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내가 직접 경험해봐야 상대방의 처지를 알고 이해한다는 '역지사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겪어보면 알게 된다는 그 말... 생각보다 어려운 것 같아요. 저도 12살 된 딸아이를 키우는 엄마인데요. 부모의 입장이 되어 보니까 어렸을 땐 미처 몰랐던 두 분의 마음을 알겠더라고요. 그래서 점점 엄마, 아빠를 더 살뜰히 챙기게 되고 때론 보호자 역할을 하게 되는데요. 그런 모습이 부모님에게는 좋게만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더라고요. 제 생각에는 장성한 자녀가 부모를 보살피고 챙기는 게 당연한데, 정작 부모님은 당신들 챙기느라 시간 뺏긴다고, 자식 앞길을 막는다며 속상해 하셨거든요.
마순희: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이 다 그런 거랍니다. 고마워하면서도 자신 때문에 자식들이 시간을 뺏긴다고 속상해 하시는 건 당연한 겁니다. 부모님에게는 환갑이 넘은 자식도 영원히 자식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선생님 부모님 뿐 아니라 사실 저도 그런 생각을 하며 지내고 있는 요즘입니다. 제가 요즘 지방에서 일하다 보니 서울 집에서부터 일터까지 장거리 이동을 해야 하는데요. 고속버스로 이동해도 되는데도 자식들이 엄마 불편하고 힘들어서 안 된다며 딸들이 번갈아 승용차로 데려다 주고 있습니다. 자식들은 그게 당연히 자식들의 도리라고 하지만 부모 마음은 그렇지만은 않거든요. 저도 그렇고 선생님 부모님도 그렇고 세상 모든 부모가 다 똑같은 마음이죠. 오늘 성공시대에서 소개해 드릴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자식에게 고마운 마음과 함께 미안한 마음을 느낀다는 분인데요. 자신의 무지함으로 자식의 앞길을 축복해 주기는커녕 막을 뻔 했다는 김영석 씨입니다.
김인선: 자식의 앞길을 축복해 준다... 보통 결혼하는 자녀에게 많이 쓰는 표현이잖아요. 영석 씨에게 대체 어떤 사연이 있었을지 궁금한데요?
마순희: 네. 특별한 사연이 있죠. 그 이야기를 하려면 북한에서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김영석 씨는 중국과의 접경지대인 한 지방도시에서 군행정위원회 지도원으로 근무했습니다. 넉넉하지는 못 하더라도 사는데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가던 어느 날, 고난의 행군 시기에 행방불명 됐던 딸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자신은 한국에 와서 잘 살고 있다며 영석 씨에게도 한국에 와서 같이 살자는 연락이었습니다.
김인선: 소식을 알 수 없었던 딸 걱정에 마음이 편치 않았을 텐데... 연락이 닿았으니 얼마나 좋으셨겠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되는 마음도 생겼을 것 같아요. 식구 중에 한국에 가 있는 사람이 있으면 불이익을 당하거나 고초를 겪기 마련이잖아요.
마순희: 맞습니다. 집안에 탈북자가, 그것도 한국에 가 있는 식구가 있다는 것을 알면 행정위원회 지도원이라는 직책에서 근무할 수도 없었는데요. 다행히 영석 씨의 딸은 단순한 행방불명으로 처리되어 있었고 또 영석 씨가 워낙 빈틈없는 업무와 성실함으로 조직생활도 모범적이어서 그 업무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석 씨는 딸에게서 소식이 온 것을 내색하지 않고 산다는 것도 그렇고 다른 사람이라도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영석 씨는 딸의 권유대로 탈북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딸이 자금도 보내주고 브로커 선도 연결해 주어서 김영석 씨는 부인과 함께 2011년 두만강을 건넜고 같은 해, 한국에 입국하게 됐습니다.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수료한 후 영석 씨 부부는 딸과 만났고 한국에서의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김인선: 그래도 김영석 씨는 먼저 정착해 있는 따님 덕분에 한국생활이 막막하게 여겨지지 않았겠어요.
