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함경북도 무산 출신으로 올해 정착 10년 차인 박소연입니다”
“양강도 혜산 출신으로 이제 막 한국에 정착한 이해연입니다”
10년 차이로 남한에 입국한 탈북민 선후배가 전해드리는 남한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박소연 : 하나원에서 생활할 때 가장 많이 참가했던 수업이 심리 상담 수업이었어요.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이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여러 가지 그림들을 쭉 나열해 놓고 마음에 드는 그림을 선택하라는 거예요. 우리가 인민학교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렸는데, 수십 년 만에 그런 물음을 다시 받은 거예요. 좋아하는 그림을 선택하니까 선생님이 그 그림을 가지고 제 마음을 읽어주는데 얼마나 딱 들어맞는지 정말 놀랐어요. 그때의 감동이 마음에 위로가 됐어요.
이해연 : 우리 때도 심리상담 수업에 참가하면서 다 울었어요.
박소연 : 탈북할 때도 울지 않았는데 거기서 울었어요. 그동안 꽉 막혔던 마음이 터지는데 선생님이 마음껏 울게 놔두는 거예요. 그러면서 내가 지금 고민하는 게 남겨진 가족에게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정말 따뜻하게 전해주는 거예요. 그때부터 사회에 나가 건강하고 열심히 생활해서 내 자식을 데려오는 게 옳은 길이라는 걸 심리 상담 수업을 통해서 느낀 거예요. 그리고 주말에는 종교 단체들이 들어오는데 각자 선택해서 나갔잖아요.
이해연 : 저는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어요. 솔직히 북한에서는 내가 선택을 할 수 없고 무조건 따라야 하잖아요. 국가에서 지정하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사회에서 살다가 뭔가를 자유롭게 선택해서 갈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어요. 종교 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싶은 사람들은 그냥 숙소에 남아서 TV를 보면서 지낼 수 있었고요.
박소연 : 맞아요. 10년 전에 저도 선택이라는 말에 매력을 느꼈어요. 우린 종교를 잘 몰랐잖아요. 이쯤에서 우리 솔직히 말합시다. 우리가 하나원에서 교회나 성당에 왜 갔습니까? (웃음)
이해연 : 음식 먹으러 갔죠. (웃음)
박소연 : 종교에 참여하면 낙지, 그러니까 마른오징어를 나눠주는 거예요.
이해연 : 우리는 북한에서 종교에 대한 인식이 없었잖아요. 솔직히 처음에는 그곳이 도대체 어떤 곳 일까 좀 많이 궁금하기도 하고, 조금은 무서움도 있었어요. 북한에서 배운 것처럼 종교라는 집단은 들어가서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좀 있었고요. 그런데 천주교도 가보고 기독교도 가봤는데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박소연 : 맞아요. 하나원에서 주중에는 사회생활에 필요한 교육을 받지만, 주말에는 우리가 선택해서 교회나 천주교, 불교에 가는데, 종교에 대해 알아서 간 게 아니었죠. 일단 숙소에서 호실 사람들과 어느 종교에 갈지 모의를 해요. 너는 기독교에 가고 너는 불교에 가라. 나는 천주교에 가볼게... 하면서 결국 각자 흩어져서 그날 받아온 것을 자랑하죠. (웃음) 기독교 갔다 온 사람이 예쁜 십자가 목걸이를걸고 왔어요. 그러면 다음 주에 다들 교회로 가고, 천주교에서 마른오징어 두 마리씩 주더라고 하면 다음 주말엔 다 천주교로 갔어요. 그게 굉장히 즐거웠어요. 우리가 뭘 받아먹는 재미도 있었지만 거기 가면 노래도 부르잖아요? 특히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 아시죠? 그걸 부르며 모두 울었어요.
이해연 : 남한에 오니까 그런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남들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말을 들을 때 그동안 우리는 정말 자신을 전혀 돌보지 않고 살아왔다는 걸 알았습니다.
박소연 : 그래도 하나원에선 3개월이란 시간이 천천히 가죠? 빨리 사회에 나가서 돈을 벌고 싶은 생각이 매일 굴뚝같이 솟아올랐어요.
이해연 : 선배님은 왜 빨리 돈을 벌고 싶으셨어요?
박소연 : 가족을 빨리 데려오고 싶어서요.
