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10년 차이] 얼어 죽어도 물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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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함경북도 무산 출신으로 올해 남한 정착 10년 차인 박소연입니다”

“양강도 혜산 출신으로 이제 막 한국에 정착한 이해연입니다”

10년 차이로 남한에 입국한 탈북민 선후배가 전해드리는 남한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박소연 :넷플릭스라는 인터넷 기반, 동영상 공급 회사에서 얼마전 공개한 '흑백요리사'는 남한에서 제작한 일종의 요리 경연 프로그램인데요, 세계적으로 화제입니다. 지난 시간부터 이 얘기 전해드립니다.

이해연 : 요리사가 모두 100명이 출연했는데, 이 중에 탈북민 요리사도 있었습니다. 남한에서 일하는 탈북민 요리사, 특히 젊은 요리사들은 과거와 달리 특별히 북한 요리를 하지는 않아요.

박소연 : 맞습니다. 제가 작년에 취재로 탈북민이 운영하는 식당 40~50곳을 찾아 전국을 돌았어요. 가장 기억에 남았던 분은 우선 제주도에서 '초계탕국수집'을 운영하시는 60대 탈북민 여성이었어요. 보통 국수는 면으로 만든 음식이라고 생각하지만 탈북민 요리사가 만든 초계탕 국수는 얇게 찢은 닭가슴살이 면을 대신하는 특색 있는 음식인데요. 제주도에서 아주 인기가 있었어요.

이해연 : 초계탕 국수, 처음 들었습니다.

박소연 : 또 한 분은 부산에서 소고기를 두툼하게 썰어서 구워주는 서양 요리인 스테이크 식당을 운영하는 탈북민인데 그분 얘기가 인상적이에요. 북에서 왔으니까 냉면 식당을 하는 게 좋지 않았겠냐고 물었더니, 처음에는 냉면을 주요 음식으로 정했다가 지금은 후식으로 밀려났다고 해요. 남한 사람들이 주된 고객이니 북한 고유 음식보다 한국식 또는 서양식 음식이 손님이 더 많다고요. 이분도 30대 초반에 와서 요리 학원에 다니며 요리를 배웠는데 처음에는 북한 음식점을 하면 대박 날 것이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 탈북민 요리사들은 꼭 북한 음식을 고집하진 않는 것 같아요.


이해연 : 그게 맞는 것 같아요. 탈북민 숫자가 적지 않다고는 해도 고향 음식을 매일 먹으러 가진 않고요. 또 정착 초기 고향 음식이 그리워 북한 음식점을 즐겨 찾지만 방문 횟수는 점점 줄고요. 저도 이제 거의 안 갑니다.


박소연 : 저는 해연 씨 정착 연차쯤에는 고향 요리하는 음식점에 기를 쓰고 갔었어요. 탈북민들이 모여 사는 임대아파트 단지 주변에는 동서남북으로 탈북민 식당이 있는데 거기서 주로 하는 음식은 인조 고기밥, 두부밥, 순대, 농마 국수가 있고 냉장고에는 북한 마른 명태, 콩사탕, 오꼬시(강정), 과줄 등이 있었어요. 지금은 아주 가끔, 여름에 농마국수를 먹고 싶어서 가기도 하지만, 이제는 거의 집에서 해 먹거나 남한 음식을 먹게 돼요. 해연 씨를 보니 젊은 세대일수록 훨씬 더 빨리 남한 음식에 익숙해지나 보네요.

남한에서 북한 음식이 비싼 이유 , 재료도 탈북해서?

이해연 : 그러기도 하고 사실 북한 음식이 비싸거든요.

박소연 : 맞아요. 왜 그렇게 비싸요?

이해연 : 그만큼 재료나 상품들이 다 북한에서 탈북해야 하니까 비싼 게 아닐까요? (웃음) 그래서 가격이 비싼 건 이해하겠는데 가격만 보면 차라리 남한 음식을 먹게 되는 거죠.


