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북한에선 의료인, 남한에선 제과제빵교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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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최근 고온다습한 기후 속에 폭우까지 겹치면서 채소 가격이 지난달 보다 많게는 두 배 가량 올랐고요. 밀가루에 버터 등 수입물가도 많이 오른 상태라 요즘 먹거리가 참 걱정입니다. 당연히 빵값도 엄청 올랐더라고요. 탈북민들 중에 제과제빵 쪽에서 일하는 분들은 어떠실지 걱정이네요.

마순희: 네. 요즘은 생산자도, 소비자도 치솟는 물가상승으로 경제활동에 타격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탈북민들 중에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빵집을 운영하는 분들은 없지만, 제과제빵 쪽에서 일하는 분은 몇 분 계신데요. 코로나 상황 속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모두 꿋꿋이 자기 일을 해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우리가 성공시대에서 소개한 적도 있었잖아요? 전주에서 제빵기사로 10년 넘게 근무하고 있는 최영애 씨도 그 중 한 분인데요. 영애 씨는 2008년에 한국에 입국했는데 한국정착 1년 이후부터 빵집에서 빵을 만드는 제빵사로 근무하기 시작했습니다. 막내부터 시작했던 영애 씨는 지금, 완장을 차서 주임으로 근무하고 있는데요. 제빵 업계에서는 꽤 유명한 친구랍니다.

그리고 오늘 성공시대 주인공 역시 제빵과 관련한 분입니다. 기술이나 전문자격증을 취득하려면 관련 학원에서 공부도 하고 시험도 봐야 하는데요. 오늘 소개해 드리려고 하는 분은 제과제빵학원에서 최영애 씨를 비롯하여 많은 탈북여성들에게 제과제빵 기술을 가르쳐 주는 교사, 김선미 씨입니다.

북한에선 의료인

남한에선 제과제빵 교사?

김인선: 다른 사람에게 기술을 가르치려면 빵 만드는 일에 어느 정도 경력이 있어야 할 텐데, 선미 씨는 원래 빵 만드는 기술이 있었던 분이실까요?

마순희: 아니요. 선미 씨는 북한에서 의학공부를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후 조선인민군에 입대했었고 해군에서 동해안 사령부 무전수로 군 복무를 하다가 제대된 후 함흥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의료인이었으니까요. 사실 선미 씨는 한국에 입국했던 초기에는 의료부문에서 일해 볼 생각도 해 보았다고 하는데요. 현실적으로 남북한의 의학부문 용어도 너무 다르고 의료방법도 달라서 자신이 알고 있던 의학이 낯설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탈북민들이 처음 한국에 오면 건강검진도 받고 의료혜택을 제일 먼저 받게 되잖아요? 그 과정에서 선미 씨의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의학공부를 했던 선미 씨였는데 한국의 검사장비며, 의료진들이 쓰는 용어까지 모르는 것 투성이었기에 의료부문에서 일하고 싶다는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다양한 직업교육을 접하면서 선미 씨는 제과제빵 쪽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선미 씨는 하나원 교육과정을 수료한 후 강남에 있는 제과제빵학원에 등록하고 열심히 제빵 기술을 익혔습니다.

김인선: 간호사를 꿈꾸던 선미 씨가 두 번째 인생전환을 선택한 거네요. 선미 씨의 첫 번째 인생전환은 탈북을 결심한 일이 아닐까 싶은데요.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의료인이라면 앞날이 어느 정도 보장됐을 텐데, 선미 씨는 어떤 사연으로 탈북 결심을 했을까요?

