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함경북도 무산 출신으로 올해 정착 10년 차인 박소연입니다”
“양강도 혜산 출신으로 이제 막 한국에 정착한 이해연입니다”
10년 차이로 남한에 입국한 탈북민 선후배가 전해드리는 남한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박소연 : 오늘 방송은 남한에서 탈북민들끼리 처음 만날 때 하는 인사로 시작할게요. 해연 씨는 혹시 하나원 졸업이 몇 기예요?
이해연 : 저는 200기 이상인데요. 선배님은요?
박소연 : 와~10년 차이라는 게 금방 드러나네요. 저는 100 몇 기예요.
이해연 : 벌써 백기 이상 차이가 나네요?
박소연 : 그렇죠. 하나원은 남한에 정착한 탈북민이라면 꼭 거쳐야 하는 곳이죠?
이해연 : 사회에 나가서 생활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 예를 들면 지하철 노선을 보는 법, 은행을 이용하는 방법 그리고 북한 법과 많이 다른 남한의 법과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을 배우는 교육기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박소연 : 요즘은 하나원 교육 기간이 3개월이라고 하던데요. 저희 때도 3개월이었어요. 해연 씨는요?
이해연 : 3개월이었어요. 그런데 왜 갑자기 하나원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박소연 : 갑자기 할 때는 다 이유가 있어요. (웃음) 제가 얼마 전에, 그러니까 10년 만에 하나원에 다녀왔어요. 하나원에서 '탈북민 친정집 나들이'라는 행사를 개최했는데, 처음에는 시간도 없는데 거기를 꼭 가야 할까… 생각했는데, 막상 직접 가보니까 출발하기 전 생각하고 너무 다른 거예요.
이해연 : 행사 제목이 '친정집'이라고 했잖아요. 하나원은 탈북민들이 남한에 입국해 제일 처음으로 거치는 곳이잖아요.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로 친정 같은 느낌이네요.
박소연 : 이번 행사에는 전국에 사는 500여 명의 탈북민들이 참가했어요. 부산을 비롯해 제주도에 사는 탈북민들도 행사에 참여하려고 온 거예요. '이 먼 곳까지 왜 오셨냐?'고 물어봤더니 '친정집 나들이'라는 행사 이름을 보고 고민하지 않고 바로 신청했다는 거예요.
이해연 : 갑자기 친정집이란 말에 가슴이 뭉클하네요.
박소연 : 저는 지금도 코허리가 찡해요. 10년 만에 하나원에 갔더니 그동안 많이 변해있는 거예요. 생활관과 강당, 하나둘 학교는 그대로인데 하나둘 학교 옆에 공터가 있던 그곳에 멋진 시설을 갖춘 체육실이 들어서 있더라고요. 그리고 건물 외관이나 환경들도 너무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어요.
이해연 : 저는 새로 마련된 체육관을 보고 나왔는데, 매일 5시 6시면 일어나서 그곳에서 운동도 하고… 체육관 시설이 좋았어요. 혹시 안에 내부를 보셨나요?
박소연 : 10년 전에는 체육관 건물이 따로 있지 않고 강당 지하에 체육실이 있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러닝머신을 봤는데, 스위치를 누르니까 넓은 벨트 같은 게 돌아가는 거예요. 그 위에서 걷거나 뛰면서 너무 신기했고 또 탁구장도 있었어요.
이해연 : 저희 때는 이미 체육관으로 되어 있어서 탁구대에서 탁구도 칠 수 있었고, 이층에 올라가면 배드민턴도 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어요. 또 배구나 농구도 할 수 있을 만큼 공간이 넓어서 운동하면서 좋은 시간을 보냈어요.
박소연 : 해연 씨가 하나원에서의 생활을 정말 즐겁게 얘기하셨는데, 남한에 들어오기 전에 하나원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아셨어요?
이해연 : 북한에 있을 때는 몰랐어요. 가족들이 미리 한국에 와 있어서 중국에서 알게 되었어요. 그때도 상세하게는 몰랐지만, 하나원에서 적어도 3개월 정도 공부를 할 것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어요.
