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10년 차이로 남한에 입국한 선후배가 전해드리는 남한 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저는 함경북도 무산 출신으로 올해 정착 10년 차 박소연이고요, 양강도 혜산 출신으로 이제 막 한국에 정착한 이해연 씨와 함께합니다.
<우리는 10년 차이>, 무리배치, 방직공장 그리고 이력서
박소연 : 우리 때는 도 노동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당신은 방직공장에 들어가 일을 하시오' 해서 식량 정지를 공장에다 넘겨서 국가가 배치한 대로 갔거든요. 지금도 그런 방식으로 흘러가나요?
이해연 : 지금도 역시 같습니다. 그걸 '무리배치'라고 하잖아요. 노동국에서 대학을 가거나 군대에 가는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문건들을 일일이 뒤져서 무리로 배치합니다. 무리배치하는 일터는 어렵고 힘든 곳이 대부분입니다. 도로 여단이라든지 철도 여단으로 먼지를 많이 뒤집어쓰고 일하는 곳이죠. 중요한 것은 먼지를 뒤집어쓰더라도 보수를 받으면 의견이 없을 텐데 보수도 없고 힘들고, 출근하지 않으면 벌금을 내야 하는 상황입니다. 지금도 역시 무리배치는 존재하죠.
박소연 : 아, 그리고 남한에 와보니까 부모가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도 자식은 농사일을 하지 않아도 돼요. 북한은 부모가 농장원일 경우 자식은 농장에 자동으로 배치가 되잖아요.
이해연 : 그게 너무 불공평하죠.
박소연 : 그냥 코를 꿴 일자리죠. 제가 남한 시골에 가서 깜짝 놀랐던 게 사람은 안 보이는데 잡초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리고 어르신들이 정자 밑에 앉아 쉬고 있길래, '왜 자식들이 농사를 안 짓고 직접 지으세요' 물으니까 '애들은 다 서울 갔지' 이러는 거예요. 그때 '남한은 역시 북한하고 다르구나. 본인의 능력이나 기술에 따라 일자리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북한의 상황이 불공평한 것에 마음이 안타까웠어요. 이것도 사실 여기 와서 생각해 본 것이죠.
이해연 : '나는 광부로 태어날래' 하고 약속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참 억울해요. 그래도 저는 다행히 광부나 농부 자식으로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괴롭게 살았던 것 같아요. (웃음)
박소연 : 그렇죠. 북한에서는 산다는 것 자체가 괴로움의 연속이죠. 지금까지 남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북한에서도 일하면 월급을 줄 텐데 그걸로 살면 되잖아요' 였어요. 한국 기준으로 생각을 하는 거죠. 현재 북한 일반 노동자가 한 달에 받는 월급이 북한 돈 3천 원인데 그 돈이면 북한 시장에서 쌀 700g 정도를 살 수 있죠. 이렇게 설명하면 또 '그걸로 어떻게 살았어요?'라고 되묻죠. 그러면 갑자기 제 머릿속이 멍해지면서 '정말 내가 어떻게 살았더라. 분명 나는 북한에 있을 때 직장에 적을 두었는데...' (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직장에서 번 돈으로 살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아요. 그냥 장사해서 살았죠. 그러니까 한국하고 너무 달라서…
이해연 : 무역회사나 이런 곳은 가끔 주기도 하는데 돈이 아니라 쌀로 주고요. 그리고 남한은 하루 8시간 노동시간이 고정됐잖아요? 그리고 그 이상 일하면 시간당 임금을 1.5배를 준다는 규정도 있고요. 북한도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오후 6시 퇴근이라고 정해져는 있어요. 그런데 일이 많아서 6시 30분, 7시까지 일을 해도 일한 시간만큼 돈을 더 준다? 그런 거 없어요. 없죠? 저만 그렇게 알고 있는 거 아니죠? (웃음)
