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10년 차이] 봄이다, 뱃속이 짜지겠네!

평양에 봄꽃이 만개한 가운데 마스크를 낀 남성이 지인으로 보이는 여성을 스마트폰 카메라로 촬영해주고 있다.
평양에 봄꽃이 만개한 가운데 마스크를 낀 남성이 지인으로 보이는 여성을 스마트폰 카메라로 촬영해주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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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함경북도 무산 출신으로 올해 정착 10년 차인 박소연입니다”

“양강도 혜산 출신으로 이제 막 한국에 정착한 이해연입니다”

10년 차이로 남한에 입국한 탈북민 선후배가 전해드리는 남한 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이해연 : 북한은 사계절이 다 바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난가을에 김장 얘기를 하면서 그때도 바쁘다고 그랬는데 봄 얘기를 하면서도 새삼 많은 일들을 했다는 걸 알게 되네요.

박소연 : 그러면서 우리가 남한에서 1년 365일 편하게 살아도 되나 반성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해연 : 맞아요. 북한에서는 봄철 동원에 주로 주민들과 중·고등학생, 대학생들이 많이 동원됐어요. 공부에 집중해야 하는 대학생도 오전에는 공부, 오후에는 무조건 작업이잖아요?

박소연 : 제가 인민학교 다닐 때가 80년대 후반이었어요. 그때도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는 석탄 운반 작업을 했어요. 학교에 석탄 차가 도착하면 50명이 줄을 서서 석탄을 날라 창고까지 넣었어요. 그래서 항상 가방에는 작업 바지가 있었어요. 인민학교 때부터 작업에 동원되다가 다행히 제1고등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성악 소조에 다닌 덕분에 동원을 면할 수 있었어요. 성악 소조는 노래나 화술 연습을 하다 보니 오후 작업에 동원이 되지 않습니다. 그 후에 전문학교에 입학해서 다시 작업에 동원됐어요. 아침에는 무조건 책가방에 작업복 바지를 챙겼어요. 그런데 남한에 와서 올해 3월, 아들이 대학에 입학했는데 제가 개학 첫날 깜짝 놀랐어요. 가방에 노트북 하나가 전부이더라고요!

이해연 : 작업 바지, 필요 없어요?

박소연 : 그냥 입은 바지면 됩니다. 작업 바지 필요 없어요. (웃음) 학습장과 만년필도 전혀 필요 없고요. 노트북에 교수님 강의를 메모해서 파일에 저장하면 그게 학습장이 되고 만년필이 되는 거예요. 이렇게 학교 가는 아들을 보면서 또 옛날이 생각나더라고요.

이해연 : 그러게요… 북한 주민들도 시키는 일이니까 마지못해 하면서 뒤에서 꼭 하는 말이 있어요. 주민들을 괴롭히지 않으면 딴 생각을 하니까 이렇게 괴롭히는 게 아닌가 하는…

박소연 : 하지만 북한 주민들도 다 의식이 있으니까 굳이 이렇게 들볶지 않으면 좋겠어요. 국가에서 쌀 배급과 월급을 안 줘도 좋으니까 제발 마음 놓고 장사를 할 수 있게 놔두면 되는데, 봄뿐이 아니죠. 사계절을 이렇게 들볶아 대니까 정말 힘들다고, 우리 10년 전에도 그 얘기를 했어요. 하지만 북한에 살면서는 당국이 들볶아 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냥 전체주의 나라니까 우리는 당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불만은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서 깊이 분석하고 생각해보진 않았어요.

이해연 : 지금은 북한 여성분들이 강해져서 그런 상황에 반박합니다. 장사하는데 동원을 나오라고 하면 '나라에서 준 것도 없으면서 뭘 자꾸 일만 시키냐?'고 대드는 분들도 있어요.

박소연 : 앞에서 대놓고 얘기하는 거예요?

이해연 : 상황이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죠. 지금은 안전원이 나와서 단속하면 장마당 사람들이 '나에게 돈이나 배급을 주면 불법을 저지를 일이 없을 것 아니냐'고 오히려 따져요. 안전원들도 주민들의 상황을 다 알아요. 알면서도 윗사람이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죠.

박소연 :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에 살 때 계절마다 국가에서 노동 동원한다고 말하면 꼭 그런 질문을 해요. '돈도 안 받고요?'... 돈을 받지 않고 일한다고 하면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왜 하세요?' 그럽니다. 그 상황이 되면 제가 머리가 나쁜 사람이 아닌데도 갑자기 말문이 콱 막힌다니까요.

이해연 : 남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일을 했는데 왜 돈을 안 주지?, 이해가 안 되죠.

