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10년 차이] 문 밖의 빨간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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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10년 차이로 남한에 입국한 선후배가 전해드리는 남한 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저는 함경북도 무산 출신으로 올해 정착 10년 차 박소연이고요, 양강도 혜산 출신으로 이제 막 한국에 정착한 이해연 씨와 함께 합니다.

INS : <우리는 10년 차이>, 문 밖의 빨간 옷

박소연 : 해연 씨, 안녕하세요. 한 주 동안 잘 지냈어요?

이해연 : 안녕하세요!

박소연 : 며칠 지나면 우리 마음이 설레는 날이지요?

이해연 : 크리스마스잖아요.

박소연 : 그렇습니다! (웃음) 해연 씨는 사회생활하면서 처음 보내게 되는 크리스마스 날인 것 같은데… 어떠세요?

이해연 : 저에게는 아직까지 이런 분위기가 낯설어요. 지난해에는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못해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올해도 비슷한 상황이지만 작년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남한에 도착한 이후 '이게 크리스마스구나'라고 느꼈던 경험이 한번 있어요. 우리가 남한에 입국하면 먼저 교육기관을 거치게 되는데요. 거기서 생활할 때 마침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었는데 곳곳에 반짝거리는 트리도 설치하고, 캐럴 송을 틀어놓고 행사도 했는데 흥겹더라고요. 북한에 있을 때 명절 분위기랑 비슷했어요.

박소연 : 저도 남한에11월에 도착했어요. 한 달 후 크리스마스 날이었는데 그때는 크리스마스가 뭔지를 몰랐죠. 그런데 나오는 노래를 들으니까 금방 알겠는 거예요. 북한영화 '이름 없는 영웅들'에서 잔네트와 유림이가 부둥켜안고 춤을 출 때 나오던 음악이더라고요. '어마나! 이거 우리 조선예술영화에서 들었는데' 했더니 선생님이 크리스마스 음악이라는 거예요. 그날 교육장 큰 강당에 전체 탈북민 교육생들이 전부 모였는데 갔더니 거기다 돈지갑을 쫘악 펼쳐놓은 거예요.

이해연 : 아! 진짜요?

박소연 : 크리스마스 선물로… (웃음) 본인이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는 했는데 중국에서 살다 온 분들은 크리스마스를 잘 아시죠. 그런 분들은 거침없이 뛰어나가더니 빨간 돈지갑을 척 들고 오는 거예요. 우리는 뒤에서 '아 머절싸하게 저 촌스런 빨간색을 왜 집을까' 흉봤는데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크리스마스 날에는 빨간 옷을 입고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산타할아버지가 있대요. 이 할아버지가 입은 빨간 옷이 이 명절의 상징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저희는 그때만해도 크리스마스라는 걸 몰랐죠.

이해연 : 그 말 자체가 우리에게는 너무 생소하잖아요. 그런데 지금도 크리스마스는 대체 어떤 날인지 궁금해요.

박소연 : 크리스마스라는 게 우리말로 성탄절이에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이라 해서 어떻게 보면 미국이나 다른 서양 나라에서 생겨난 명절인데 그게 한국에 들어온 거예요. 이제는 오랫동안 이 명절을 지내다 보니까 남한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문화가 됐는데 사실 북한에서 '예수님'이나 '성탄절' 같은 말은 절대 사용하면 안 되는 금기어잖아요.

이해연 : 최고 지도자 외의 우상을 섬길 수가 없으니까요.

박소연 : 맞아요. 누군가를 축하하는 노래는 수령님과 당을 위해서만 불러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잘 받아들일 수가 없는 명절이죠. 저도… 이게 한 9년도 더 된 일인데요. 크리스마스이브 날이라고 바깥에서는 북적북적하는데 아들이랑 저는 집에서 그냥 평소처럼 저녁밥 먹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누가 문을 두드리는 거예요. "야, 우리 집에도 사람이 오는구나~" 놀라며 문을 여는데, 두 처녀들이 빨간 외투와 모자를 쓰고 케이크에 초를 켜서 들고 서있는 겁니다. 옆에는 어떤 할아버지… 사실 할아버지는 아니고 젊은 청년일 텐데 할아버지 분장을 했던 거죠. (웃음) 빨간 옷에 무슨 망태 자루를 뒤에다 매고 서있고요. 저는 깜짝 놀랐어요. 알고 보니 저희가 사는 인근 교회에서 탈북민들이 가족이 없잖아요. 그래서 크리스마스 날, 우리가 가족이 되어주고 성탄절을 같이 축하해 준다고 집을 찾아온 거예요.