박소연 : 저도 몇 년 동안은 고향에 대한 향수 때문에 가격을 따지지 않고 그냥 먹었어요. 그러다가 5~6년 차가 되니까 이 돈이면 남한 음식을 더 맛있고 더 많이 준비해서 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거죠. 제가 얼마 전에 북한 음식을 공장에서 만들어 전국으로 택배 사업을 하는 분을 만난 적이 있는데요, 그분이 처음에 북한 전문 식당을 하다가 문을 닫았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신기해서 오더니, 그다음부터는 가격이 비싸고 자기들 입맛에 안 맞아 뜸하게 오고, 주변에 탈북민도 별로 없었답니다. 결국 식당 문을 닫고 공장을 열었는데, 공장이 좋은 점은 인터넷을 통해 전국의 탈북민들이 주문할 수 있는 거랍니다.


이해연 : 사실 남한에는 너무나 많고 다양한 세계 각국의 요리가 다 들어와 있으니 식당에 간다고 해도 너무 많은 선택지가 있어요. 그런 많은 요리 중 하나가 북한 요리가 되는 것이고요.


박소연 : 한 가지만 먹고 살기에 세상은 넓고 음식이 다양합니다! 북한에 있을 때는 음식은 먹어서 배부르면 다라고 생각했는데 남한 정착 12년 차가 되니까, 한 번도 먹지 못한 신기한 음식도 찾아보고 식당의 분위기도 따집니다.


이해연 : 그래서 남한에서 음식점 사업은 맛으로만 승부를 걸 수 없는 것 같아요. 맛이 있는 건 기본이고 식당 분위기나 봉사의 질이 좋아야 사람들이 많이 찾게 되죠. 이런 이유로 탈북민이 북한 요리만 해서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박소연 :몇 년 전인가 남한에서 북한 음식이 인기 있을 때가 있어요. 2018년도에 판문점에서 남북 두 정상이 만났잖아요? 그때 두 정상이 냉면을 먹었고 그 이후 평양냉면이 갑자기 유행하면서 전국적으로 냉면집이 그렇게 잘 됐답니다. 그때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평양 옥류관 냉면이 그렇게 맛있냐며 저에게도 계속 물어봤었어요.


이해연 : 저는 '평양냉면'이라는 걸 남한에 와서 처음 먹어봤습니다. 지방 사는 사람들에게 평양 옥류관에 간다는 건 엄청 어려운 일입니다. 평양 한번 가는 것도 진짜 힘든 일이고요. 남한에 와서 도대체 평양냉면이 얼마나 맛있길래 하고 먹어봤는데 그냥 국수 맛이더라고요.(웃음)

박소연 : 그냥 사실 국수맛이죠. 북한에는 평양냉면, 함흥냉면이라는 게 없는데 남한에는 평양냉면은 물냉면, 함흥냉면은 비빔냉면이란 인식이 있어요. 근데 이게 역사가 있더라고요. 6.25전쟁 때 남쪽으로 내려온 실향민들이 냉면집을 열어서 이름을 붙였어요. 비빔면 위에 명태를 빨갛게 양념해서 꾸미로 얹어놓은 요리는 함흥에서 온 요리사가 만든 냉면이니 함흥냉면... 이런 식으로요.


이해연 : 냉면이라고 하면 그냥 물냉면 밖에 생각이 안 나요. 비빔냉면은 사실 남한이 와서 알게 됐어요. 남한에는 줄여서 '비냉'이라고 불러요. 면과 물은 따로 주고 면 위에 빨간 양념을 위에 올려서 비벼 먹는 거잖아요.

박소연 : 사실 북한 사회도 변했기 때문에 저희가 모르는 것일 수 있어요. 실향민들이 처음 남한에 왔을 때가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데 그때는 북한도 그렇게 먹었겠죠. 북한 사회는 변했고요.

