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호실 리정호의 눈] “오라스콤, 북한에 제대로 뒤통수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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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 저는 북한 노동당 39호실 대흥총국 고위 관리 출신 리정호입니다"

[북한 전직 고위 관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김정은 정권과 핵심 권력층의 비밀을 파헤치고, 오늘날 북한 정책의 허와 실을 짚어보며 정치, 경제, 사회를 분석해 보는 ‘39호실 리정호의 눈’, 리정호 코리아번영개발센터(KPDC) 대표와 함께 합니다.]

"오라스콤의 철수는 북한이 투자 계약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력한 신호 이며 , 전 세계 투자자들에게 위험을 경고하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2008년 북한에서 수억 달러를 투자해 이동통신 서비스를 시작한 이집트의 통신회사 오라스콤. 하지만 불과 4년 만에 엄청난 손해를 보고 빈손으로 철수했는데요.

“오라스콤이 창출한 외화 수익은 북한 측의 회계 조작으로 증발했고, 2012년에 겨우 100만 달러를 돌려받았을 뿐입니다. 이는 오라스콤이 기대했던 수익과 비교하면 수백 분의 1수준이었습니다.”

오라스콤처럼 북한에 투자했다가 모든 것을 잃고 철수한 기업들이 많은데요. 이렇듯 북한이 수십 년 동안 같은 방식으로 외국인 투자자를 이용해 왔다는 것을, 수많은 사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리수용 대사 , 김정일에 '휴대전화 사용은 시대적 요구' 직언

[기자]리정호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이집트의 통신회사 '오라스콤'과 북한의 이동통신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제가 2008년, 오라스콤이 북한에서 이동통신 사업을 시작할 당시부터 취재해 왔는데요. 우선, 북한이 처음으로 이동통신 서비스를 도입한 시점과 이후 중단된 배경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리정호]북한이 이동통신 서비스를 처음 시작한 때는 2002년 11월이었습니다. 당시 태국의 '록슬리 퍼시픽'(Loxley Pacific)과 북한의 '조선체신회사'가 합작으로 '동북아 전화통신회사'를 설립해 운영했죠. 이 회사는 북한 당국으로부터 30년 동안 사업할 수 있는 허가를 받고 2세대(2G) 이동통신 서비스를 개시했습니다. 저도 당시 휴대전화를 구매해 사용했습니다. 그때는 외화(달러)만 있으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무역 일꾼,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그리고 권력층 인사들까지 앞다투어 휴대전화를 구매했습니다. 불과 2년 만에 가입자가 수만 명에 이를 정도로 빠르게 확산했죠.

그러다가 2004년 4월 22일 룡천역 폭발 사건 이후, 북한에서 이동통신 서비스가 전면 중단됐습니다. 그날 김정일이 중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열차가 지나간 직후, 중국 단둥시와 인접한 평안북도 룡천역에서 대규모 폭발 사고가 발생했는데, 당시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는 이에 대해 ‘적들이 최고 수뇌부를 겨냥한 암살 시도’로 보았고, 휴대전화의 원격 조종 기능을 활용한 폭발 공격 가능성이 있다고 김정일에게 직보했습니다.

그리고 김정일의 방침을 받아 즉각적으로 전국에 휴대전화 사용 금지령을 내렸고, 기존 가입자들의 단말기도 전부 회수했습니다. 결국, 김정일 한 사람의 신변 안전을 위해 그때부터 북한 전역의 이동통신 사업이 완전히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진 겁니다.

[기자] 그리고 2008년, 북한은 오라스콤과 손잡고 4년 8개월 만에 다시 이동통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2004년에 발생한 룡천역 폭발 사건 이후 김정일이 이동통신을 전면 금지했던 것을 고려하면, 이런 변화는 획기적인데요. 북한이 이동통신 사업을 다시 개시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리정호] 당시 북한에서 김정일의 신변 안전이 걸린, 이동통신 사업을 재개하자고 건의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김정일 비서실 부부장 겸 스위스 주재 북한 대사인 리수용이 2007년에 이동통신 재개 문제를 김정일에게 제기했습니다. 그는 1980년부터 스위스와 유럽에서 활동하며 김정일을 보좌했기 때문에 개혁적인 성향이 강했습니다. 김정일도 그를 믿고, 1995년경부터 아들인 김정은을 스위스에 유학을 보냈고, 리수용이 돌봐 주게 했습니다. 그래서 김정은과도 매우 끈끈한 관계입니다.

