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북한에선 의료인, 남한에선 제과제빵교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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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김선미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선미 씨는 북한에서 의학공부를 했던 의료인이었는데 한국에 와서는 제과제빵 기술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하고 있다고 했어요. 한국에 입국할 당시만 하더라도 선미 씨는 의료부문에서 일해 보고 싶은 생각이었잖아요?

마순희: 네. 하지만 현실에서 마주해 보니 남북한의 의학부문 용어부터 너무도 다르고 교육과정과 교육기간의 차이는 물론 치료방법 등 남북의 차이가 커서 한국의 의료부문에서 일할 엄두가 싹 사라졌습니다. 선미 씨는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직업교육을 통해 제과제빵을 접하게 됐고 하나원 교육과정을 모두 마친 후 바로 제빵전문학원에 등록했습니다. 북한에서 전문대를 졸업했었기에 선미 씨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고 식품영양학을 전공으로 석박사 과정까지 수료했습니다.

김인선: 선미 씨는 의료분야에서 식품업계로 그야말로 큰 인생전환을 맞았는데요. 선미 씨의 첫 번째 인생전환, 탈북하는 데에도 우여곡절이 많았죠?

마순희: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탈북민들이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생활고를 견디다 못 해 중국으로 살 길을 찾아 들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선미 씨의 경우 북한에서는 더 이상 미래와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북한의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차에 중국에 있는 친척들의 권유로 탈북을 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중국에 들어오면 무조건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던 친척들의 삶도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도, 중국에서 사는 것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선미 씨는 친척집에서 함께 농사를 지으며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 기간에 선미 씨는 한국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친척들 중에 한국에 돈벌이 간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분들을 통해 한국에서 살고 있는 탈북민들에 대한 소식도 많이 알게 됐습니다.

생활이 어려우면서도 북한을 떠날 생각을 못 했던 선미 씨에게 중국행을 권했던 친척들이었잖아요? 이번에는 선미 씨에게 한국행을 권했습니다. 브로커까지 알선해 준 친척분들 덕분에 선미 씨는 2005년 7월, 30살의 나이에 한국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습니다.

탈북 후 의료인의 삶 포기하고 선택한 길

김인선: 선미 씨가 북한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미래에 대한 목표와 희망을 한국에서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한국사회에 뿌리를 잘 내려야 하거든요.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이나 중국과는 체제와 사상이 많이 다른 만큼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는 게 우선이잖아요?

마순희: 맞습니다. 선미 씨는 남북의 차이와 본인에게 직면한 현실을 빠르게 인정하고 앞으로 살아갈 방안을 찾았습니다.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지낼 때 선미 씨가 북한에서 의학전문학교를 다녔다는 것을 알게 된 선생님들이 의학서적을 구해주면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고 하는데요. 선미 씨는 영어나 외래어가 절반 이상인 의료서적을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팠습니다. 처치방법, 의료기술 등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었던 선미 씨는 제과제빵에 대해 알게 됐고 하나원을 나오자마자 무작정 학원부터 등록했습니다. 처음 해 보는 일이었지만 빵을 만드는 과정 하나하나가 신비로웠고 자신이 직접 빵을 만들면서 성취감과 희열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제빵 학원을 졸업하고 자격증까지 취득한 선미 씨는 동네 빵 전문점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새벽 4시에 출근해 저녁 6시까지 일하는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선미 씨는 일을 마친 후 저녁에 대학과정 공부를 할 수 있는 야간대학까지 병행했습니다.

