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10년 차이] 초상화와 웨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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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10년 차이로 남한에 입국한 선후배가 전해드리는 남한 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저는 함경북도 무산 출신으로 올해 정착 10년 차 박소연이고요, 양강도 혜산 출신으로 이제 막 한국에 정착한 이해연 씨와 함께합니다.

INS : <우리는 10년 차이>, 초상화와 웨딩사진

박소연 : 해연 씨, 안녕하세요?

이해연 : 안녕하세요.

박소연 : 날씨가 아직 쌀쌀해도 3월, 봄입니다.

이해연 : 그렇죠. 봄이 오니까 왜 이렇게 결혼식 하는 분들이 많아요? 제 주변에도 다음 주에 결혼하는 친구가 있어요.

박소연 : 한국에 온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벌써 결혼식을 한다고요? 급했구먼… (웃음)

이해연 : 아, 그 친구는 온 지 좀 됐어요. 그런데 저는 한국에 와서 결혼식에 아직 한 번도 못 가봤거든요. 옷을 어떻게 입고 가야 할지 축의금은 또 얼마나 해야 하는지 걱정이에요.

박소연 : 조언을 드리자면 신부가 결혼식 날에 하얀 드레스를 입잖아요? 하객이 신부와 같은 하얀 옷을 입고 가면 눈치가 없는 손님이래요. 신부랑 똑같은 하얀색만 피하면 돼요. 그리고 축의금은 얼마라고 정해주지 못하겠어요. 한국 돈으로 기본적으로 5만 원 정도는 아는데요. 이 친구가 정말 딱 친구라고 하면 본인이 알아서 10만 원 이상도 합니다. 미화로는 50달러에서 100달러 정도되는 거죠. 부조는 하얀 봉투에다 넣어서 주는 거예요. 북한처럼 돈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 '자, 받소' 하고 주는 건 아니에요. (웃음)

이해연 : 아, 그럼 봉투를 준비해야 되네요?

박소연 : 식장에 가면 봉투가 있어요. 저는 100달러를 부조하면 봉투 정가운데 내 이름을 크게 쓰고 5만 원하면 한쪽 구석에 씁니다. (웃음) 부조 많이 하고 결혼식장에 들어가면 엄청 뿌듯하더라고요.

이해연 : 5만 원에서 10만 원이군요. 저는 솔직히 그 이상 할 줄 알았거든요.

북한에서도 간소화 , 실용화되는 결혼 문화

10년 전 북한엔 없었지만 지금은 있는 것….결혼반지와 웨딩 촬영

이해연 : 그럼 여기서는 예단 같은 거는 어떻게 해요?

박소연 : 남한에는 옷감 보내고 하는 건 없어요. 보통 신랑신부가 금은방에 가서 반지를 맞춰요. 금반지나 다이아몬드 반지를 맞추는 것이 필수더라고요. 여기는 예단을 주로 돈으로 하는 것 같은데요. 신부 측에서 신랑 측에 주게 되면, 신랑 측에서도 신부 측에 보내는 방식이었는데 최근에는 예단비를 합쳐서 전셋집을 마련하거나 신혼집을 사는데 보탠다든가 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젊은이들이 많더라고요.

이해연 : 저도 결혼을 한다면 그런 방식을 선택할 것 같아요. 필요 없는 지출을 줄여서 차라리 자기 집을 마련하는 게 더 실용적인 것 같아요.

박소연 : 북한은 요즘 어떤가요? 우리 때는 신부가 첫날에 입을 수 있는 속내의, 화장품, 양복지, 첫날 옷감… 이 모든 것을 합해 예단이라고 했는데요.

이해연 : 지금도 그렇게 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바뀐 게 있다면, 여자분한테 돈을 줘요. 그러면 신부가 알아서 필요한 것을 사는 거죠. 이제는 북한도 간단하고 실용성 있는 문화로 바뀌고 있어요.

박소연 : 요즘은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해서 예단을 주는 거잖아요? 저희 때는 돈을 주는 문화는 거의 없었고요. 그나마 시계를 주는 집들은 정말 잘 사는 간부들이었어요.

이해연 : 지금은 결혼식에서 시계나 반지를 주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어요.

박소연 : 예단으로 반지를 줘요??? 저희 때는 반지 사촌도 구경하지 못했어요.

이해연 : 진짜요? 반지 없이 어떻게 결혼식을 해요?

박소연 : 저희 때는 반지를 준다는 문화 자체가 없었고 반지를 끼고 있는 사람도 별로 없었어요.

이해연 : 지금은 결혼반지가 있어야 영상을 촬영할 수 있어요. 신랑, 신부가 사과나무 앞에서 사과도 따주고 서로 먹여주고 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요. 한 편의 영화처럼 촬영하는데 너무 좋아요.

박소연 : 세상에, 세상에… 저희 때에는 동영상은 생각도 못 했고요. 대부분 흑백사진을 찍고 잘 사는 집들이나 컬러사진을 찍었어요. 중요한 건 결혼식 날 무조건 기념탑에 가서 장군님 동상에 머리 숙여 인사를 해야 하고, 기념탑 앞에서 꽃다발을 들고 사진을 찍었어요. 그리고 첫날 색시는 사진 찍을 때 머리를 들면 안 됐어요. 머리를 다소곳이 숙여야 첫날 색시지 머리를 들면 사람들이 조신하지 못하다고 욕을 했어요.