당시 리수용 대사는 김정일에게 “장군님, 지금 세계는 휴대전화 사용으로 급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동통신을 재개하지 않으면 현대 문명에서 도태될까 걱정됩니다. 장군님, 휴대전화 사용은 시대적 요구입니다.”라고 설득했습니다. 이는 그가 직접 저에게 전해준 얘기입니다. 또 그는 스위스 제네바 ‘국제전기통신연맹’(ITU) 사무총장과의 만남에서 ‘이동통신망은 테러 방지와 사회 통제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라는 통계 자료를 접했고, 이를 근거로 김정일을 설득했습니다. 결국, 김정일도 리수용 대사의 논리를 받아들였죠. (리수용 대사의 발언을 인용한 부분은 독립적으로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리수용은 전 세계 50대 부호 중 한 명이었던 이집트 오라스콤 그룹의 나기브 사위리스 회장을 북한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때 김정일은 오라스콤에 이동통신 사업권을 주는 대신 더 많은 투자를 유치하라는 단서를 달았습니다. 이에 따라 오라스콤은 북한에 미화 4억 달러를 투자하는 조건으로 25년간 북한의 이동통신 사업권을 받았고, 전체 지분의 75%는 오라스콤이, 나머지 25%는 북한이 갖는 형태로 ‘고려링크’를 설립하게 됩니다. 결국, 리수용 대사의 헌신적이고 끈질긴 노력 덕분에 2004년 이동 통신이 전면 중단된 지 4년 8개월 만인 2008년 12월, 드디어 북한은 이동통신 서비스를 재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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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마스크를 쓴 여성이 버스 안에서 휴대전화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 AFP

오라스콤에 도∙감청 장비 , 비화폰 등 요구

[기자]하지만 북한에서 이동통신 서비스를 재개하는 것은 엄청난 정치적 부담인데요. 특히 정보의 유통이란 점에서 민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혹시 계약 과정에서 갈등이나 예상치 못한 사건들은 없었나요?

[리정호] 왜 없겠습니까. 당시 리수용 대사는 저에게 매우 인상적인 이야기를 전해줬는데요. 이동통신 사업에 관한 계약 체결 당일, 북한 측 계약자인 체신성의 고위 간부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의 건강 문제가 아니라, 계약에 서명한 뒤 혹시 자신과 가족에게 닥칠 위험을 피하려 했던 겁니다. 2004년에 룡천역이 폭발한 이후, 북한에서는휴대전화가 테러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공포가 확산했는데, 정책이 언제든 뒤집힐 수 있는 북한 체제에서 김정일이 돌연 이동통신 사업 재개를 비판할 경우 계약 당사자는 처벌을 피할 수 없다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이 사태를 접한 리수용은 즉시 김정일에게 보고했고, 김정일은 국가안전보위부 1부부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계약을 강행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렇게 국가안전보위부는 체신성 간부에게 “계약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겠다”라고 안심시킨 뒤 계약을 마무리했는데, 이 얘기를 들으면서 저는 북한 체제의 극단적인 공포 정치가 만들어낸 현실을 다시금 실감했습니다.

또 국가안전보위는 약 1천만 달러 상당의 도∙감청 장비를 먼저 들여와야 오라스콤의 이동통신 사업을 승인해 주겠다며 리수용 대사를 강하게 압박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지도자의 신변과 국가의 안전을 지킨다는 명분이었습니다. 당시 리수용 대사는 마치 자신이 빚을 진 사람 같았다고도 말했습니다. 이 밖에도 중앙당의 일부 간부는 노동당 청사 내에서 이동통신을 사용하면 지도자의 비밀이 유출될 수 있다며 강하게 반대했는데, 그래도 리수용 대사는 이를 강행했습니다. 그는 오라스콤에 요청해 도∙감청 설비를 먼저 들여왔고, 중앙당 간부들과 국가안전보위부의 국장급 이상 간부, 군 수뇌부 고위 장성들에게도∙감청 방지 기능이 탑재된 비화 전화기를 우선적으로 공급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중앙당 간부들은 언제든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통화할 수 있는 엄청난 변화를 맞이했고 모두 환호했습니다. 이는 북한에서 발생한 거대한 통신 혁명의 시작이었는데, 만약 리수용 대사가 아니었다면, 북한에서 이동통신 서비스의 도입은 불가능했을 것이며, 주민들은 여전히 구시대적 삶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는북한의 변화와 발전을 이끌어낸 인물로 평가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김정은의 곁에는리수용처럼 인터넷 도입을 주장할 만큼 용기 있는 인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북한은 현대 문명과 점점 멀어지면서 더욱 깊은 고립의 늪으로 빠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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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이동통신사인 ‘고려링크’ 평양 영업점. / 연합뉴스

투자는 달러로 , 수익은 원화로?... 갈등 끝에 쫓겨나듯 철수

[기자] 그렇게 오라스콤이 북한과 손잡고 이동통신 사업에 수억 달러를 투자했지만, 투자금은 물론 운영 수익조차 회수하지 못하고 결국, 북한에서 밀려났습니다. 이는 단순한 사업 실패가 아니라 북한 당국의 의도적인 계약 위반이라는 해석도 가능한데요. 오라스콤이 이렇게 빈손으로 나오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오라스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고, 북한은 왜 이런 행태를 보였을까요?

