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함경북도 무산 출신으로 올해 정착 10년 차인 박소연입니다”
“양강도 혜산 출신으로 이제 막 한국에 정착한 이해연입니다”
10년 차이로 남한에 입국한 탈북민 선후배가 전해드리는 남한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박소연 : 저도 남한 방송 프로그램을 보고 알았는데요, 김일성의 어머니가 교회 집사였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증언들이 있더라고요. 그리고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은 기독교 학교인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했고요. 김일성 회고록에도 어머니가 일상이 너무 힘들어서 교회에 쉬려고 나갔다고 써있는데 알고보면 강반석이라는 이름도 교회식 이름입니다.
이해연 : 진짜요?
박소연 : 말하자면 김일성의 뿌리가 교회라는 겁니다. 사실 '당의 유일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보게 되면 기독교에서 나오는 십계명과 비슷해요. 북한 혁명 가요도 들어보면 교회나 성당에서 나오는 노래와 정말 비슷합니다. 교회나 성당에서 가만히 듣고 있으면 우리 북한에 있을 때 귀에 못이 박히게 듣던 노랩니다. 가사만 바꾼 거예요. 김일성이 한때 '종교는 인간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아편'이라고 했죠.
이해연 : 따지고 보면 북한에는 기독교 같은 종교는 없지만, 다른 종교는 있잖아요? 그 종교도 마약과 같은 종교일까요?
박소연 : 마약은 아니고 그 종교는 그냥 천년바위죠. 어떻게도 변하지 않는. 북한에서 80년도 후반에 제작된 '이름 없는 영웅들'이라는 영화가 있어요. 1950년 한국 전쟁을 시대적 배경으로 영화 장면에 크리스마스가 나와요.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을 하고 와인 잔을 쥐고 다니면서 '징글벨'이란 노래를 하는데 그 음악이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애들이랑 그 노래 제목도 모르면서 영화 속 주인공들의 이름을 넣어 '유림이 유림이 잔네트 생일날' 이렇게 개사해서 불렀어요. 어느 날 중학교 선생님이 그 노래를 부르지 말라고 하길래 그때는 미국 노래라서 부르지 말라고 했구나 생각했죠.
이해연 : 크리스마스 얘기를 하다 보니까, 선배님은 노랑 물이 저보다 빨리 드신 것 같아요. (웃음) 저는 어릴 때는 그런 생각을 못 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럴도 모르긴 했지만, 그 노래가 나오는 영화들을 보면 이상하게 느껴졌지 그런 문화를 즐기는 게 좋아 보인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박소연 : '이름 없는 영웅들' 영화는 북한 정찰병과 CIC 장교 김순희의 업적을 보여주는 영화인데, 우리에게는 그 새로운 문화가 더 잘 보였어요. '아니, 전쟁이 한창인데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다니, 미쳤나?'…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볼수록 새롭게 다가왔어요.
이해연 : 남한에서 종교를 믿는 분들은 한 해를 마치면서 그동안 고마운 일들에 대해 예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믿잖아요. 북한에도 그런 사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선물을 받으면 수령님이나 장군님의 은덕이라는 얘기를 하잖아요. 이런 게 같은 이치인 것 같습니다. 북한에서는 수령님께 감사하다, 그분의 은덕이다… 이런 생각을 하잖아요? 그런 면에서 북한의 종교는 조선 노동당이라고 얘기해도 될 것 같습니다.
박소연 :남한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은혜이고, 주님께 모든 걸 의탁하며 주님 안에서 일상을 보낸다고 표현하는데요. 생각해보면 북한에서도 그렇게 표현하잖아요? 그런 북한이 왜 종교를 비방 중상하고 사람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아편이라고 비웃는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보면 북한이 가장 단단한 종교 공화국입니다. 얼마전에 대륙간 탄도 미사일 발사장에 김정은의 딸을 직접 데리고 나온 것을 보면 이것은 종교, 그 중에서도 폭력적이고 무서운 종교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섬뜩했어요.
이해연 : 어린 딸에게 그런 모습을 굳이 보여주는 데는 나름대로 의도하는 바가 있겠죠.
박소연 : 적어도 남한의 종교는 폭력적이진 않아요. 무조건 교회에 오라고 강요하지 않고요. 교회나 성당에 가는 것은 본인의 자유이고 다니다가 시간이 없거나 본인과 안 맞으면 그만두는 것도 자기 자유입니다. 오히려 북한은 정치 조직에 가입하게 되면 임의로 탈퇴할 수 없고 탈퇴하면 법적으로 처벌받죠.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탄압적인 종교라는 생각이 듭니다. 남한 정착 초기에는 이런 부분을 거의 느끼지 못했지만 정착 연도가 늘면서 이제는 우리도 크리스마스를 즐기잖아요? 이런 명절을 북한 사람들은 언제면 즐길 수 있을까, 언제쯤 우리 같이 이렇게 종교에 대해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한숨부터 나와요.
이해연 : 그런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요? 커다란 변화가 있기 전까지 그런 날은 힘들지 않을까요…
박소연 : 작년에 아는 탈북민이 연말에 고향의 가족과 전화 통화가 됐대요. 그래서 크리스마스 날이 돼서 교회 간다고 얘기하니까 가족이 그러더래요. 다른 얘긴 다 해도 좋은데 교회, 종교, 크리스마스 같은 얘기만은 하지 말아 달라고. 지금도 크리스마스란 말은 북한에서는 금지어잖아요. 크리스마스는 남한에 사는 우리에게는 명절이지만 북한 주민들한테는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말인 겁니다.
