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김영석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영석 씨는 행방불명으로 사망했다고 생각했던 딸과 연락이 닿으면서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영석 씨의 딸은 한국에서 정착해 잘 살고 있다며 아버지인 영석 씨에게도 한국에 와서 같이 살자고 했었잖아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한국행을 결심하기가 결코 쉽지는 않았지만 북한에서는 한국에 가 있는 식구가 있는 경우 부당한 대우를 받고, 또 영석 씨의 경우 딸에게서 소식이 온 것을 내색하지 않고 산다는 것이 자신이 없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생각에 영석 씨는 딸의 권유대로 탈북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딸이 탈북자금도 보내주고 브로커 선도 연결해 주어서 영석 씨는 부인과 함께 2011년 한국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영석 씨 부부는 딸 명의로 받은 임대주택에서 함께 살게 되었는데요. 한국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택문제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한국행을 권했던 딸이 결혼을 하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석 씨는 딸에게 '내가 아직 한국에 온지 얼마 안 되어 모아놓은 돈도 얼마 안 돼 새로 집을 장만한다는 것은 어렵고, 그렇다고 한지에 나 앉을 수는 없으니까 당분간이라도 결혼을 미루자'라고 말했습니다. 영석 씨는 그 말을 하고 무척이나 속상해 했고 탈북민들의 한국정착을 지원하는 남북하나재단 콜센터로 상담전화를 했습니다. 탈북민의 전화에 응답하고 문제 해결을 돕는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인 종합상담콜센터에 제가 근무할 때였기에 당시 영석 씨와 통화를 했었는데요. 사연을 듣고 나서 걱정 말고 따님 결혼을 축하해 주시라고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탈북민 주택지원에 있어 세대주가 결혼을 하거나 사망한 경우 함께 살고 있는 직계가족에게 명의를 이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석 씨는 딸의 결혼식 이후 딸과 함께 살던 집을 자신의 명의로 변경해서 마음 놓고 살 수 있게 됐습니다.
김인선: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잖아요. 낯선 한국생활에 익숙해지기까지 많은 탈북민들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하게 되는데요. 김영석 씨는 어땠을까요?
마순희: 영석 씨도 시행착오를 피해갈 수는 없었습니다. 먼저 입국한 가족이 있으면 정보를 이미 알고 있기에 몰라서 겪을 수 있는 시행착오 같은 것은 줄여나갈 수 있지만 취업의 경우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북한에서처럼 직업을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하고 싶은 일,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석 씨는 딸에게 도움 받기 보다 자기 일은 자기 자신이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사무직처럼 좋은 일자리 구하기가 어려워 그렇지 노동 강도가 센 힘든 일자리는 얼마든지, 언제든지 찾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 영석 씨가 찾은 일자리는 식량창고에서 쌀가마니를 나르는 일이었습니다. 단순노동이기는 했지만 급여가 높았습니다. 하지만 육체적으로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며칠 일하고 쉬어가는 사람, 아예 다른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지만 영석 씨는 끝까지 버텨내고 싶었기에 이를 악 물고 일했습니다. 그러나 몸이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았고 영석 씨는 4개월을 버틴 후에 그 일을 그만 두게 됐습니다. 다음에 찾은 일자리는 건설현장 일용직이었습니다. 하루 일한 만큼 로임을 받는 일용직의 경우 새벽 일찍 인력회사에 나가야 일자리가 결정되기에 새벽 4시에 인력회사에서 나오는 차를 타고 다녀야 했습니다. 영석 씨는 그 일이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인선: 맞아요. 이른 새벽부터 나가서 인력회사에 대기하고 있어도 그날 일할 곳을 찾지 못하는 경우도 생기고요. 매번 일하는 장소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또 먼 이동거리도 감수해야 하죠. 그래서 한국에 오자마자 바로 육체노동을 시작했다가 포기하고, 시간을 들여 제대로 교육을 받고 나서 직업을 찾는 탈북민들이 많은데요. 영석 씨는 어땠나요?