박소연 : 이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줘야 할지 난감해요. 그러고 나서 겨우 한다는 말이 '북한에 가서 한 달만 살아 보시오. 그러면 답이 나올 겁니다'라는 말밖에 못 해요. 그런 노동동원이 당연하다는 설명이 아니라 그렇게 안 하면 그 제도에서 법적 처벌을 받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코 꿴 송아지처럼 살 수밖에 없다는 뜻이죠. 어쨌든 남한에 와서 북한 얘기를 하다 보면 '왜 그렇게 바보처럼 살았을까'하는 생각에 속이 끓어요.

이해연 : 하지만 그것도 남한에 왔으니까 끓는 거죠.

박소연 : 맞아요. 저도 10년 전에 안전원과 한 판 붙었댔어요. 아파트 아래에 장작을 팔고 있으니까, 안전원이 와서 그걸 다시 차에다 싣고 시장에 가서 팔래요. 이미 16입방이나 되는 화목을 아파트 아래에 부렸는데... 저도 만만치 않았어요. '이보세요, 이렇게 해서라도 붉은 기를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삿대질하고 막 싸웠단 말에요. 다음날에 분주소(파출소)로 불려가 욕먹었잖아요. 결국, 분주소 비서에게 담배 한 막대기 뇌물로 주고 왔어요. (웃음)

이해연 : 사실 사람들 대부분은 돈이 없어서 그렇게 잘 나서지도 못해요.

박소연 : 10년 전에 딱 한번 울분을 토해 본 거예요. 결국은 내 돈만 나갔죠. 그렇게 울분을 토해도 지금의 북한 여성들처럼 당당하지 못했거든요. 어쩌다 한 번 그냥 꿈틀거린 거죠. 그런데 지금은 여성들이 항의도 한다니 너무 좋네요! 정말 반가워요.

이해연 : 그런 광경을 보면 속이 다 시원해요. 잘한다! 잘한다! 이러죠. (웃음)

박소연 : 그래도 안 변한 게 있는 것 같습니다. 해마다 봄이 오면 다가올 보릿고개를 어떻게 넘길까 걱정하는 거요. 저는 10년 전에 그게 늘 걱정이었어요. 사실 보릿고개는 도시보다는 농촌에서 많이 느끼는 것 같아요. 농촌에서 가을에 거둬들였던 쌀을 겨우내 먹고 3월쯤에 식량이 떨어지기 때문에 농촌에 사시는 분들이 제일 힘든 것 같아요. 도시 사람들은 어떻게든 사계절에 상관없이 매일 장사해서 때대기로 살지만, 농촌 사람들은 전적으로 농사에 의존해서 살아야 하니까요.

이해연 : 계절마다 물가 변동이 좀 있긴 하잖아요. 가을이면 쌀값이 조금 내린다거나, 그런 차이가 있을 뿐이지만 농촌은 보릿고개 때면 진짜 더 어렵죠.

박소연 : 북한에서 살 때 가을에 김장이 끝나면 두 번째로 하는 일이 염장이었어요. 염장은 봄을 준비하기 위한 일이었어요. 양강도나 함경도 같은 지역은 해발이 높아서 4월 말이나 5월에도 서리가 내려서 봄나물을 먹기 힘들어요. 4월 봄부터는 북한 시장에 염장(소금 절임) 매장이 붐비기 시작해요. 고추나 오이 절인 것들이 정말 많이 나와요. 그러면 농담으로 그런 얘기를 해요. '야, 또 뱃속이 짭짤해지겠구나'... 염장 반찬만 먹어서 내장이 짜진다는 거죠. 그래도 봄에 시장에서 풍기는 염장 냄새가 좋았습니다.

이해연 : 봄에는 염장 반찬이 다른 반찬보다 훨씬 더 맛있는 거 같아요.

박소연 : 너무 맛있죠. 특히 염장 무가 있잖아요. 북한 염장 무는 통무입니다. 그리고 약간 노리끼리하죠. 남한에 와서, 한번은 봄에 시장에 갔는데 염장 무가 있는 거예요. 북한 표현대로라면 애기 머리만 한 무였는데 혹시나 해서 사서 먹어봤는데 완전히 실망했어요. 북한에서 먹던 맛이 하나도 안 나는 거예요.

이해연 : 그 맛이 안 나죠. (웃음) 사실 저도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직접 찾아서 사러 다니지는 않았습니다.

박소연: 저는 북한에서 오래 산 세월만큼이나 북한 음식에 대한 향수가 더 많은 것 같네요. 그래서 서울이나 도시에 살던 탈북민들 대부분이 나이가 들면 농촌으로 귀촌하더라고요. 남한 사람들은 귀촌할 때 가능하면 마을 근처, 병원이 가까운 데 집을 구하려고 하는데요. 탈북민들은 사람하고 멀리 떨어진 데 살려고 해요. 제가 얼마 전에 시골에서 만난 탈북민은요, 처음에 무슨 산속의 궁전을 찾아가는 줄 알았어요. 한참을 빙 돌았더니 그제야 산속에 집이 하나 있는 거예요.