이해연 :맞죠. 북한은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보잖아요. 저는 성경책이 있다는 사실을 북한에 있을 때 알았어요. 주변에 중국에서 밀수로 성경책을 받은 분이 있었는데 발각이 된 겁니다. 결국 정치적인 문제로 몇 년간 교화소에 갔어요. 그때는 책 하나 때문에 왜 그럴까? 도대체 그게 뭘까? 궁금했고, 저는 당시엔 성경책을 점 보는 책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남한에 와서야 교회와 관련된 책인 것을 알게 됐습니다.
박소연 : 그랬군요. 남한은 교회나 성당 다니시는 분들이 크리스마스 날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마음 놓고 성경책을 옆에 끼고 다니며 볼 수 있지만, 북한에서는 정말 위험한 물건이죠. 사실 크리스마스는 꼭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즐깁니다.
이해연 : 맞아요. 그리고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연달아 있어서 한 해를 보내는 연말의 분위기가 더 흥겹지 않나 싶어요. 꼭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밖에 나가면 예쁘게 꾸며놓은 장식이라든지 캐럴 노래가 나오는 분위기가 일단 좋아요. 누구든 즐겁게 하는 것이면 흔쾌히 받아들이게 되잖아요?
박소연 : 그렇죠. 즐거움이 핵심입니다. (웃음) 크리스마스 전날에는 대형 상점에서 파는 트리나 장식들을 사다가 집에 설치하고 불을 딱 끄면, 거기서 음악이 나오면서 반짝반짝하는 걸 보면서 감탄이 절로 나오잖아요? 남한 정착 첫해에는 '남조선 사람들은 정말 낭비가 심하다. 하루를 즐기겠다고 저 비싼 걸 사나' 그랬는데 하루는 아들이 그러는 거예요. 친구들 집에는 다 있는데 우리 집엔 크리스마스 장식이 없다고… 그다음에 샀어요. 처음에는 큰 트리를 샀는데 지금은 1년 동안 집에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낼 수 있는 방법을 써요. 크리스마스 빨간 양말을 출입문 쪽에다 걸어 놓는다든지… 꼭 크리스마스 날이 아니라도 그날을 떠올려주는 무언가를 보기만해도 즐거운 거예요.
이해연 :저는 매일 보면 크리스마스 의미가 없어질 것 같거든요. (웃음) 그런 의미에서 집에다 트리를 사다 놓지 않았지만 제가 크리스마스트리 있는 곳으로 갑니다! 집에서는 어차피 작은 것밖에 못 보잖아요. 백화점 같은 데 가면 트리를 정말 어마어마하게 크게 멋지게 만들어 놔요.
박소연 : 백화점에서 큰 트리를 만드는 것은 소비 심리를 자극하는 방법이래요. 사람들이 그걸 보러 오잖아요. 기분이 좋아지면 '그래, 오늘은 크리스마스 명절인데 하루쯤은 백화점에서 뭘 하나 사도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서 뭔가를 사게 되는 거죠. 또 크리스마스 명절에는 내년에 대한 기대를 하고 뭔가를 많이 빌게 됩니다. 예전에는 '돈 많이 벌게 해주세요'가 가장 중요한 기도였는데 어느 해부터는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되네요. 해연 씨는 크리스마스 날, 혹시 기도 같은 거 했나요?
이해연 : 북한에서는 그런 기도를 크리스마스 때 하는 게 아니라, 설날 전인 12월 31일 열두 시에 하죠. 그때는 한 해를 감사하게 살아왔다는 인사는 못 했던 것 같습니다. 다가올 한 해에 대해서만 걱정했죠. 다음 해에는 더 부자가 되고 좋은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남한에 와서는 기도가 약간 달라지더라고요. 올 한 해 참 감사하게 잘 지냈고, 다음 해에 나도 또 북한에 있는 가족들도 건강하게 해달라고.
박소연 : 정착 새내기가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저도 정착 초기에는 그랬어요. 지금은 기도해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어요. 남한에서는 어떤 기도를 해도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요. 열심히 살면 돈을 벌 수 있고 운동을 열심히 하면 건강해질 수도 있어요. 그런데 북한에 있는 가족들은 그 안에서 잘 살려고 노력해도 잘 살 수가 없잖아요. 힘들게 살 수밖에 없는 조건이니까. 언젠가부터는 그런 기도를 안 하게 됐습니다. 그냥 남한에서 열심히 돈을 많이 벌어 북한의 가족을 도와주는 게 크리스마스 날의 나의 기도가 돼버린 거예요.
이해연 : 그래도 계속 원하면 언젠가는 이루어지지 않겠냐는 바람으로 기도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뤄지기 힘들지라도 이 방송을 듣고 계실 우리 청취자분들과 북한에 있는 가족들이 새해에도 좀 더 활기차고 건강하고 돈 많이들 벌라고 많이 빌게요.
박소연 : 저도 우리 청취자분들이 내년에는 지금보다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살 수 있게 기도하겠습니다. 부디 저희 기도가 하늘에 닿길 바라며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께요. 해연 씨 수고하셨고요, 함께해 주신 청취자 여러분께도 감사의 인사드립니다. 저희는 다음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박소연, 에디터:이현주,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