이해연 : 지금은 신부가 머리도 번쩍 들고 치마 입고도 뛰어다니고, 친구들 보고 빨리 와라 소리도 치고… (웃음) 그때보다는 훨씬 자유로운 것 같아요.

박소연 : 저희는 기념탑에 갈 때도 조선 저고리 뒤를 친구가 잡아줬어요. 그리고 사뿐사뿐 걸어야 해요. 그 정도로 예단 문화나 결혼식 분위기 같은 게 많이 달라진 것 같은데 저는 엄청 부러워요.

이해연 : 그래야 결혼식이 좀 결혼식답잖아요.

박소연 : 그런데 그 반지를 끼워주는 문화는 남한 문화를 모방한 것 같은데… 남한은 무조건 결혼식 날에 반지를 끼워주잖아요. 우리 때는 한국 드라마가 그렇게 활성화되지도 못했고 무엇보다 금이 정말 귀했어요. 그리고 금으로 반지를 만든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없어요.

이해연 : 진짜요? 지금은 결혼식을 꼭 안 해도 여성들이 돈을 벌어서 금목걸이 정도는 사요. 그게 여자들의 로망입니다…

소연 씨에게는 천지가 개벽할 만한 소식

“북한 가정에서 결혼식 사진을 벽에 걸 수 있다”

장군님 초상화가 있는데 이게 어찌 가능한 일인가 ??

박소연 : 남한과 북한의 차이가 조금씩 좁혀지고 있다는 생각에 반갑네요. 문화적 차이가 너무 많이 나면 다른 세상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데 결혼 문화를 보니까, 최근에 북한은 남한의 결혼 문화와 차이는 있지만 따라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반가운 거 같아요. 그리고 우리 때는 조선 기록 영화만 영상인 줄 알았다니까요. 그리고 개인이 영상을 남긴다? 장군님만 영상이 나오는 줄 알았어요. 사진을 찍어도 사진첩에다가 붙여놓는 게 다였거든요. 지금도 이건 똑같죠?

이해연 : 지금은 결혼사진을 대형으로 인화해서 벽에 붙여요.

박소연 : 아니, 집에다 본인의 대형 사진을 붙인다고요? 장군님 초상화가 있는데, 어떻게…?

이해연: 초상화가 있어도 붙입니다.(웃음)

박소연 : 설마 초상화가 걸린 같은 벽은 아니죠?

이해연 : 그럼요. 같은 벽에는 못 붙이죠. 다른 벽에 붙이거나 초상화 아래에 붙이던가 하죠.

박소연 : 우리는 장군님 초상화는 붙이는 게 아니라 모신다고 했어요. 그러면 이쯤 해서 또 궁금한 게 있는데요, 현재 북한은 결혼 적령기가 어떻게 돼요?

이해연 : 스물일곱이나 거의 서른 살 정도면 늦었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결혼 생각 없이 서른 살 넘은 노처녀들도 예전보다는 많이 늘어났어요.

박소연 : 그런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어때요?

이해연 : 해마다 조금씩 바뀌기는 하는데 제가 어릴 때는 노처녀라고 하면 사람들 인식이 좀 그랬어요. 시집이나 가지, 뭐가 좋다고 혼자서 저러고 있냐고 욕하시는 분들도 있었고요. 그런데 뭐… 너무 강요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 눈이 높아서 안 가시는 분들도 있고, 개성이 강하거나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는 독립심이 강한 게 있어요. '내가 왜 굳이 남자랑 결혼을 해서 힘들게 결혼생활이라는 굴레 안에서 불행하게 살 필요가 있나?'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자 나이 스물셋 금값 , 넷은 은값, 다섯 동값…

스물여섯 이후엔 파철이라던 북한 사회

능력이 있다면 굳이 결혼해 힘들게 살고 싶지 않다는 여성도 많아

박소연 : 완전 천지개벽인 것 같아요. 저희 때는 결혼 적령기가 스물셋, 넷이었어요. 스물셋은 금값, 스물넷은 은값, 스물다섯은 동값이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스물여섯부터는 고철값이고요. 벌써 스물두 살이면 그냥 중매쟁이들이 문턱에 불이 나게 와요. 또 주변에 스물다섯을 넘긴 딸이 있다면 동정의 대상이었어요. 여자는 시집을 가서 어렸을 때 아이를 낳아야 건강한 아이를 낳고, 그래야 아이들을 빨리 키울 수 있기 때문에 편하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노처녀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어요.

이해연 : 지금은 남자 없이도 살 수 있는데 결혼해서 힘들게 살고 싶지 않다고 혼자 사는 분들도 많아요.

박소연 : 주변의 시선보다는 내가 주체가 되어 살아간다는 거잖아요. 옛날에는 주변의 시선 때문에라도 시집을 갔죠…

북한 신세대 해연 씨도 북한에서는 결혼하고 싶지 않았답니다. 이유가 있었다는데요. 오히려 남한에서는 조금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 얘기는 다음 시간 이어가겠습니다.

지금까지 탈북 선후배가 나누는 남한 정착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진행에 박소연, 이해연, 제작에 서울 지국이었습니다.

박소연, 에디터 이현주,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