부족한 주머니 사정이 만든 '물냉면'

가난이 만든 '인조고기'


이해연 : 선배님은 혹시 어떤 걸 좋아하세요?

박소연 : 저는 얼어 죽어도 물냉면이죠.

이해연 : 저도 그렇습니다!

박소연 : 북한에 있을 때 가끔가다가 비빔 냉면을 요구하는 분들이 있어요. 근데 먹어보면 배가 안 불러요. 장마당에서 끼니때 국숫집에 가면 꼭 그러죠. '물을 많이 줘요'. 지금 생각하니 물이라도 배부르게 먹어야, 뭘 먹은 것 같아 물냉면을 더 많이 찾지 않았나 싶고 결국 물냉면은 가난이 만든 음식이란 생각이 들어요.

이해연 :그 얘길 듣고 나니 지금까지 그걸 잊고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북한에 있을 때 냉면집에 가면은 국수물을 정말 찰랑찰랑 넘칠 정도로 많이 줘요. 남한은 물을 그렇게 많이 안 줘서 왜 이렇게 물을 조금만 주는지 의아했어요. 나중에 알았는데, 남한은 음식을 남길까 봐 적게 주는 거고 북한은 남기는 법이 없죠.


박소연 :남한은 냉면 먹는 모습도 북한과 달라요. 처음 남한에서 냉면집에 갔다가 깜짝 놀란 게 가위로 면을 잘라서 먹는 거예요. 북한에서는 면을 절대 잘라 먹지 않습니다. 국수를 가위로 잘라먹으면 명이 단축된다고 절대 치아로 끊어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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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연 : 저도 평상시는 안 잘라 먹는데 가끔 눈치 보며 한 번쯤은 잘라 먹습니다. (웃음)

박소연 : 저도 잘 보여야 하는 상대가 앞에 있으면 그렇게 하죠. 이쁘게 먹어야 하니까요. (웃음) 사실 북한의 대표 서민 음식이라고 하면 인조 고기밥과 두부밥이죠.

이 음식들이 남한에 많이 알려지게 된 것은 '이제 만나러 갑니다' 등의 방송 프로그램에서 자주 소개했고 또 통일 관련 행사, 탈북민 행사장에서도 소개했고요. 지금은 남한 사람들도 거의 다 알걸요?


이해연 : 젊은 세대들은 잘 모를 수는 있겠지만, 많이들 아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인조 고기밥이라고 하면 우리야 자주 듣던 거니까 익숙하지만, 남한 사람들은 그 이름 자체가 무섭답니다. (웃음)

박소연 : 인조 고기밥은 북한의 전통 음식이 아니에요. '고난의 행군' 때 나온 서민 음식인데 콩에서 기름을 빼고 남은 찌꺼기로 만들죠. 그걸 반죽해서 인위적으로 만든 대용 고기이죠. 사실 북한에서는 인조고기에 새우를 넣어요. 새우 인조고기는 남자들의 술안주로 그만이고요, 평상시에도 간식처럼 먹으면 속이 든든해요. 남한에 와서도 제일 먹고 싶은 게 새우 인조고기랍니다.

[클로징] 혹시 지금도 북한 시장에서 새우 인조고기 팔고 있나요? 탈북 전날 장마당에 가서 누런 새우 인조고기 1kg를 사서 가위로 자르며 아들 입에 한 개, 제 입에 한 개 넣으며 행복했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비록 가난이 만들어 낸 음식이지만 세상에서 제일 맛있게 먹었으니까요. 남한에도 북한의 인조고기밥처럼 대표적인 길거리 음식이 있는데 바로 순댑니다. 북한에서 비싸서 선 듯 사 먹지 못했던 순대를 남한에 와서 실컷 먹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왜냐고요? 그 얘기는 다음 주에 이어갈게요.

지금까지 탈북 선후배가 나누는 남한 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진행에 박소연, 이해연, 제작에 서울 지국이었습니다.

에디터 이현주, 웹편집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