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주민들에게 “선교사”는 용어는 낯선 단어가 아니지요. 북한의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는 “선교사는 승냥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일제 강점기때 평안남도에서 한 조선 소년이 미국 선교사의 소유인 과수원에 들어가 사과를 따먹었다는 죄목으로 미국인 선교사가 청강수, 즉 염산으로 소년의 이마에 도적이라고 써놓아 평생의 흔적으로 남겼다는 내용입니다.
북한을 탈출한 탈북민들도 중국이나 한국 등에서 선교사를 처음 만날 때 섬찟한 마음이 들었다고 종종 증언하기도 하는데 북한에서 어릴 때 배운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북한이 완전히 날조한 이야기도 아닌 것이 실제로 한국 기독교 역사에 “허시모 사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1926년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남한 주요신문들에 보도된 사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시 보도 내용을 보면 알려진 것과 사실이 조금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수원에서 소년의 볼에 도적이라는 글씨를 쓴 사람은 미국인 선교사가 아니라 그의 밑에서 일하던 조선인 간호사였고, 사용한 것도 청강수가 아닌 “질산은”이라는 피부에 무해한 것이라는 겁니다. 더구나 미국인 선교사는 조선에 부임해 온지 몇달 밖에 되지 않아 조선말과 주변 상황이 아직 익숙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인해 허시모 미국인 선교사는 병원의 원장으로서 도의적인 책임을지고 본국으로 돌아갔고 이 사건은 한국 기독교 선교 역사에 가장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미국인 “허시모” 선교사는 당시 대부분 선교사들이 그렇듯 무보수로 조선에 와서 병자를 치료하면서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려고 했던 미국에서도 유능한 의사였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북한은 이 사건을 아이들의 교과서에까지 넣어 반미 교육의 대표적 자료로 9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활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의 기독교 복음과 함께 가져온 의료, 서양문화 등은 조선의 근대적 발전을 이루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선교사 하면 언더우드를 포함한 미국 선교사들의 이야기가 많지만 캐나다 선교사들도 이들 못지 않게 조선의 근대화에 이바지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35년 전인 1880년대는 한민족이 일본과 러시아, 중국 등 주변 열강들의 압력으로 주권을 잃고 우왕좌왕 하던 시기이며 이때 캐나다에서는 선교사를 파송해 주로 지금의 북한 지역인 원산, 함흥, 지금의 김책시인 성진 등지에서 활동했습니다.
미국 선교사들이 서울 등 오늘날 남한 지역에서 활동한 반면 캐나다 선교사들은 주로 북한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근대 역사에는 “평양 대부흥”이라고 부르는 한국 기독교 역사의 틀을 마련해준 역사적 운동이 있었는데 이 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한 “원산 대부흥” 운동을 이끈 것은 캐나다 선교사 토마스 하디였습니다.
토마스 하디 선교사는 캐나다 토론토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25세 나이에 북한지역의 원산에서 병원을 세우고 병자들을 치료하면서 기독교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캐나다에서는 근 300여명의 선교사들을 한반도에 파견했는데 이들은 한반도의 교육, 의료, 독립운동지원 등 여러 분야에서 큰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일본이 철저히 우리나라 역사문화를 말살하려고 하던 때에 캐나다의 제임스 게일 선교사는 조선을 연구하기 위해 한글과 한문학을 공부했으며 만주에 까지 가서 광개토대왕비를 보고와서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해외에 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캐나다의 여성 선교사 케이트 맥밀런은 1903년에 함흥지역에 제혜병원을 설립하고 이곳에서 당시 가장 치명적인 질병인 발진티브스, 콜레라, 천연두 환자를 치료하며 기독교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은 수 많은 캐나다 선교사들이 북한 지역에 바친 기독교 복음, 희생의 정신과 조선을 사랑한 그들의 감동적인 사랑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진행 장소연, 에디터 이진서, 웹담당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