[리정호] 오라스콤의 철수는 북한이 투자 계약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력한 신호이며, 전 세계 투자자들에게 위험을 경고하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오라스콤이 2008년 12월, 북한 체신성과 합작해 고려링크를 설립하고 북한에서 이동통신 서비스를 개시한 후, 2014년에는 평양 인구와 맞먹는 약 250만 명의 가입자 수를 기록했습니다. 이는 월급이 겨우 미화 0.5달러도 되지 않는 북한에서 벌어진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 합작 기관의 한 간부는 저에게 "고려링크가 이동통신 사업을 통해 약 10억 달러의 수익을 창출했다"라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오라스콤이 예상했던 것과 달리, 북한 측과 심각한 계산 분쟁에 휘말렸는데요. 고려링크는 매월 통신료에서 일부 몇 시간의 통화료만 내화로 지불하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외화(달러, 위안)로 수금했습니다. 오라스콤 직원들도 몇 년간 공동 운영하며 이를 알게 됐죠. 그럼에도 북한 측은 오라스콤에 대한 정산을 북한 원화 기준으로 지급하려 했습니다. 문제는 북한 측이 공식 환율(1달러 = 100원)을 적용한 건데요. 당시 시장 환율(1달러 = 6000원)과 비교하면 무려 60배의 극단적인 차이가 납니다. 오라스콤이 이에 반발해 시장가격으로 환전해 줄 것을 요구 했지만, 북한 측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저도 북한에서 휴대폰을 사용할 때 북한 돈으로 내는 기본요금은 이틀이면 소진돼, 매달 30~50달러를 추가로 지불했습니다. 결국, 오라스콤이 창출한 외화 수익은 북한 측의 회계 조작으로 증발했고, 2012년에 겨우 100만 달러를 돌려받았을 뿐입니다. 이는 오라스콤이 기대했던 수익과 비교하면 수백 분의 1수준이었습니다. 그리고 북한 측은 오라스콤과 계약한 25년 사업권 중 4년 간의 독점권이 2012년 말에 만료되자, 점점 오라스콤을 배제하고 ‘별’ 통신, ‘강성네트워크’ 등 중국과 합작한 새로운 통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투자자의 단물만 빼 먹고 내쫓는 강도 같은 수법입니다. 이후 오라스콤은 수년간 북한 당국과 협상했지만,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철수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국제 사회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명확한데요. 앞으로 북한에 투자하려는 기업들이 반드시 이를 참고해야 할 겁니다.

[기자]정말 수익을 내기 위해 북한에 투자했던 오라스콤의 사례는, 대북 투자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명확한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동안 중국, 한국을 비롯해 많은 외국 기업이 북한에 투자했다가 오히려 다 뺏기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온 적도 많지 않습니까?

[리정호] 북한에 투자했다가 모든 것을 잃고 철수한 기업들의 사례는 수없이 많습니다. 이는 북한 경제 체제의 본질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며, 북한이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개방하지 않는 한 어떠한 투자도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저 역시 2007년, 홍콩의 석유 재벌로부터 1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유치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회사는 북한에 더 이상 투자하면 손해를 볼 것 같아 투자한 돈을 잃어버린 셈 치고, 아예 철수했습니다. 또 제 지인이던 중국 단둥의 한 기업가는 2011년 평양 고려호텔 뒤편에 현대식 호텔을 건설하는 프로젝트에 투자했다가 1천만 달러 상당의 건설용 철강재를 공급한 뒤 단 한 푼도 회수하지 못하고 망했습니다.

1970년대에는 스웨덴의 ‘볼보’(Volvo) 회사가 북한에 대규모 차량을 수출했지만, 대금을 받지 못했고, 일본 ‘미쓰비시’(Mitsubishi) 회사는 황해제철소의 현대화 사업에 몇억 달러를 투자했다가, 그 돈을 회수하지 못했습니다. 황해제철소는 제가 여러 번 가봤기 때문에 ‘미쓰비시’의 투자 상황을 잘 알고 있습니다. 1980년대에는 김일성이 직접 나서서 일본 조총련 기업들이 평양에서 여러 합영기업을 설립하도록 했지만 결국 모두 실패했고, 1990년대에는 한국의 대우그룹이 남포공단에 투자했다가 몰수당했으며, 현대그룹 역시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에 투자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이렇듯 북한은 수십 년 동안 같은 방식으로 외국인 투자자를 이용해 왔다는 것은, 수많은 사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기자]네. 지금까지 북한 노동당 39호실 고위 관리 출신인 리정호 코리아번영개발센터 대표와 함께 '야심 차게 투자했다가 두 손 들고 나온 이집트의 통신회사 오라스콤'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리정호 대표님,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노정민입니다.

에디터 박봉현, 웹편집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