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함경북도 무산 출신으로 올해 정착 10년 차인 박소연입니다”
“양강도 혜산 출신으로 이제 막 한국에 정착한 이해연입니다”
10년 차이로 남한에 입국한 탈북민 선후배가 전해드리는 남한 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이해연 : 어릴 때 선배님이 말했던 노래집을 저도 두 개나 갖고 있었어요. 하나는 북한 노래, 다른 하나는 남한 노래집이었어요.
박소연 : 남한 노래 수첩도 있었어요? 우리 때는 없었어요. 발견되면 큰일 나죠!
이해연 : 저희 때는 있었어요. 좋아하는 남한 노래 가사를 노래집에 적고 가사를 전부 외웠어요.
시험 기간이었는데도 시험 문제는 머릿속에 안 들어오는데 남한 노래는 왜 그렇게 잘 들어와요. 좋아하는 노래 가사를 아예 외워버리려고 그렇게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가사를 다 외우면 노래집에서 남한 가사가 적힌 종이를 찢어서 버렸어요. 공부를 그 정도로 했으면 정말... (웃음)
박소연 : 김대 갔죠!(웃음). 1990년대~2000년대 북한에서 들었던 남한 음악들은 이미 남한에서60~80년대에 나온 노래였어요. 거의 20년 전에 나온 남한 음악인데도 촌스럽지 않고 황홀했죠. 그런데 지금 북한 세대는 최신 남한 음악을 듣는데도 거의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해연 : 한국 분들도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옛날부터 들으면서 최근엔 힙합이나 랩 음악을 좋아하게 된 것처럼, 북한 주민들도 오랫동안 남한 음악을 계속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음악도 포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박소연 : 그렇죠. 30년 넘게 지속적으로 남한 음악이 북한으로 들어가면서 북한 주민들에게도 문화가 누적이 된 것 같습니다. 그 과정을 거쳐 남한 음악들을 거부감 없이 잘 받아들인 것 같은데요… 왜 우리는 그렇게 남한 음악을 좋아했을까요?
이해연 : 노래 가사를 들어보면 내용이 진실해요. 북한 노래는 사상이 들어가서 딱딱한 느낌이 있는데, 남한 노래는 연인 사이의 사랑 문제도 마치 대화하듯이 진솔하게 표현하니까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북한에도 연인들이 연애하다가 헤어지는 경우가 있지만 이별의 아픔을 딱히 위로받을 곳이 없어요. 남자들 같은 경우에는 술을 마시는데… 실연에 슬퍼서 술 마시며 혁명적인 노래를 부를 수는 없잖아요.(웃음)
박소연 : 정말 맞는 말입니다. 저도 10년 전에 그랬어요. 남한 음악들을 들어보면, 이별을 당했을 때는 위로하고, 기쁠 때는 함께 기뻐하고… 그 마음들이 다 가사 속에 있어서 위로됐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남한 음악을 그렇게 좋아했어요. 그리고 해연 씨, 저는 남한에 와서 또 깜짝 놀랐던 일이 있었어요. 글쎄, 남한은 북한 노래를 불러도 안 잡아가더라고요! 한번은 유명한 가수가 KBS TV가요 무대에서 '심장에 남는 사람'이라는 북한 노래를 부르는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가수가 '오랜 세월을~' 하고 노래를 시작하는데 관중들이 박수를 치는 거예요. 순간 제 눈과 귀를 의심했어요. 이럴 수가 있나? 정말 남한은 모든 게 북한하고 너무 다르구나… 생각했습니다.
이해연 : 정말 다른 세상이죠…
박소연 : 그런데 해연 씨, 남한에 와서는 음악을 어떻게 듣고 있어요? 우리는 북한에서 CD 알이나 USB 이런 걸로 들었잖아요.
이해연 : 저는 핸드폰, 타치폰으로 많이 들어요. 남한에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앱들이 엄청 많아요. 지니 뮤직, 멜론 등 종류가 너무 많아서 취향에 맞게 골라서 듣습니다.
