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10년 차이] 그녀들은 왜 머리를 잡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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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함경북도 무산 출신으로 올해 정착 10년 차인 박소연입니다.

양강도 혜산 출신으로 이제 막 한국에 정착한 이해연입니다.

10년 차이로 남한에 입국한 탈북민 선후배가 전해드리는 남한 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박소연 : 북한 사람들은 길을 물어보면 '혜화동 57반 어디요?'라고 물어보는데 남한 사람들은 '죄송한데 광화문 가려면 어떻게 가죠?' 이렇게 물어봐요. 앞에 꼭 '죄송한데'를 붙이는 거예요. 저는 처음에 그게 적응이 안 됐어요.

오늘 얘기 시작합니다.

이해연 : 진짜 중요한 거 같아요. 남한은 먼저 죄송하다고 말하고 다음에 이유를 얘기하는데, 북한은 바로 이제 직진으로 갑니다.

박소연 : 네, 구실이 먼저 들어가죠.(웃음) 저 같은 경우는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먼저 들으면 상대가 잘못해도 용서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먼저 핑계를 대고 마지막에 잘못했다고 하면 화가 나요.

이해연 : 북한 사람이 좀 직설적인 면이 있어서 그러지 않을까요?

박소연 : 사회적인 문화가 내가 이 사람한테 먼저 사과하면 혹시 나를 얕잡아 볼까 그런 것도 있어요. 집에서도 목에 칼이 들어와도 미안하고 죄스럽다는 말하지 말라고 가리키죠.

이해연 : 상대방에게 무릎을 꿇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죠.

박소연 : 그렇죠. 그리고 설령 내가 정말 잘못했어도 그냥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면 끝이에요. 다른 군더더기가 없어요. 그리고 탈북민들이 기겁하는 말 있잖아요. '사랑해'라는 말이요. 남한에 와서 제일 기겁하는 말이잖아요.

이해연 : 사실 처음엔 저도 그랬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친구들에게 사랑한다는 말 잘하고 있어요.

박소연 : 저는 아직도 못하겠어요. 낯이 간지러워서.(웃음)

이해연 : 진짜요? 저는 하는데... 그렇게 말하면 친구들은 음… 이렇게 하고 말죠. (웃음)

남북의 언어 습관 중 가장 무게가 다른 말 "죄송합니다"

가장 적응이 안 되는 말 "사랑합니다"

박소연 : 수년 전에 하나원 동기생들의 모임이 있었어요. 여성 동기들이 요즘은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고 얘기했더니 남자 동기생이 '야, 내가 장군님이니? 왜 나에게 자꾸 사랑한다고 하니?' 화를 벌컥 냈어요. (웃음) 북한에선 장군님과 조국을 사랑하라고 했잖아요. 그 때문인가 지금도 탈북민들은 '사랑해'라는 말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개인끼리 하는 건 어색해하죠.

이해연 : 북한에서는 남한 드라마를 볼 때 그런 얘기는 연인들끼리 하는 것으로 알았는데요, 여기 오니까 모두 다 사랑한대요. (웃음) 친구도 사랑해, 만나는 사람마다 사랑한다고 하니... 이렇게 다 사랑하면 진짜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뭐라고 해요?

박소연 : 제가 보기엔 남한에서 말하는 '죄송합니다, 미안해, 사랑해'라는 말들은 북한처럼 자존심을 버리고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아요. 서로 기분 좋게 관계 유지를 하고 예의를 지키기 위한 표현인 것 같고, 그만큼 사람들이 마음의 여유도 있고, 사회가 풍요로워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해연 : 맞는 말씀 같습니다.

한국의 ‘죄송합니다, 미안해, 사랑해’라는 말

기분 좋게 관계를 유지하고 예의를 지키기 위한 표현으로 느껴져

이 말을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북한과 다른 점이 아닐까

박소연 : 북한 사회는 생활이 각박하고 남한처럼 그런 말을 쓸 수 있는 환경도 안 되고, 문화도 안 돼서 이런 차이가 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런데 북한이라도 다른 면에서 만만하진 않아요. 북한에서 있을 때 우리가 너무 웅장한 말들을 많이 썼잖아요.

이해연 : 표현이 완전 전투적이죠.

박소연 : 또 혁명적인 단어들을 많이 써요. 그리고 목소리 톤이 높은 이유도'일단 목소리 높은 놈이 이긴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이해연 : 가진 게 없어도 목소리가 높아야 자존심이 올라간다고 생각하죠. 탈북민들은 서로 얘기한다지만 옆에서 보면 서로 싸우는 것으로 보인다고 해요. 진짜 당혹스러운 상황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박소연 : 북한에서 혁명적인 말을 쓰면서 맨날 주먹을 쥐고 맹세를 다졌던 생활이 연장돼서 그런 거예요. 얼마 전에 제가 아는 동생이 남한에 온 지 한 3년 정도 되는 탈북민과 결혼했어요. 남한에서는 아이들을 가르칠 때 소리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조곤조곤 설명해 주잖아요. 여동생도 그렇게 했더니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이 "아이들을 교양 개조함에 있어서 그렇게 하면 되겠냐, 강하게 야단을 쳐야 한다"고 얘기를 한 거예요. 다행히 아이들은 남조선에서 태어난 덕에 새아빠 얘기를 하나도 못 알아들었답니다. (웃음) 이렇게 은연중에 '교양 개조함에 있어서'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그만큼 북한 말은 억양이나 표현 방법이 강렬한 거죠.

