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9일 중국 시진핑 주석이 발표한 "항 미 원조 전쟁" 즉 한국전쟁이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승리한 전쟁이라는 요지의 연설이 최근 큰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시진핑 주석은 베이징의 인민혁명 군사 박물관에서 열린 중국인민지원군의 한국전쟁 참전 70주년 전시회에 참가한 중국 인민군 해방군 앞에서 "미국의 침략에 저항하고 한국을 원조하는 전쟁의 위대한 승리는 중국의 역사에 영원히 새겨 질 것이다" 고 연설했습니다.
중국의 신화통신이 게재한 두 페이지 남짓한 시진핑의 연설 문에는 제국주의 침략이라는 단어가 무려 5번이나 들어가 있으며 운산 격전, 양수동1차전투, 청천강 전투, 장진호 전투 등 주요전투들이 차례차례 자세히 언급되었습니다.
시진핑 주석은 치열한 전투 끝에 중국군대와 북한군이 미국의 무적신화를 깨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에 서명 하도록 압박 했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이 전쟁이 끝난 후 제국주의 자들이 더 이상 중국을 침략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며 항미 원조 전쟁이 아시아 평화에 이바지 했다고 역설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중국의 구글로 불리우는 검색사이트 바이두에 한국전쟁은 "1950年6月25日,조선인민군이 남진한 작전에 의해 조선전쟁 발발"이라고 정확히 적혀 있습니다. 중국사회에서도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북한의 남침을 시진핑 주석이 공공연히 뒤집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은 당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하루만에 인민일보에 "조선인민은 침략자를 물리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는 논평을 냈으며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해 북진하자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회의에서 참전이 결정되었으며 마침내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을 넘어 신의주로 진격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은 전쟁 이전에 이미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모택동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1년전 부터 비밀리에 국 공 내전에서 실전 경험을 쌓은 쟁쟁한 조선족 동포들로 구성된 의용군들을 북한에 보내기 시작 했는데 그 수는 4-5만 명에 달했습니다.
이후 이 조선족병사들로 구성된 동북연군 부대 들은 북한군 제 7사단을 비롯한 북한군 무력의 근간을 이루는 데 크게 이바지하게 됩니다.
미 국무부는 시진핑의 연설직후 6.25전쟁은 "중국의 지지를 받은 북한의 남침"이라고 바로 반박했습니다.
그런데 관련 논란은 캐나다의 일부 친 중 단체들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시진핑 연설에 적극 동조하면서 더 커졌습니다.
캐나다에서 활동하는 트레이시 로라는 캐나다 광둥 해외 연의회 회장은 중국 소셜 미디어인 위챗에 "중국인민해방군과 조선인은 함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해 싸웠고 주도권을 잡아 공격해 승리했다" 라는 내용을 썼습니다.
또한 리우루이 라는 오타와 중국-캐나다 공동체 단체 연합회(FOCCO) 관계자는 시진핑 주석의 연설을 인용해 "중국 인민해방 군이 세계적 군사력을 갖춘 미국의 도발에 맞서 싸웠다"라고 적었습니다.
심지어 미국이 먼저 북한을 침공했다는 루머도 암묵적으로 퍼뜨리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관련게시물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자 캐나다 최대 일간지 '글로브 앤 메일'이 이 상황에 대해 적극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글로브앤 메일은 한국전쟁 관련 책을 저술한 캘거리 대 역사학자 데이비드 비커슨 씨와 인터뷰를 해 "한국전쟁 관련 중국의 역할을 칭송하는 것은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찬양과 비슷하다"며 중국의 개입으로 전쟁이 확대 되었으며 미국과 캐나다 , 영국 등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논평했습니다.
캐나다 보수당 대표 에린 오툴씨는 소셜 미디어 트위터로 "나는 한국 쟁에서 캐나다와 모든 동맹국들이 치른 희생에 경의를 표한다"며 "캐나다 내 에서 역사를 외 곡 하고 해외 프로파간다에 휘둘리는 단체들에 실망을 금할 수 없다"고 올렸습니다. 캐나다는 지난 한국전쟁에 2만 6천명의 군인들을 파병했으며 이 중에서 516명이 한국땅에서 산화했습니다.
지금까지 캐나다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 장소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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