이해연 : 역시 가족과 연결이 되어 있네요. 저는 하나원을 나가고 싶었던 이유가 돈을 빨리 벌어야겠다가 첫 번째가 아니라 빨리 나가서 대한민국 사회를 접하고 싶고 경험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간절했던 것 같습니다.
박소연 : 남한 사회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어요?
이해연 : 네, 두려움은 없었어요. 왜냐하면, 여기까지 오는 여정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적어도 나가면 자유롭게 말도 하고, 죽을 일은 없잖아요. 국경을 넘다가 붙잡혀서 북한으로 다시 보내지는 위험도 없고요. 그래서 그런 두려움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오히려 즐거웠던 추억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박소연 : 하나원에서 생활하면서 고마웠던 일들도 분명히 있었을 텐데요…
이해연 : 그때는 당연한 건 줄만 알고 받았던 것들이 많았어요. 북한에서 선생님이라는 칭호는 교육자분들에게만 붙이잖아요. 그런데 남한에서는 교육자도 아닌 우리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더라고요.
박소연 : 맞아요. 하나원 안에 '하나 의원'이라고 있었어요. 조금만 아파도 우리가 거기 가잖아요. 그곳에 가면 의사 선생님들이 '박소연 선생님! 어디 아파서 오셨어요?'… 저랑 같은 동기생 엄마가 있었어요. 60대가 넘었는데 이분이 하나 의원에 다녀오더니 '소연아! 내가 교원 대학도 다니지 않았는데 의사 선생이 나를 보고 선생님이라고 하신다'며 너무 행복해하시는 거예요. 제가 하나원에서 있을 때 119를 타고 병원에 수술하러 간 적이 있어요. 북한으로 말하면 '레루 레루'하는 구급차랑 비슷해요. 남한에서는 수술하려면 우선 MRI라는 것을 찍어야 하고 서울대학 병원은 남한에서 최고의 병원이잖아요. 거기 입원하려면 몇 달 전부터 예약해야 한대요. MRI 비용도 어마어마한데 저희가 탈북민이라고 우선으로, 그것도 공짜로 해줬어요. 제가 정말 고마워하니까 그때 저를 데리고 가셨던 의사 선생님이 나가서 열심히 사는 것으로 보답하면 된다고 하셨는데 저는 그 말이 지금도 남아있어요. 그분이 바라신 것이, 누구를 돈과 같은 물질적으로 도와주라는 의미가 아니라 열심히 살아서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이 되는 것이 갚는 길이라는 거죠. 지금도 저는 그때의 말 한마디가 너무너무 고맙고 잊히지 않아요.
이해연 : 사실 하나원에서 배운 것들이 사회 나와서 정말 많은 도움이 됩니다. 저는 거기서 가르쳐 주는 모든 과목을 열심히 참여했는데요, 사회에 나가서 생활하려면 말도 잘 안 통할 거 같은 두려움이 컸어요. 그래서 대화가 안 되면 어떻게 할까 라는 걱정에 언어 과목을 열심히 했어요. 또 남한은 인터넷이 되는 나라잖아요. 그래서 인터넷 검색하는 방법도 잘 배웠고, 특히 피시방을 매일 갔어요. 그것도 모자라서 아예 피시방 도우미를 했어요. 그 덕분에 마지막까지 마음껏 컴퓨터를 사용했던 기억이 납니다.
박소연 : 해연 씨는 하나원을 퇴소한 지 햇수로 3년밖에 안 되잖아요. 그래서 그때 같이 생활했던 동기들하고 아직 연락하면서 살 것 같아요. 안 그러나요?
이해연 : 사실 지금은 연락을 잘하지 못하고 있어요. 정착 초기에는 서로에 대한 정보를 모르기 때문에 북한식 정보 얻기라고 하죠. 부모들이나 친구들을 통해 서로 주고받는 얘기를 같은 기수들끼리 휴대전화 문자로 소통하느라 바빴어요. 사소한 거라도 여기선 이렇게 하고 저기선 저렇게 한다며 계속 소통하느라 바빴었는데 최근에는 각자 자기 삶의 위치에서 바쁘게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락이 소원해지더라고요.