박소연 : 저도 북한을 떠나면서는 몰랐어요. 탈북민들이 제3국을 통해 경유하게 되는 태국 이민국 감호소에서 알게 되었어요. 그곳에서 한두 달 머물면서 남한에 가족이나 친척들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원에서 언어도 배우고, 정착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를 배운다는 정도만 알 수 있었고 구체적으로 뭘 가르쳐 주는지는 정확히 몰랐어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데 남한에 와서 빨간 버스에 타고 처음 하나원으로 들어가는데 눈이 펑펑 내렸어요. 당시에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눈을 치우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하나원에서 생활하는 탈북민 선배들이었어요. 그때 우리를 인솔했던 선생님이 이렇게 눈이 오는 날 하나원에 들어오게 돼서 앞으로 일이 잘될 것 같다. 사회 나가서도 복을 많이 받을 것 같다는 얘기를 해주신 기억이 나네요.
이해연 : 남한에서는 그런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박소연 : 남한에는 이사할 때 눈이 오면 잘 산다. 결혼할 때도 눈이 오면 둘이 백년해로한다고 하더라고요. 이 말은 북한과 같아요. 하나원으로 들어오는 날에 눈이 왔으니 우리는 정말 잘 되겠구나. 남한에서의 생활이 앞으로 탄탄대로라는 위안을 받으며 기쁘게 시작했어요. 그리고 또 좋았던 게 하나원에서는 일을 안 했는데도 돈을 주더라고요. 월급처럼 매달 용돈을 주더라니까요. (웃음) 생활비로 쓰라고 한국 돈으로 4만 원, 그러니까 달러로 35달러를 줬어요.
이해연 : 저희 때는 10년이란 차이가 있어서 그런지 7만 원을 줬는데, 달러로 하면 56달러 정도가 되겠네요.
박소연 : 갑자기 배가 왜 이렇게 아프죠? (웃음) 어쨌든 하나원에서 먹을 거랑 입을 것을 다 주잖아요. 처음에는 한국 돈 4만 원을 받아들고 신기하고 좋았어요. 남한 돈은 북한 돈과 다르게 완전히 새 돈인 데다 빳빳하게 꺾이지도 않아서 돈을 신주 모시듯 했어요. 그리고 하나원 안에 있는 매점에서 강냉이 튀밥, 북한에서 낙지라 하는 오징어, 달달한 커피 등을 파는데 돈을 못 썼어요. 그때 생각에 만 원짜리 한 장이면 사회에 나가서 집 한 채라도 살 수 있을 것처럼 큰돈 같아서 너무 설렜어요.
이해연 : 저도요. 7만 원을 딱 받았는데 그 돈이 너무 커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이 돈이면 중국 돈으로 얼마지? 하면서 막 계산을 해봤어요. 북한에서도 중국 돈을 쓰니까... 바로 중국 돈으로 환산해보니까 엄청 많아서 기뻤어요. 솔직히 매점에 들어가서 쓰려고 맘먹으니까 7만 원을 금방 쓰게 되더라고요. 참 유용하게 라면이랑 뻥튀기랑 사 먹었던 기억이 나네요. 엄청 맛있었어요.
박소연 : 저는 3개월 동안 있으면서 12만 원을 받았는데 그중 8만 원을 가지고 나왔어요.
이해연 : 저도 남겼답니다. (웃음)
박소연 : 해연 씨는 하나원에 처음 들어갔을 때 첫인상이 어떠셨어요?
이해연 : 아늑한 분위기를 풍기는 건물들이 보였어요. 저는 특히 공중전화를 보면서 정말 많은 사람이 이곳을 다녀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리고 여기서 빨리 3개월을 재미있게 보내고 나가야겠다는 생각부터 한 것 같아요.
박소연 : 공중전화 얘기가 나왔는데 밖에 전화박스가 있었잖아요? 교육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면 북한의 배급소처럼 사람들이 줄을 서요. 저는 전화할 데가 없어서 줄을 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웠어요.
이해연 : 저는 다행히 전화할 사람이 있었지만 그 서운함은 알 것 같아요.
박소연 : 그래도 제가 하나원을 퇴소하고 정확히 1년 후에 아들이 하나원에 들어왔어요. 그때는 낮이나 밤이나 아들 전화를 기다렸어요. 그래서 그런지 저에겐 하나원이 좀 더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그런데 해연 씨는 하나원 일과표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던데요?