박소연 :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돈을 내고 들으시는 거죠?
이해연 : 그렇습니다. 한 달에 남한 돈으로 만 원 정도의 구독료를 냅니다. 달러로 계산하면 10달러 정도죠. 하지만 요즘은 유튜브에 노래들을 정리해서 올려주시는 분들이 많아요.
박소연 : 맞아요. 세 시간 혹은 네 시간 동안 연속 나오는 노래도 있고, 봄에 듣기 좋은 노래, 여름에 듣기 좋은 노래도 있어요.
이해연 : 예전에는 저도 유튜브에서 들었지만 지금은 음악뿐 아니라 다른 영상들도 보기 때문에 기꺼이 구독료를 내고 듣습니다.
박소연 : 해연 씨와 저의 차이점을 찾았네요. 저는 구독료는 절대 안 냅니다. (웃음) 요즘은 집마다 인터넷을 쓰잖아요. 통신사에서 인터넷을 설치해 주면 '짱구'라고 부르는 AI 기계가 공짜로 따라 나와요. 심심하면 소파에 누워서 '짱구야, 보고 싶다 노래 틀어줘'라고 말하면 노래가 나와요.
또 집에 스피커가 있는데 선으로 핸드폰을 연결해서 음악을 들을 때도 있어요.
이해연 : 핸드폰랑 스피커 연결할 때 선이 없이 블루투스로 해도 돼요!
박소연: 에이, 스피커를 통해서 듣는 특별한 감수성이 있잖아요. (웃음) 집에서 운동하고 싶을 때도 그냥 하지 않고 흥겨운 트로트 음악을 틀어놓고 박자에 맞춰 5분에서 10분 정도 즐겁게 운동하죠. 아… 정말 음악이 우리 생활에 얼마나 깊이 들어와 있는지 말하면서 새삼 느끼고 있네요.
이해연 : 조금 전에 선배님이 운동하실 때 신나는 트로트 노래를 듣는다고 하셨잖아요.
박소연 : 그렇죠. 남한 트로트는 4분의 3박자로, 쿵 작작 쿵 작 북한에 있을 때 제일 많이 들었던 음악이라 남한에서도 자주 듣는 것 같습니다. 해연 씨는 어때요? 트로트 들어요?
이해연 : 지금은 트로트를 아예 안 듣습니다. (웃음)
박소연 : 요즘 남한에서는 트로트가 다시 인기입니다. 몇 년 전부터 TV를 틀면 여기저기 채널에서 동시에 트로트 경연을 하는 거예요. 트로트가 사실 옛날 노래지만 요즘 젊은이들이 현시대에 맞게 트로트 노래도 너무 잘해요. 지어 우승자들이 경연이 끝나면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 하는 공연까지 다 챙겨보고 있어요. 정말 트로트는 삶에서 지울 수 없는 음악이구나 싶어서 즐겁게 듣고 있습니다.
이해연 : 저도 북한에 있을 때 장윤정 가수 노래가 너무 좋아서, 남한에 가면 장윤정 가수의 공연을 꼭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정작 남한에 오니까 트로트 공연이 다 뭐예요? 지금은 아예 관심이 없네요. 북한에서 들었던 남조선 노래는 너무 오래전에 나온 음악이라 지금 남한에선 부르는 사람이 많이 없어요. 점점 취향이 바뀌더라고요. 지금은 발라드를 좋아하면서 점점 멀어지게 된 것 같습니다.
박소연 : 음악에 대한 취향은 계속 변하는 것 같아요. 저는 최근에 찬송가에 빠졌어요. 종교적인 노래, 특히 천주교나 기독교에서 부르는 노래들인데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와 '은혜'란 노래를 자주 들어요. 북한에 있을 때는 기독교와 관련된 노래면 다 나쁘다고 생각했어요.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느님을 믿는 종교는 아편이라면서 거부감이 컸었는데,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를 들어보면 북한의 선전과는 달랐어요.