박소연 : 개인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10년을 살면서 주변에 탈북민들을 보잖아요. 사람마다 다 달라요. 어떤 사람은 하나원을 나오자마자 무리 지어 여기저기 잘 다녀요. 사회 정착금으로 제주도며 부산으로 여행 다니며 소비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더라고요. 그에 반해 해연 씨처럼 사회에 나와서도 묵묵히 자기 개발을 하며 차곡차곡 준비하며 사는 사람들은 비록 화려하지는 않지만, 주춧돌부터 잘 쌓아가다가 결국, 10년~15년이 지나면 자기 궤도에 안착하더라고요. 저도 정착 초기에는 서로 연락을 했었어요. 그러다가 어차피 남한이라는 바다에 뛰어들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남한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게 남한 문화를 빨리 배울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지고, 대신 하는 일에 따라 새로운 지인들이 생기게 되더라고요.
이해연 : 저 역시 여행도 좋아하고 친구들과 함께 노는 것도 좋아해요. 하나원에 있을 때는 나가서 마냥 놀러 다닐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막상 나와 보니 그렇게 안 되더라고요. 일을 시작하면서 시간이 안 되고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서로 연락이 끊어지게 되더라고요.
박소연 : 그리고 이번에 제가 10년 만에 행사에 참여하느라 하나원을 다녀왔잖아요. 정착한 지 15년 정도된 분이 가방을 메고 '만남의 장소'에 딱 들어왔는데 때마침 입구에 앉아있는 동기생을 만났어요. '야~은숙아!'라며 북한말이 스스럼없이 나오면서 둘이 반가워서 부둥켜안고 막 우는 거예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하나원에 있을 때는 둘이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대요. 또 하나원에 있을 때는 서로 말도 못 걸었던 동기생들이 칠판에다가 '나는 110기인데 아무개야! 보고 싶다. 이 쪽지를 보거들랑 꼭 전화해라'라고 쪽지를 붙여 놨는데, 그걸 보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우리가 하나원이라는 작은 공간에 있을 때는 서로가 잘났다고 옳다며 다퉜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고 다시 보니까 그때 일들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래서 가끔은 다시 하나원에 모여서 그때 우리가 왜 그랬을까? 하며 서로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얘기할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해연 : 저는 굳이 하나원에 간절하게 가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나중에는 가보고 싶어요. 그래서 식당 이모들이 해주던 맛있는 밥과 매일 바뀌는 식사 메뉴를 확인하며 그날 음식을 기대했던 것, 마치 엄마가 해주는 밥처럼 따뜻하게 느껴졌던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요. 행사에 참여하고 마음껏 뛰놀았던 강당이나 체육관을 돌아보며 지난날을 추억하면 좋을 것 같아요.
박소연 : 해연 씨도 하나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퇴소 후의 삶을 그려봤을 거잖아요. 그때 하나원에서 꾸었던 꿈이 지금은 어느 정도 실현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이해연 : 100% 실현했다고는 할 수 없는데요.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서 어느 정도는 꿈을 이루며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자격증을 제법 여러 개 취득했고, 직장생활도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소연 : 저도 10년이 지나고 생각해 보니까, 하나원에서 지낼 때는 세상을 다 알지 못했잖아요. 그런데도 그곳에서 세웠던 목표들은 다 이룬 것 같아요. 자식 데려오는 거, 그리고 안정된 월급을 받아서 한 달에 400달러에서 500달러 정도를 은행에다 적금하는 것들이었는데 실천했어요. 지금 나의 삶의 초점은 돈에 맞춰지지 않아요. 그 대신 인생을 얼마나 즐기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를 자문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해연 : 저도 선배님처럼 10년 뒤에는 어느 정도 성장해, 생각했던 꿈들 다 이뤘나 돌아보고 싶네요.
박소연 : 사실 이번 방송에서 하나원의 생활을 추억할 수 있었던 것도 '친정집 나들이'라는 행사에 참여하면서 감동받고 시작한 거잖아요.
이해연 : 정말 '친정집'이란 말이 너무 마음에 와닿았어요. 어쩌면 이 행사를 기획한 분들이 '친정집'이란 말을 생각해 냈을까요? 우리의 마음을 알아준 것이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박소연 : 맞아요. 친정집은 그냥 친정엄마가 사는 집이잖아요. 다음에는 하나원 친정집이 아니라 고향 친정집에서 하나원 생활을 추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저희 방송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청취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해연 씨도 수고하셨어요.
이해연 : 네.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탈북 선후배가 나누는 남한 정착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진행에 박소연, 이해연, 제작에 서울 지국이었습니다.
박소연, 에디터:이현주,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