이해연 : 네, 사회에 나가면 혹시 하나원 일과표를 쓸 일이 있지 않을까? 어떤 것을 배웠다는 것을 이 표가 있으면 그때를 회상할 수 있겠구나 싶어서 시간표를 정리해서 가지고 나왔어요.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언어생활입니다. 하나원에서 특별히 언어생활에 집착했던 이유는 사회에 나가서 남한 사람들과 혹여나 대화가 안 될까 두려움이 있었어요. 그리고 외부 강사님들이 오셔서 대한민국의 경제 이해에 관한 것, 법률에 관한 것 그리고 주말에는 프로그램이 달라지는데 노래와 댄스를 배워주는 수업이 정말 좋았어요. 댄스나 노래 시간에는 무조건 갔을 정도로, 여가 시간을 누워서 보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또 시간이 나면 독서실 가서 책도 읽었는데 사실 제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같은 방의 친구들이 다 책을 읽고 공부하는 열정적인 분위기에 그냥 따라서 했던 것 같아요.
박소연 : 일과표는 10년 전과 거의 비슷한 것 같네요. 분위기에 맞춰서 독서했다는 게 너무 공감돼요. 하나원에서는 생활관에 사람들을 배정하는데 되도록 같은 나이 또래끼리 배정을 해줘요. 예를 들면 20대는 20대끼리. 저는 30대 후반이었으니까 같은 또래의 아줌마들이었을 거잖아요. 대부분 공부를 안 해요.(웃음)
이해연 : 저도 독서실에 가서 김씨 일가에 관한 내용을 읽게 됐어요. 사실 독서실에 오는 탈북민들이 독서를 좋아했을까요? 그보다는 김 씨 일가에 대해서 궁금했을 거예요. 그래서 그런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나이 든 분들이 책을 더 많이 읽으신 것 같습니다.
박소연 : 10년 전 우리 호실에는 고향에 다른 세 명의 탈북민이 함께 생활했어요. 한 분은 회령 출신, 다른 한 분은 평양 출신으로 저녁에 잠이 안 오면 누워서 고향 얘기를 했어요. 북한에서 살 때는 이동의 자유가 없다 보니 겨우 자기 동네나 알았지 타 지역은 잘 모르잖아요. 그런데 하나원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회령에 그런 문화가 있어? 그런 음식이 있어? 평양에서는 그래? 그러면서 하나원에 와서 북한을 더 잘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저는 하나원에 있을 당시 서울대학병원에서 눈 수술을 받는 바람에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3개월을 지냈어요.
이해연 : 그러면 하나원 생활 체험을 별로 못 해봤겠네요?
박소연 : 부족했죠. 가끔 아침체조 시간 때 방장이라는 분이 와서 호실마다 문을 두드리는데, 마치 북한에서 인민반장이 새벽 5시에 문 두드리는 것처럼 그 악몽이 되살아나는데 너무 싫었어요.
이해연 : 저희 때는 안 그랬어요.
박소연 :그래도 요리 수업이나 체육 수업, 그리고 하나원을 퇴소한 탈북민 선배 중에서, 특별히 성공한 분들이 진행하는 강의 시간은 참 좋았어요. 그분들의 삶을 들으면서 성공에 대한 꿈을 키웠어요.
이해연 : 저도 좋았어요. 물론 다 좋았던 건 아니지만 멘토 강의를 듣는 시간은 선택이었어요. 요리하시는 분, 회계 분야에 종사하시는 분, 헤어 디자이너이신 분 등 여러 멘토 강사가 오시는데, 저는 그중에서 회계 쪽이랑 요리 쪽으로 선택해서 들었어요. 강의를 들으면서 사회에 나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되는 데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박소연 : 이렇게 하나원에서 다양한 생활을 경험했잖아요. 그중에서 뭐가 제일 기억에 남으세요?
이해연 : 마지막에 공연이요.
박소연 : 퇴소하는 선배들을 축하하는 후배들의 공연을 말하는 거죠. 해연 씨가 노래를 잘하시나 봐요.?
이해연 : 사실 잘해서 나갔다기보다는 그냥 기쁘게 참여했어요. 보통 젊은 사람들은 다 끌고 나가죠. (웃음)
박소연 : 저는 좀 다른 과목이 기억에 남아요. 하나원에서 제일 많이 참여했던 수업이 심리 상담 수업이었어요…
10년 전 하나원에는 500여 명의 탈북민들로 북적거렸지만 지금은 코로나 장기화와 국경 봉쇄로 남한에 입국하는 탈북민 수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하나원의 빈 공간은 ‘친정집 나들이’ 같은 행사를 비롯한 자격증 관련 교육으로 채워지고 있는데요. 탈북민들의 마음의 고향, 친정집 같은 하나원에서의 좌충우돌 생활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집니다. 함께해 주신 청취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탈북 선후배가 나누는 남한 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차이> 진행에 박소연, 이해연, 제작에 서울 지국이었습니다.
박소연, 에디터 이현주,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