이해연 : 사면이 다 산으로 덮인, 그런 데서 살다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박소연 : 그분이 저에게 김치움도 보여주는 거예요. 남한에 와서 김치냉장고에 염장무를 넣었는데 고향에서의 맛이 안 나더래요. 강원도 와서 땅을 좀 깊이 파고 거기에다 컨테이너라고 집처럼 만든 철제함을 넣고 김치움을 꾸렸답니다. 그리고 염장 무를 담갔더니 비로소 고향 맛이 나더래요. 산속에 집을 선택한 이유가 북한에서 우리가 맛보던 음식 맛을 마음 놓고 맛보고 느끼고 싶어서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이해연 : 어렸을 때보다 나이가 드시면 옛날 생각이 많이 난다고 다들 말씀하시던데… 저는 아직 그런 그리움은 많지 않아요.

박소연 : 해연 씨는 젊으니까… 저는 항상 봄이면 엄마가 도시락을 싸줬는데요. 제가 달래와 냉이를 얼마나 잘 캤는지, 도시락을 다 먹고 빈 도시락통에다 냉이하고 달래를 가득 채워서 집에 왔었네요.

이해연 : 저도요!

박소연 : 친구들과 같이 뒷산에 가도 제 보자기만 불룩했어요. 냉이에 고추장을 풀어서 장국을 끓이면 아버지가 너무 행복해했어요. 마치 봄을 먹는 것 같다고. 항상 봄이면 달래나 냉이를 캐러 갔는데 남조선에 오니까 캐러 갈 시간도 없고, 설사 있다고 해도 밭이 다 개인 것이랍니다. 그래서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괜히 캐러 들어갔다가 벌금이라도 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엄두를 못 내고 있어요.

이해연 : 아마 벌금이 더 비쌀걸요. (웃음)

박소연 : 맞아요. 남한도 나쁜 게 있다니까요. 마침내 찾아냈어요. (웃음) 북한은 아무 곳에서나 캐면 되잖아요. 남한은 떨어진 열매도 주인 허락 없이는 주우면 안 된답니다.

이해연 : 저도 봄이면 산에 가서 냉이도 캐고 그랬어요. 새싹처럼 새로 난 풀을 먹어야 건강하다는 말이 있어서 매번 나물을 캐러 갔었던 기억이 납니다. 국거리는 제 담당이었거든요.

박소연 : 그러니까요. 제가 엊그제 시장에 다녀왔는데, 할머니들이 조그만 광주리 안에 냉이를 담아서 한 광주리에 3,000원을 받더라고요. 북한 돈으로 치면 한 2만원 정도로 쌀 2~3킬로그램은 살 수 있는 돈이죠. 마침 할머니가 길옆에서 팔고 계셨는데도 경찰이 단속을 안 하더라고요. 시장 들어가는 입구인데 괜찮은가 봐요. 북한 같으면 길옆에서 산나물을 팔면 단속 안전원이 호각 불고 난리잖아요.

이해연 : 북한은 길옆에서 장사하면 단속을 많이 하죠.

박소연 : 얼마 전 아는 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봄이니까 개구리로 만든 보약을 사서 먹으라고 하시더라고요. 개구리는 산과 들에서 자라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남한은 개구리를 개인이 양식을 한답니다. 양식을 해서 건강식으로 봄에 파는 거예요. 그 얘기를 들으니까 북한 생각이 또 나더라고요. 북한에서는 봄이면 개구리 잡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요. 주변에서 개구리 잡으면 농사 망친다고 야단치잖아요. 예전에는 북한에서 봄에 농촌 동원 나가면 개구리 울음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잤어요. 지금은 개구리가 줄어들면서 울음소리 듣기가 정말 어렵죠?

이해연 : 맞아요. 환경이 해마다 달라지는 것 같아요. 북한에서는 개구리 소리 듣기가 점점 힘들죠.

박소연 : 모든 것이 풍족하지 못하니까 사람들은 이렇게 하는 게 오히려 더 못 사는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먹을 게 워낙 없으니까 계속 잡는 거죠. 가슴이 아프네요.

이해연 :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죠. 남한의 봄은 파릇파릇한 색으로 새로움을 알리는 설레는 봄이지만, 북한은 봄이 고난의 시작이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봄임에도 불구하고, 남한에 와서 코로나 풀린 이후 처음 맞은 봄인 만큼 저도 올해는 봄을 느껴볼까 합니다. 올해는 예쁜 꽃 보러 축제도 가고 싶어요.

박소연 : 저도 올해 봄에는 섬으로 가고 싶어요. 제주도에서 유채꽃 축제가 열린다고 해요. 혹시 가게 되면 예쁜 꽃 사진 많이 찍어와서 여러분께도 봄 소식 전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해 주신 청취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해연 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해연 : 감사합니다.

박소연 : 지금까지 탈북 선후배가 나누는 남한 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진행에 박소연, 이해연, 제작에 서울 지국이었습니다.

박소연, 에디터 이현주,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