4년만에

일도, 사랑도, 가정도 모두 이룬

성공적인 정착이 독이 된 이유

공부를 마치면 밤 11시가 넘었지만, 정부의 학비지원을 받으면서 본인이 원하는 식품영양학과 과정을 공부할 수 있었기에 선미 씨는 힘든 줄 몰랐습니다. 그 과정에 제빵학원에서 함께 배우고 또 같은 회사에서 함께 일하게 된 지금의 남편과 알콩달콩 사랑을 꽃피우기도 했습니다. 결혼도 하고 아들도 낳고 행복한 가정을 이룬 것은 물론, 학업과 동시에 일터에서 풍부한 현장경험과 실력을 쌓았습니다. 4년간의 대학과정을 마친 후 선미 씨는 직업전문학교에서 제과제빵 과정의 팀장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덕분에 선미 씨의 한국정착은 일도, 가정도, 사랑도 모두 함께 이루어낸 성공적인 정착사례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김인선: 탈북민들이 안정적으로 한국에 정착하는데 최소 5년이 걸린다고들 하는데요. 선미 씨는 4 만에 대학 졸업도 하고 직업전문학교에서 팀장으로 일도 하고 가정도 꾸리고, 굉장한 성과를 이루셨어요. 선미 씨가 원하던 목표와 꿈을 너무 짧은 시간에 다 이루신 거 아닌가요?

마순희: 네, 선미 씨의 삶은 단 한 번의 실패 없이 하루하루 성장하고 그야말로 승승장구였습니다. 대학 졸업 이후에도 식품영양학과 석박사 학위 과정을 밟았고 그 과정에서 남편과 함께 제과제빵학원 운영도 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선미 씨에게 크나큰 단점이 생겼습니다. 그 성과가 단순히 선미 씨 자신의 노력만은 아니었는데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성과에 도취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들이 하나, 둘 늘었습니다.

흔히 탈북남성들 중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있어요. 탈북여성들이 성공했다고 하는 경우를 보면 한국 남성들과 결혼해서 그 경제적 조건이 발판이 되었기에 가능한 경우가 많다고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탈북여성들의 노력도 있겠지만 남편들의 재력이 힘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더 겸손해야 하는데 선미 씨의 경우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되자 자신이 교만과 우월주의에 빠졌었다고 하더군요.

나의 성공이

나 혼자만의 성공은 아니라는 것

학원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교육생들인 탈북민들의 고충을 들어야 하고 사람들의 각기 다른 생각을 존중해 주고 이끌어 주어야 하는 사명감을 망각하고 말끝마다 ‘제대군인 성격이라서’ 라는 말로 그들의 이야기를 무시하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자신이 최고라고 여겼기에 자신을 우선순위에 두었고 가까운 사람들의 충고는 무시했습니다. 심지어 남편의 진심 어린 조언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학원 운영에서도 가정과 육아에서도, 선미 씨는 남편과 사사건건 부딪치기 일쑤가 됐습니다. 어느 날 돌아보니 남편도 등을 돌렸고 친한 사람들도 하나 둘 떠나갔습니다. 사람들 마음이 이미 돌아선 뒤라 선미 씨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무관심과 냉대가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다는 것을 선미 씨는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김인선: 한국정착 5년 만에, 뒤늦은 위기를 마주하게 된 선미 씨. 어떻게 극복했을까요?

마순희: 선미 씨는 점점 초심을 잃어가는 자신이 두려웠고 자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힘든 산행도 하고 봉사활동도 열심히 참여하며 자신을 반성했습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게 되자 비로소 남편의 소중함과 고마움, 그리고 학원의 존재 이유가 교육생들이라는 것을 가슴깊이 새기게 됐고 선미 씨는 새롭게 출발하는 마음으로 일과 가정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변화하는 선미 씨의 모습을 보고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은 남편이었습니다. 소원했던 남편과의 관계도 좋아지고 선미 씨에게 등을 돌렸던 지인들과도 관계가 회복됐습니다. 수많은 제과제빵 기술인재들을 키워나가는 교사로, 행복한 가정의 아내와 어머니로 선미 씨가 앞으로도 잘 해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김인선: 무엇이든지 잃어봐야 소중한 줄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선미 씨가 잃었던 건 주변 사람들이었는데요. 그들을 다시 되찾을 수 있었던 건 선미 씨의 진심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진심을 다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과 지내고 계신가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