마순희: 그렇죠. 하나원에서 기본적인 한국생활에 대한 교육을 3개월 받고 나면 거주지를 배정받고 본격적인 한국생활이 시작되는데요. 이때부터 우리 탈북민은 홀로서기의 시작, 모든 일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가장 먼저 원하는 거주 지역을 결정하는 것부터 본인의 선택이 시작됩니다. 희망 거주지 세 지역을 제출하면 그 중에 한 지역으로 배정되고 임대아파트를 받게 되는데요. 김영석 씨 부부는 먼저 한국에 정착한 딸이 배정받은 서울에 있는 임대주택에서 함께 살게 됐습니다. 그 전에는 30세 이상의 탈북민들에게는 모두 임대주택을 배정해 주었었는데 가족 형태로 탈북하는 사례들이 많아지면서 먼저 탈북한 가족이 있는 경우 30세 이상이라도 미혼인 경우에는 주택을 더 배정하지 않고 합가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집이 넓은 편은 아니었지만 영석 씨 부부에게는 그 어떤 궁궐보다도 더 소중한 생활의 보금자리였습니다.
김인선: 가족 없이 혼자 몸으로 주택을 배정받고 나면 지역사회에서 일부 기본적인 생필품을 지원받지만 가전제품이나 가구 등 대부분의 물건들은 정부 지원금으로 본인이 직접 사서 채워야 하잖아요. 영석 씨는 딸 덕분에 그런 정착 초기의 어려움들은 없었겠네요. 하지만 딸만 믿고 가만있을 순 없죠. 영석 씨는 한국에 와서 가장 먼저 뭘 하셨을까요?
마순희: 네. 영석 씨는 부인과 함께 하루도 쉬지 않고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한국 입국 당시 김영석 씨의 나이는 53살이었고 북한에서 군행정위원회 지도원이었기에 기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석 씨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하루 일한 만큼 로임을 받는 일용직이었습니다. 대부분 현장 노동일이었지만 영석 씨는 힘들다는 것도 못 느끼고 일을 했습니다. 가족을 위해 한국생활에 빨리 적응해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생활에 완전히 정착을 하기 전, 딸이 출가 의사를 밝혔고 영석 씨는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김인선: 영석 씨가 결혼을 하려는 딸 때문에 갖게 된 고민이 도대체 뭘까요?
마순희: 네. 이유를 알고 나면 헛웃음이 날 수도 있겠지만 당시 영석 씨의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영석 씨의 경우 한국의 주택정책을 잘 몰랐기 때문에 딸이 결혼을 하게 되면 살 집이 없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먼저 정착한 딸의 명의로 된 집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딸이 결혼해서 다른 곳으로 가게 되면 그 집을 당연히 반납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주택의 명의자, 즉 입사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직업에 따라서 주택이 배정되기 때문에 그 직업에서 조동되면 당연히 주택을 반납해야 했습니다. 영석 씨는 한국도 북한에서처럼 똑같을 거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김영석 씨는 딸에게 '내가 한국에 온지 얼마 안 돼 모아놓은 돈도 얼마 없고, 새로 집을 장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엄마랑 둘이 한지에 나 앉을 수도 없으니까 당장 결혼하지 말고 좀 더 있다가 결혼하면 안 되겠냐'고 말했다고 합니다.
당시 제가 남북하나재단 콜센터에서 근무할 때였는데요. 영석 씨가 너무 속상하다고 상담전화를 했었는데 그 전화를 제가 받았습니다. 어떤 사연인지 다 들어보고 나서 김영석 씨를 안심시켜드렸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그때 저는 영석 씨에게 마음 편하게 따님 결혼을 축하해줘도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임대주택의 명의자, 즉 세대주의 결혼이나 사망 시 함께 살고 있는 직계가족에게 명의를 이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 설명을 듣고 난 뒤 영석 씨가 다행이라며 정말 뛸 듯이 기뻐하셨습니다. 한국정부의 탈북민 주택지원 정책에 대해 잘 몰랐기에 딸이 시집을 가면 노숙자가 된다는 걱정이 가장 먼저 들었고 그래서 딸의 출가를 진심으로 축하해주지 못했다면서 영석 씨는 딸에게 미안해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영석 씨는 딸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축복해줬고 집은 영석 씨 명의로 변경해서 마음 놓고 살 수 있게 됐습니다.
김인선: 김영석 씨의 경우 딸이 먼저 한국에 정착해서 살고 있었는데도 예상하지 못했던 주택문제에 대한 고민으로 마음고생을 크게 하셨는데요. 더 이상의 시행착오는 없었으면 좋겠네요. 김영석 씨의 본격적인 한국정착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
0:00 / 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