마순희: 맞습니다. 영석 씨 역시 불규칙적이고 힘든 일용직 대신 다른 일을 찾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때마침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같이 나왔던 지인과 연락을 하게 됐는데, '도로공사에 취직했는데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이고 의료비 지원 등 다양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4대보험도 가입된다'고 하면서 하는 일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고 했습니다. 특히 탈북민이 4대보험이 적용되는 정규직으로 취직하게 되면 회사는 정부로부터 고용지원금을 받게 되는데요. 당시엔 탈북민들도 3년까지 취업장려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1년차는 최대 4,670달러(550만원), 2년차는 5,096달러(600만원), 3년차는 5,520달러(650만원)를 취업장려금으로 받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보면 월 급여가 적은 편이 아니거든요. 이런 정보를 잘 아는 탈북민이라면 누구나 고속도로 요금소에서 일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영석 씨 역시 지인을 통해 이런 내용을 알게 됐고 한국정착 6개월 되던 때부터 한국도로공사 서울 영업소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요금소에서의 일이 영석 씨에게 잘 맞았을까요?
마순희: 네. 영석 씨의 성격이 워낙 꼼꼼하고 성실하고 또 나이도 있다 보니 변화무쌍하고 역동적인 일보다는 규칙적이고 책임적으로 일자리를 지켜야 하는 요금소 일이 적성에 맞았습니다. 고속도로를 통과하는 차량들이 잠시 멈춰 이용료를 내는 곳이 고속도로 요금소잖아요. 처음엔 요금이 다른 차 종류를 분간해 보는 것도 어려웠고 매일 수많은 차들이 쉴 새 없이 오가는 요금소 업무가 쉽지 않았지만, 차차 적응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영석 씨는 무엇보다 자신이 성실하게 근무하면 그에 대한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습니다.
김인선: 한국정착 6개월 만에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았다는 건 엄청난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석 씨의 경우 요금소 업무에 대한 적응도 굉장히 빠른 편인 것 같은데요. 걱정되는 부분이 있어요. 요금소 업무의 경우 길어야 3년까지만 할 수 있잖아요?
마순희: 맞습니다. 여러 탈북민들에게 요금소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인데요. 또 다른 측면도 있었습니다. 회사 차원에서 볼 때 탈북민을 고용하면 정부로부터 월 평균 420달러(50만원)씩 고용지원금을 받을 수 있게 되는데요. 3년이 지나면 고용지원금을 국가가 지급하지 않습니다. 회사 입장에서 보면 업무에 조금 서툴더라도 새로운 탈북민을 고용하면 3년간 고용지원금을 또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편향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자 한국 정부에서는 2014년부터 고용지원금을 회사에 주는 대신 탈북민들에게 직접 지원해 주고 있습니다.
요금소 업무는 3교대로 근무 시간이 길지 않기 때문에 3년 동안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고 준비하는 경우도 많은데요. 간혹 예외로 재계약을 해서 요금소에서 1, 2년 더 근무하는 탈북민들도 있습니다. 영석 씨도 재계약을 통해 2년을 더 근무하고 2016년에 퇴직했습니다. 요금소에서 퇴직한 후 영석 씨는 다시 일용직으로 건설현장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쉬는 날이면 가까운 산으로 산행을 하면서 여가활동을 즐깁니다. 올해 64살 된 김영석 씨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에서 조금씩 일을 하면서 큰 욕심 없이 살아가고 싶다고 합니다. 마음의 정착, 사람 관계의 정착, 경제활동에서의 정착. 이 세 박자가 모두 맞아야 이 땅에 잘 정착한 거라는 김영석 씨는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정착이라고 하는데요. 그 말을 탈북 후배들에게도 꼭 전해주고 싶답니다.
김인선: 성공적인 정착에 마음의 정착이 가장 중요하다는 김영석 씨의 말, 한국 땅을 막 밟은 탈북민들이 꼭 기억하셨으면 좋겠네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 여기서 마무리 할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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