이해연 : 그런 일을 경험하셨구나.

박소연 : 저는 처음에 너무 어색하잖아요. 이분들이 막 캐럴송을 부르면서 집에 들어오고 산타할아버지가 큰 마대에서 뭘 꺼내는데 겨울에 필요한 따뜻한 장갑에다 목수건(목도리)를 꺼내주고 앉아서 얘기하시는데… 뭔가 집에서 온기가 느껴졌어요. 거기서부터 저는 아… 크리스마스라는 게 서로 즐거우려고 생겨난 명절이구나 생각했고 꼭 그렇게 유래 같은 걸 따지진 않았어요.

이해연 : 네…저도 올해는 연차가 늘어났으니 남들처럼 성탄절을 즐겨보고 싶습니다.

박소연 : 해연 씨는 북한을 떠나온 지 얼마 안 됐잖아요. 한국 드라마가 북한에 많이 퍼지면서 사실 요즘 북한에도 크리스마스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요?

이해연 : 한국 드라마에서 산타 할아버지가 아이들이 있는 집에 가서 선물을 주는 모습을 보긴 했어요. 하지만 그 분위기는 모르죠. 드라마와 현실은 또 많이 다르잖아요? 그래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니까 크리스마스가 완전히 생소할 것 같지는 않아요.

박소연 : 사실 10년 전 북한에도 크리스마스라는 말은 드라마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사람들 자체가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왜냐면 북한에서 크리스마스이브날은 특별한 날이잖아요. 지금도 북한에서 12월 24일...

이해연 : 아, 24일이면 생각나는게 있죠.

박소연 : 뭐가 생각나세요?

이해연 : 행사를 맨날 하고... 아시죠? 김정숙 생일이잖아요.

박소연 : 김정은의 할머니죠.

이해연 : 그렇죠. 그때마다 행사하느라고... 엄마들은 충성의 노래 모임이라고 겨울에 꽃을 들고 치마를 입고 행사에 참여하고 동상에 인사도 드려야 해요. 가지 않으면 반동이죠. (웃음)

박소연 : 와…10년 전에도 12월 24일이면 김정숙어머니 생일이라고 여맹에서 조직하는 행사를 했죠. 이거 안 가면 안 되죠? 북한에서 노력 동원은 돈을 바치고 빠져도 정치 행사는 절대 빠지면 안 돼요. 시집올 때 해온 조선 저고리, 맞지도 않아요. 그걸 입고 나가서 … 그런데도 옷고름을 연결해서 입고 나갔어요. 그리고 진달래 꽃다발을 만들었죠. 김정숙 어머니가 태어난 회령이 백살구 진달래가 많데요. 저는 가보지는 못했는데 많이 있겠죠. (웃음) 진달래꽃을 들고 가운데 서서 '두만강 기슭에 꽃들은 피고' 하면서 화음을 넣고 하는 연습을 일주일 전부터 하는 거예요. 그리고 북한에는 공연 장소에 난방이 안 되잖아요. 행사하는 강당에 가면 정말 바깥 날씨보다 더 추워요. 너무 추우니까 조선 저고리 밑에 동 내의를 입고 까만 바지를 입고…

이해연: 동화도 신고… (웃음)

박소연: 그렇죠. 그 위에 마지막에 치마를 입는 거예요. 그래서 노래를 부를 때도 막 목소리가 덜덜 떨려요. '두두마안강' 이렇게 부를 정도로. 그래서 북한의 12월 24일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죠.

이해연 : 여기는 내가 즐기고 싶으면 즐기고, 구경하고 싶으면 구경하고, 그런데 북한은 무조건 가야 되는 행사라 그렇게 무조건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싫었어요.

박소연 : '시키는 일은 오뉴월(5월과 6월)도 손이 시리다'라는 북한 말이 있잖아요. 같은 12월 24일인데도 이렇게 뜻이 다니까요...

캐럴이 울리고 트리 장식이 반짝이는 거리를 걷다 보면 이제는 한 해가 다 가는구나 싶은데요. 그 분위기를 제가 말로만 다 전할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이번 방송은 남한 식으로 인사드릴게요. 메리 크리스마스! 평안한 연말 되시길 빌겠습니다.

지금까지 탈북 선후배가 나누는 남한 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진행에 박소연, 이해연, 제작에 서울 지국이었습니다.

박소연, 에디터:이현주, 웹팀: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