이해연 : 저도 그 노래 알죠. 가사도 너무 좋아요.
박소연 : 듣고 울지 않았어요?
이해연 : 울지는 않았는데요…
박소연 : 탈북민들이 남한에 입국하면 초기에 합동 숙소에서 머물러요. 숙소에서 이 노래를 들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우리가 새 삶을 찾으려고 오는 여정이 너무 힘들었잖아요. 그런 우리에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어요. 너희는 사랑을 받기 위해서 그 멀고 어려운 길을 왔다… 주로 나이 많은 사람들이 많이 울었던 것 같네요. 해연 씨 또래의 젊은 애들은 그냥 가만히 있더라고요.
이해연 : 남한에 와서 음악을 들으면서 좋은 게 정말 다양하다는 점입니다. 신나는 노래, 조용한 노래 등 종류별로 많다 보니 기분이 안 좋고 우울하다 싶을 때는 신나는 노래를 들어요. 음악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고, 음악이 일상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박소연 : 북한에서 우리가 얼마나 힘들었어요? 해연 씨는 부모의 우산 밑에서 살았지만, 저는 30대 초반부터 두 아이를 혼자서 먹여 살리느라 새벽 5시에 아이들을 집에 가두고 배낭을 메고 장사를 나갔어요. 그때는 어린아이들을 빈집에 놔두고 가는 엄마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게 아무도 없었네요. 그 마음을 위로한 노래 한 가락이 없었어요. 지금은 여기 와서 그런 날들을 옛말처럼 말할 수 있지만, 지금도 북한에는 수많은 박소연들이 아무런 위로도 받지 못하고 힘들게 살고 있을 겁니다.
이해연 : 그 마음을 계속 쌓아두고 살다 보니 마음속에 응어리가 쌓여요. 그러다가 한 번 폭발하면 난리 나잖아요. 그래서 북한 사람들의 성격이 많이 거칠어진 것 같습니다.
박소연 : 맞아요. 그런 부분이 확실히 있습니다. 남한에 와서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가 '탈북민들은 어쩜 그렇게 노래를 잘하세요?'입니다. 그때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폭발할 데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대답합니다. 북한은 6톤급 화물차 꼭대기에 장사 짐을 멘 아줌마들이 앉아요. 차가 흔들릴 때 그 꼭대기에서 얼마나 무서워요. 남한에서는 화물차 꼭대기에 사람이 타면 법적으로 큰일 납니다. 그런데 북한은 그게 일상이죠. 북한은 분노를 표출할 게 노래밖에 없어요. 아줌마들이 화물차 위에서 뭉쳐서 '인생에 머나 먼 길'하고 소리치면서 노래를 불렀어요.
이해연 : 아~ 그 노래 생각나요.
박소연 : 그래서 탈북민들이 대부분 노래를 잘해요. 약간 북한식 창법이긴 하지만 어쨌든 남한 분들은 탈북민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 깜짝깜짝 놀래요.
인생의 머나먼 길 다 같이 함께 걸으며
사나운 비바람 이겨내는 다정한 길동무 되리
그 길에는 행복도 있고 슬픔도 있어
이겨내리 견뎌내리 인생의 모든 풍파를
우리가 그 시절 화물차 꼭대기에 불렀던 출처도 제목도 모르는 노래 가사입니다.
아직도 이 노래 부르는지 모르겠네요.
힘든 시절, 아픔을 달래는 노래보다 기쁘고 신나고 행복할 때 부르는 노래가 더 어울리는 시절을 살아갈 때가 분명 있을 겁니다.
그때를 위해 신나는 트로트 한 곡쯤 연습해 놓고 있겠습니다.
음악 얘기는 참 끝이 없네요. 남은 얘기는 다음시간에 이어갈께요.
지금까지 탈북 선후배가 나누는 남한 정착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진행에 박소연, 이해연, 제작에 서울 지국이었습니다.
박소연, 에디터 이현주,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