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진숙 씨 모자의 정은 특별했습니다. 진숙 씨가 북송될 때마다 아들을 만나면서 서로의 애틋한 정을 나눌 수 있었고 진숙 씨의 아들은 북한에 살 때 잊지 않고 늘 생활비를 보내주는 엄마가 고마웠다고 합니다. 한국에 와서 엄마의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브로커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게 일하고 돈을 모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이 더 커졌고 두 사람은 이전보다 더 애틋해졌습니다. 진숙 씨와 아들 사이의 각별함은 제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저를 만나던 날 진숙 씨가 눈시울을 붉히면서 소중히 보관하고 있던 메모지를 내보이더라고요. 삐뚤삐뚤한 글자가 적혀 있었는데요. 아들이 쓴 거라고 했습니다. 진숙 씨의 아들은 북한에 있을 때 학교에 다니지 못해서 글을 몰랐다고 하는데요. 22살에 한국에 와서 탈북청소년들의 정착과 교육을 돕는 대안학교를 다니며 우리글을 익혔습니다. 한글을 깨친 아들이 진숙 씨의 생일 날 ‘엄마, 사랑해요. 생일 축하드립니다’ 라고 편지를 쓴 것이었습니다. 그 편지는 세상 그 무엇과도 비기지 못 할 아들의 선물이라며 진숙 씨는 지금도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다면서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김인선: 15년이나 헤어졌던 아들과 갈등 없이 잘 살고 있고, 직업도 안정적이고, 진숙 씨는 그야말로 성공적인 정착을 이뤄낸 것 같은데요. 이제는 진숙 씨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진숙 씨 곁에 함께 할 동반자가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또 하나의 고비, 남편의 척추암 진단
마순희: 다행히 진숙 씨에게는 아들 외에 또 다른 가족이 있습니다. 바로 한국행을 같이 한 탈북민 남편인데요. 중국에서 만나 라오스, 태국을 거쳐 어렵게 한국행을 같이 하면서 평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했고 그 약속대로 서로가 의지하면서 한국정착을 같이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척추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전부터 남편이 자주 허리통증을 호소했었다고 하는데요. 처음 한국에 와서 일용직으로 일하던 때라 일이 힘들어서 그렇다고 가볍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을 하지 않고 쉬고 있을 때에도 통증이 계속되기에 병원에 갔고 여러 가지 정밀검사 후 척추암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진숙 씨는 자신이 가장 힘들고 위험한 순간에 언제나 곁에서 힘이 되어 주고 도움을 주던 남편의 암 진단 소식에 눈앞이 캄캄했지만 그렇다고 불행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남편의 병을 초기에 발견할 수 있었고 또 의술이 발전된 대한민국이었기에 치료도 가능했습니다. 상가 청소는 하루에 몇 시간씩만 하면 되는 것이어서 진숙 씨는 남편의 병수발은 물론 집안일까지 하면서 꾸준히 일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의 척추암 치료로 치료비도 필요하고 아들의 교육비로 지출이 적지 않았지만 그런 어려움들이 오히려 힘들어도 버티어 나갈 수 있게 한 힘의 원동력이었다는 진숙 씨입니다. 진숙 씨의 생활력과 강한 의지로 남편의 병은 하루하루 호전되어 갔고 지금은 가벼운 산책도 함께 할 정도로 좋아졌다고 합니다.
김인선: 저는 사실 탈북을 6차례나 하면서 몸이 많이 상했을 것 같아 진숙 씨 건강이 걱정됐었거든요. 듣고 보니 진숙 씨가 아플 새도 없이 가족들을 돌보고 계셨네요.
“소소한 삶에서 오는 행복 덕분에 살아요”
마순희: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진숙 씨가 매사 긍정적으로 살았기 때문일 겁니다. 진숙 씨가 이런 말을 들려주었거든요. ‘일을 하면서 모으기만 하고 즐길 줄 모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열심히 모으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저축해 놓은 돈으로 가장집물(살림 도구)을 사서 하나씩 하나씩 집안을 꾸리면서 살아가는 것도 큰 행복이랍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쌓아 놓아도 그건 통장 속의 숫자일 뿐이니까 소소한 삶에서 오는 행복도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라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청소부가 하찮은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생각으로 진숙 씨는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회사도, 상가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모두 진숙 씨의 성실성에 탄복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가건물 환경미화원의 경우에는 2년마다 재계약을 하는데 이진숙 씨는 지금까지 17년간 한 일자리에서 계속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점점 나이가 들면서 힘에 부칠 때도 있지만 회사에서는 본인이 할 수만 있다면 진숙 씨가 계속 일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고 합니다. 평범한 일자리에서 17년간 환경미화원으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이진숙 씨의 끈기 있는 근성이 오늘의 성공적인 정착을 이루게 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김인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해내는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꾸준히 해내는 사람은 많지 않죠. 17년간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내는 이진숙 씨인데요. 청취자 여러분들도 진숙 씨처럼 근성 있게 하고 있는 일이 있으신가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