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강채경 씨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갈게요. 채경 씨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중국으로 향한 평범한 북한 여성입니다. 불안한 신분으로 6년 동안 중국에서 식당일을 하며 열심히 돈을 벌고 그 돈의 일부를 가족을 위해 북한으로 보냈는데요. 중간에 아들을 중국으로 데려왔었죠?
마순희 :네. 채경 씨가 번 돈을 북한으로 보냈지만 그 돈으로 많은 식구들의 배를 채우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시댁 식구에 친정 오빠 가족까지 돌봐야 했으니까요. 중국 생활 3년 만에 채경 씨는 밥이라도 배불리 먹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아들을 중국으로 오게 했고 15살 어린 나이였지만 채경 씨와 함께 식당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채경 씨는 주방에서, 아들은 식당 내부에서 음식을 나르는 일을 했기에 언제 공안에게 잡혀갈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 늘 노출된 상태였습니다. 특히 사람들과 대면하는 일을 해야 하는 채경 씨 아들이 위험했습니다. 실제로 두 사람이 한국으로 오기까지 3년 사이에 두 번이나 중국공안에 잡혀갈 정도였습니다. 그때마다 식당 사장님이 채경 씨 아들을 빼 내는데 그 때 쓰는 돈은 채경 씨와 아들의 로임이었습니다. 번 돈보다 나가는 돈이 더 많으니 한국으로 가는 건 어떻겠냐고 사장님이 권유할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실제로 채경 씨는 2010년에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채경 씨가 한국 정착생활을 시작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버지의 고향인 경상남도 하동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북한을 떠날 때 부모님의 묘 한 켠에서 흙 한줌을 챙겨왔는데 중국에서 6년 넘게 숨어 사는 고생을 하면서도 간직했고 그 흙을 채경 씨의 아버지가 그토록 가보고 싶어 했던 고향, 경상남도 하동에 묻었습니다. 아버지의 유언을 지켜드린 것 같아 비로소 모든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았고 흙을 묻으면서 채경 씨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한국 정착을 시작하게 된 채경 씨는 자신감 넘치게 생활을 했습니다. 강원도 춘천에 거주지를 잡고 중국 식당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막국수 체험박물관에 취업했습니다. 탈북민들이 거주지에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하나센터에서 추천을 해 준 덕분이었습니다.
채경 씨는 면을 뽑는 일을 담당했는데 탈북민들 중에서는 처음 선발되어 근무했었기에 남다른 책임감을 느끼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만 팔목 인대가 늘어나서 치료를 받기 위해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거든요. 몸이 따라주지 않아 채경 씨는 막국수 체험박물관에서 1년 2개월을 일하다가 그만두게 됐습니다. 그렇다고 쉬고만 있을 수 없었다는 채경 씨는 치료를 받는 한편, 요리학원을 다니면서 조리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동시에 육체적인 부담이 적은 사무능력을 키우기 위해 컴퓨터 학원을 다니며 열심히 컴퓨터도 배웠습니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자신의 사업을 하려면 가장 먼저 배워야 할 분야가 컴퓨터라는 것을 알게 되고 컴퓨터 활용능력, 전산 세무회계자격증 등을 취득했습니다.
김인선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아무 일이라도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까 적성에 맞지 않아서 하던 일을 그만 뒀다는 탈북민도 적지 않고요. 채경 씨처럼 건강상의 문제로 일을 중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도 탈북민을 위한 다양한 생활지원과 의료지원 혜택이 있어서 경제적인 부담 없이 치료도 받고 건강을 회복하는데요.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정착 초기의 생활로 돌아가느냐,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인데요. 채경 씨는 어떤 결정을 했죠?
마순희 :강채경 씨는 건강을 회복하면서 컴퓨터 공부뿐 아니라 민간단체에서 실시하는 여러 가지 상담 공부도 병행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외래어 때문에 공부하기가 어려웠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기 위해 열심히 배우고 익혀 나갔습니다. 40대의 나이에 낯선 한국 땅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우기 시작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지만 채경 씨는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배울 수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했습니다. 더딘 것 같아도 시간이 흐를수록 성과가 나타났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강채경 씨는 정착에 있어 중요한 것이 '찾기'와 '노력하기'라고 말합니다. 채경 씨는 건강도 회복하고 컴퓨터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사무직에 도전했습니다. 처음엔 경리 보조 일부터 시작했다고 합니다.
김인선 :취업하기가 쉽지 않을 때는 급여가 적어도 좋으니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일만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막상 일자리가 생기고 나면 점점 마음이 달라지죠. 적성에 맞는 일을 하고 싶고 이왕이면 로임도 많이 받았으면 좋겠고 또 근로조건도 좋았으면… 하면서 점점 욕심이 생기는데요. 채경 씨도 마찬가지였을까요?
마순희 :결과적으로는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단순히 혼자만 잘 살자고 돈을 벌려는 것이 아니고 북한에 있는 오빠와 조카들, 남아있는 가족들을 살려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채경 씨는 좀 더 많이 벌 수 있는 일을 끊임없이 찾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채경 씨가 친구들과 함께 외식을 하면서 족발집에 갔는데 가게가 운영되는 모습이 그렇게 끌리더랍니다. 채경 씨는 그때 이후로 자신도 반드시 잘 나가는 족발집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중국에서 6년 넘게 살면서 식당에서 일해 왔던 채경 씨였기에 식당 영업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확신이 서 있었기도 했고, 직장에 다니는 것보다 자신의 가게를 운영하는 것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채경 씨는 탈북민을 지원하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과 본인의 의지로 한국정착 5년 만에 원하던 족발집을 열게 됐습니다.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가게를 열었던 만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쳤습니다. 저도 그 식당에 가 봤었는데 손님들이 붐빌 정도로 장사가 잘 되는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또 한 번 몸 상태가 채경 씨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족발집이라 무거운 걸 들 때도 많았고 쉬는 날도 없이 영업을 하다 보니 몸이 따라주지 못 했습니다. 채경 씨는 허리디스크로 병원 걸음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아픈 것도 내색하지 않고 견디려 했지만 끝내 시술을 받는 형편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채경 씨는 가게 문을 닫고 치료에 전념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채경 씨는 시술 후 물리치료를 받으면서 건강을 회복했고 힘든 식당일보다 자신의 건강을 돌보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또다시 자신에게 맞는 창업을 위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최근 채경 씨가 새롭게 시작한 사업은 바로 건강하고 아름답게 살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담은 천연 화장품 사업입니다. 가게를 차린 지 몇 개월 되지 않았지만, 벌써 입소문이 나서 단골손님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15살에 탈북해 채경 씨와 함께 중국에서 고생하던 아들도 대학을 졸업하고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했고, 채경 씨는 한국에 와서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주고 이해해 주는 남편도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과 함께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다는 강채경 씨인데요. 앞으로도 오늘보다 내일이 더 행복한 나날의 연속이 되길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김인선: 강채경 씨의 삶을 통해 도전을 포기하지 않도록 가슴이 뛰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라고 하죠. 단 하루도 도전이 아닌 날이 없으니까요. 저마다 원하는 꿈에 다가서기까지 무수히 많이 넘어지게 되는데요. 넘어져도 툭툭 털고 멋지게 일어나는 사람이 있고 휘청거리거나 제대로 일어나지 못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인가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예진,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