미래가 없는 북한의 현실에 환멸 느껴

의료인의 삶 포기하고 탈북

마순희: 저희 세대들의 경우 고난의 행군 이후로 겪게 된 어려운 생활과 배고픔이 탈북의 가장 큰 이유였는데요. 젊은 청년들의 경우 조금씩 다른 이유들이 있더라고요. 선미 씨의 경우 1997년 탈북 당시 23살이었는데요. 생활의 어려움과 함께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상황을 겪으며 희망과 미래가 없는 북한의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탈북을 결심했습니다. 마침 중국에 친척들도 많이 있어서 선미 씨는 북한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한국에 와서 보니 선미 씨와 비슷한 이유로 남한행을 단행했던 인텔리 계층들도 의외로 많더라고요. 일반 노동자, 농민들과는 달리 많이 배우고 사회의 상류계층에서 경제적으로 절박한 생활고나 큰 어려움을 모르고 살고 있던 사람들도 북한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더는 북한에 미래가 없다는 것을 알고 그 땅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외국물을 자주 먹었던 사람들일수록 그 괴리감이 더 컸을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선미 씨의 경우에는 중국에 있는 친척들이 친척 방문으로 찾아오기도 했었고 그 친척들을 통해서 중국에서의 생활을 듣게 됐습니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지만 자유롭게 이동도 가능하고 얼마든지 돈을 벌 수 있다는 얘기가 처음에는 쉽게 믿어지지 않았었다고 합니다. 중국에 있는 친척들은 선미 씨에게 중국에 들어와 보라는 권유를 했고 선미 씨는 친척들의 도움을 받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올 생각을 했습니다.

김인선: 많은 고민 끝에 북한에서보다 나은 삶을 꿈꾸며 중국행을 결정하지만 그 길이 결코 만만치 않은데요. 특히 북한으로 잘 돌아가는 것조차 맘처럼 되지 않죠. 선미 씨는 일단 친척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중국으로 건너갔을까요?

마순희: 처음 떠날 때에는 중국에 친척도 있고 브로커 비용도 다 준비하고 떠난 길이었기에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선미 씨의 생각처럼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돈까지 다 챙긴 브로커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기에 선미 씨는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기왕 떠난 걸음을 멈출 수 없다는 생각에 선미 씨는 스스로 찾아가기로 결심했는데요. 안내자 없이 걸어서 함경남도 단천에서 혜산까지 가야 했습니다. 단속 때문에 선미 씨는 낮에는 산 속에 숨어 있다가 밤에 이동을 했습니다.

낮에는 산에 숨고 밤에 이동해 탈북했지만

중국에서 사는 친척들을 보고 실망한 이유

김인선: 안내자도 없이 20대 젊은 여성이 어두운 산길을 걸으려면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마순희: 그렇죠. 하지만 캄캄한 산 속을 헤매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단속에 걸려 잡혀 나가는 일이었습니다. 선미 씨는 낮에는 이동하지 않고 밤이면 북두칠성을 보고 방향을 잡으면서 혜산까지 걸었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선미 씨는 간신히 혜산에 도착했고 경비가 소홀한 틈을 타 압록강도 무사히 건넜습니다. 하지만 중국에서 발붙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중국에서는 탈북민을 신고하면 엄청난 포상금이 나오고, 반대로 탈북자를 보호하면 처벌을 받는 때여서 동네에서도 문을 열어 주는 집이 없었습니다. 선미 씨 뿐 아니라 탈북민은 누구나 어딜 가도 안전한 곳이 없었습니다. 새벽녘에야 겨우 한 집이 문을 열어 주었는데 그 집은 신앙생활을 하는 집이라 남들이 볼세라 선미 씨를 안으로 안내하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분들의 도움으로 선미 씨는 중국 친척들에게 연락을 할 수 있었고 친척들의 도움으로 흑룡강성 계서지방에서 7년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선미 씨가 당시 20대 젊은 여성이라 인신매매로 원치 않은 삶을 살게 될까봐 걱정됐는데 어렵게나마 중국친척들과 연락이 닿았다니 다행입니다. 이제는 선미 씨의 계획대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마순희: 삶에는 늘 변수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막상 와보니 중국의 친척들은 북한에서처럼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넉넉하게 선미 씨를 도와 줄 만큼 생활이 풍요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친척들이 선미 씨에게 중국행을 권유했던 이유는 생활이 어려우면서도 북한을 떠날 생각을 못 하는 선미 씨의 모습이 안타깝게 여겨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선미 씨가 중국에서의 삶을 경험하면 결심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 친척들이 중국에 들어오면 무조건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던 것입니다. 큰 도움을 바라고 목숨 걸고 압록강을 건너 왔지만 친척들의 삶을 보고는 더 손을 내밀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빈손으로 다시 돌아 갈 수도 없었습니다. 선미 씨는 별 수 없이 친척집에서 함께 농사를 지으며 숨어 살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선미 씨는 중국에서의 불안한 생활을 얼마나 버틸 수 있었을까요? 선미 씨의 못 다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가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