이해연 : 당에서 그런 말투로 아랫사람들한테 강압적으로 내려 먹이는 경향도 있고요. 또 남자들 같은 경우에는 10년간이라는 군사 복무를 하잖아요? 여기 남한은 군사 복무가 2년인가요?

박소연 : 2년도 안 돼요.

이해연 : 10년이면 얼마나 군대 생활 습관이 얼마나 몸에 뱄겠어요. 그런 남자들의 습관들이 사회와 가정에서 그대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모든 지시를 내려 먹이는 당국,

10년의 군대 생활이 그대로 가정으로 이어지는 북한 사회

거기에 가부장적인 문화가 더해져 목소리 크고 강압적인 남자들의 언어

그렇다면 여성들의 언어는 어떨까?

박소연 : 환경이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들이 어렵기만 했고 가정에서는 '사랑해, 미안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안 됐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 우리가 아버지, 남자들에 관해서만 얘기했지만 사실 탈북민들의 80%가 여자들이잖아요? 여성들도 만만치 않죠. (웃음) 오죽하면 드살이라고 얘기할까요?

이해연 : 생존해야 하니까. 살아남아야 하니까. 그렇게 드살이가 되지 않나 싶어요.

박소연 : 정답입니다. 맞아요. 저도 공감해요.

이해연 : 집안일은 다 여자가 도맡아 해야 하니까. 애 낳아 키워야지, 집 거두고 요리하고, 이걸 다 여자가 해야 하니 지금 생각해 보니 어떻게 살았나 싶어요.

고난의 행군 이전엔 다소곳한 여성이 최고 신붓감

그러나 모든 여성들이 장마당으로…

“시장에서 목소리 크게 안 지르면 그 물건 누가 사겠어요”

박소연 : 옛날부터 북한에서는 목소리가 높고 센 여자들을 선호한 건 아니에요. 90년대 초반만 해도 여자는 다소곳해야 하고 조곤조곤하게 말하는 여자들이 일등 신붓감이었어요. 그러다가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장마당에 나가야 했죠. 시장에서 목소리 크게 안 지르면 그 물건 누가 사겠어요. 그러니까 여자들이 생활 전선에 뛰어들면서 목청이 올라간 거예요. 소리를 쳐야 누군가가 한번 돌아다보니까, 또 장사하다 보면 누군가와 싸움이 날 수밖에 없잖아요. 그때 내가 점잖게 있으면 북한에서는 머절싸(바보같다)하다고 해요.

이해연 : 지금도 똑같이 말해요. 목소리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제가 목소리가 작잖아요? 북한에서는 항상 목소리 좀 컸으면 하고 바랐어요. 평상시 대화할 때는 괜찮아요. 그러나 싸울 때는 아무리 큰 소리로 화를 내도 들리지 않아요.

박소연 : 남한에서 정착 연도가 늘어날수록 탈북민들은 내 목청이 커봐야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스스로 깨달아 가요. 하지만 우리 탈북민들끼리 모이기만 하면 본성이 또 나오죠. '이야, 너 살아 있었니?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니'라는 이 말을 지금도 한단 말이에요.

이해연: 눈,코,입 다 붙어 있니?

박소연: 맞아요. 우리끼리니까 그렇게 하는 거죠. 그래서 가끔 내가 가면을 쓰고 사는 것 같아요. 소리를 지르고 싶은 순간도 있지만 참아야 하고, 또 내 성질대로 하고 싶은데… 남한에서는 '릴렉스'라고 하거든요. 영어로 '진정해라'는 뜻이죠. 너무 밉게 놀아서 정말 자부디를 잡고 싶지만 참죠. 그런 것들이 나를 우아하게 만들지는 몰라도 순간순간 불쑥불쑥 화가 치밀어오르거든요. 그때는 솔직하게 말해서, 북한에서 살 때처럼 그냥 소리를 꽉 지르고 싶은 생각이 종종 들어요.

이해연 : 그래서 제가 노래방을 좋아하나 봐요. 노래방 가서 마음껏 소리를 지르려고… (웃음)

남한도 사람 사는 세상이라 다툼도 있고 언쟁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와 해연 씨는 경험을 통해 이런 상황을 북한식으로 해결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는데요. 남북이 사회가 우리가 쓰는 말을 물론이고 많은 것이 다르기 때문이죠. 시행착오를 겪으며 정착의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갈게요.

지금까지 탈북 선후배가 나누는 남한 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진행에 박소연, 이해연, 제작에 서울 지국이었습니다.

박소연, 에디터 이현주,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