박소연 : 없죠. 사실 탈북민의 시선으로 봤을 때는 남한 분들은 출퇴근 시간에 냉정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켜서 퇴근하죠… 그런데 해연 씨! 북한도 사람이 사는 세상이잖아요? 그런데 왜 일자리가 그렇게 없고 보수도 안 줄까요…
이해연 : 답이 이미 있지 않나요? 일자리가 없는 건 공장이 돌아가지 않으니 어디서 돈이 생겨요. 회사가 운영되고 회사가 제품을 만들어 수출해야 이윤이 남아서 그걸로 사람들한테 임금을 줄 수 있을 텐데... 일단 돌아가는 공장이 없고요. 남한은 보면 국내에서 제품을 많이 생산해서 수출도 많이 하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일자리가 많은 것 같아요. 비교하면 북한은 모든 게 안 돌아가니까 나라에서 사람들한테 줄 돈이 없어요. 돈이 없으니까 못 주는 것도 있고… 이런 상황을 나 같은 일반 사람도 다 아는데 윗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겠죠? 그런데도 왜 개선하려고 하지 않는지 안타까운 부분인데… 북한에서는 이것을 해결해 달라고 당당하게 나서서 얘기할 수 없다는 거죠. 말하면 혼자 반동이 되는 거죠. 그리고 주변에서도 '야, 너 자꾸 쑤시고 다니지 마라.' 하죠. (웃음) '목숨이 붙어 있을 때 그냥 조용히 살아라' 하며 오히려 핀잔만 듣죠. 제가 여기 와서 탈북민들을 처음 견학시켜줄 때 현대 자동차 공장에 갔어요. 이게 바로 공장이구나… 참, 북한에서는 뼈대만 서 있는 공장을 봤거든요. 이곳이 예전에 방직 공장이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공장은 너무 조용하죠. 사람들이 어디 위치를 알려줄 때, 거기 방직 공장 자리 찾아가… 이렇게 대주거든요.
박소연 : 아, 맞아. 우리도 그랬어요. 옛날 도시건설 자리 가라… 거기 가보면 브로크(블록) 같은 거 찍어내고 그래야겠는데 무슨 중국에 넘길 통나무 같은 게 가득 쌓여있죠. (웃음)
이해연 : 맞아요!
박소연 : 본연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죠… 오늘 우리 일자리, 아르바이트 얘기해 봤는데요. 해연 씨는 남한에서 어떤 직업에서 일하고 싶으세요?
이해연 : 일단 제가 배운 게 컴퓨터랑 회계 쪽이잖아요. 그래서 그런 분야로 지원을 하려고 여러 사이트에 들어가 일자리 공고도 많이 찾아보고 있습니다. 일단은 부딪혀서 내 능력을 알고 싶어요. 처음이니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고요.
박소연 : 아직 해연 씨, 남한에서의 생활이 1년이잖아요? 젖먹이한테 앞으로 뭘 하고 싶냐고 물어보면 대답이 많이 나올 수 없어요. 회계를 배웠기 때문에 지금은 회계 일을 하고 싶을 것이고 저처럼 연차가 늘어나면 또 다른 일을 해보고 싶은 욕망이 들 겁니다. (웃음) 세상에 만족은 없어요. 저는 올해로 이 방송을 9년째 하고 있어요. 10년 동안 방송일 외에도 공공기관에서도 일해보고 다양한 일자리도 경험했어요.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참 우리는 행복하다. 꿈꾸면 실현이 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잖아요. 하지만 이 방송을 듣고 계시는 청취자 여러분들은 꿈은 꾸지만 이룰 수 없는 세상에서 힘들게 살아가신다고 생각하니 하루빨리 같은 세상에서 꿈을 이루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방송은 여기까지고요. 함께 해주신 해연 씨 감사합니다.
이해연 : 네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탈북 선후배가 나누는 남한 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진행에 박소연, 이해연, 제작에 서울 지국이었습니다.
박소연, 에디터 이현주, 웹팀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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