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10년 차이] 누구도 “행복한가”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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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함경북도 무산 출신으로 올해 남한 정착 10년 차인 박소연입니다”

“양강도 혜산 출신으로 이제 막 한국에 정착한 이해연입니다”

10년 차이로 남한에 입국한 탈북민 선후배가 전해드리는 남한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이해연 : 올해는 누가 뭐래도 대학에 입학해서 공부를 시작한 것이 저에게 가장 중요한 뉴스였습니다. 또 하나는 교통사고요. 안 좋은 일이지만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잖아요? 운전을 더 조심하게 되고 위급한 상황에서 대처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생겼습니다.

박소연 : 카페에서 아르바이트 시간제로 일하다가 정직원이 됐다는 것, 카페 정직원은 제가 남한에 정착하면서 꼭 도전하고 싶었던 꿈인데 12년 만에 이룬 셈입니다. 카페서 일하면서 커피와 우유가 들어간 라떼 위에 예쁜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혼자 연습했어요. 커피를 받은 손님들이 예쁘다고 해주고 인터넷 공개 게시판에 사진을 올려주면, 그걸 보는 행복은 정말 돈으로 살 수 없을 겁니다.

이해연 : 선배님은 카페서 일하면서 새로운 재능을 찾으신 것 같아서 보기가 정말 좋습니다.

박소연 : 그리고 반대로 돈을 써서 행복한 거… (웃음) 대학 들어간 아들에게 승용차도 사줬고… 제가 부자여서 승용차를 사 준 건 절대 아니고요. 이유가 있습니다. 아들이 공부를 하면서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수업이 끝나서 일하는 직장에 가려면 이동시간만 3시간이 걸려요. 그래서 큰맘 먹고 차를 사줬는데 지금도 할부금을 물고 있어요. 솔직히 달마다 나가야 하는 자동차 할부금 때문에 힘들지만 내심 '아들한테 고급 승용차 사준 여자야' 자부하면서 살고 있답니다.(웃음)

이해연 : 저도 일상에서 커피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저한테는 작은 행복을 줍니다. 정착 초기에는 '이 사약 같은 쓴 물을 왜 마시지' 생각했지만 지금은 기계까지 다 사서 집에 갖춰 놓고 만들어 먹는데요. 아파트 베란다에 놓은 책상 앞에서 아파트 마당의 큰 나무를 보면 커피를 마시는데 그 시간이 저에게는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박소연 : 남한에 와서 들은 얘긴데요, 행복은 크지 않아도 된대요. 대신 횟수가 많으면 좋다고 합니다. 작은 행복이라도 자주 느끼면 최고로 행복한 사람이랍니다. 커피를 마시고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이렇게 일상에 느끼는 작고 사소한 행복이 많을 수록 행복지수가 올라간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행복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을 청취자분들한테도 전해주고 싶어요. 오늘도 온 가족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아침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 저녁에는 동생이랑 이불 싸움하면서 한 이불 밑에서 잠들 수 있다는 것, 이 자체도 행복이다… 이 말을 전해주고 싶어요.

이해연 : 북한 주민들은 일상에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잊은 채 살죠. 저도 그랬지만 선배님도 같았을걸요? 지어 '너는 지금 행복해' 같은 질문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박소연 : 행복이라는 말은 국가만 쓰는 말인 줄 알았어요. 국가가 우리한테 '행복하다'는 것도 제정해 주잖아요.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었을 때도 행복하진 않았습니다. 그냥 다행이다, 생각했어요. 우리 식구가 한 달 동안 잡곡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안도감이었죠. 가족이 굶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식량을 벌었다는 것은 행복인데 그때는 그런 말을 붙일 줄도 몰랐네요. 혹시 해연 씨 그거 알아요? 남한에는 '총화'라는 말이 없어요. 북한에는 연말이면 생활총화, 월총화, 연간총화...정말 총화투성입니다. 특히 한 해 동안 개인이 당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대중 앞에서 총화해야 합니다. 남한은 한 해를 마무리한다는 말을 많이 씁니다. 올 한 해 열심히 살아온 자신을 토닥토닥 다독이면서 칭찬을 많이 해주자… 그런 말을 표현을 많이 쓰죠.

이해연 : 그만큼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해서인 것 같아요. 자신에게 올해 애썼다며 토닥인다는 얘기를 들으면 처음에는 너무 오글거렸어요. 어떤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나의 칭찬을 누가 해줘 내가 해줘야지,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해 주냐고 하는데,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어요. 이렇게 한 해를 보내며 나누는 칭찬과 총화도 남북이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박소연 : 맞아요. 북한에서는 자신에 대해 칭찬하면 모자라는 사람으로 취급하잖아요. 그래서 혼자서 몰래 하는 거죠. (웃음)

이해연 : 자신에 대한 칭찬! 너무 좋은 것 같습니다. 저는 연말이면 한 해 동안 있었던 기억나는 일들을 글로 정리하는데요, 쓰면서 열심히 살아온 순간들이 생각나서 괜히 울컥하고 그럽니다.

박소연 :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 대한 칭찬은 소소한 행복 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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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연 : 해연 씨, 곧 설날입니다. 새해에 꼭 도전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을까요?

이해연 : 솔직히 도전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뭘 선택해야 할지가 고민입니다. 남한은 자기 계발을 꾸준하게 해야 살아남는 사회입니다. 무작정 도전하기보다 하고 싶은 거에 도전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서요, 내년에는 자격증 취득, 취업, 영어 단어 외우기, 운동까지 정말 할 게 많습니다. 선배님은요?

박소연 : 지금 하는 일들을 무탈하게 내년에도 유지하는 것이 제가 꿈꾸는 도전입니다. 목표나 희망이 현 상황을 초과하면 부작용을 낳더라고요. 욕심 하나만으로는 행복할 수가 없더라고요. 지금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을 비롯해 꾸준히 오랫동안 하던 일들을 그대로 잘해 나가는 게 목표입니다. 욕심이 있다면 새해에는 건강을 위해 사이클에 도전하고 싶어요. 사이클은 자전거를 말하는데 북한에서 자전거에 짐을 싣고 많이 달렸어요. 그래서 한동안 자전거는 꼴 보기도 싫었는데 남한 정착 12년 차가 되면서 장사가 아닌 건강을 위해 자전거를 타고 싶어요. 내년에는 자전거를 타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완주하고 싶은데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이해연 : 응원합니다! 청취자분들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말은 지나간 일에 대해 아쉬워하지 마시고, 지나간 건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다는 노랫말도 있어요. 지나간 세월은 그냥 지나간 대로 두고 현재를 잘 사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봐요.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모든 게 다 경험이고 이런 경험들이 하나둘 쌓이면서 조금 더 나은 나로 성장해 간다고 생각해요 우리.

박소연 : 한국에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이 있어요. 도망치지 못하고 살 바에는 그 안에서 불행하게 사는 방법보다 작은 행복을 찾으며 살 수 있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오늘의 삶이 치열해도 행복과 슬픔을 나눌 수 있는 가족들과 함께 슬기롭고 당당하게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한 해 동안 청취해 주신 북한 주민 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탈북 선후배가 나누는 남한 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진행에 박소연, 이해연, 제작에 서울 지국이었습니다.

에디터 이현주, 웹편집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