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우리 생활] 북중 무역 현주소

북한 화물트럭이 중국 단둥에서 조중우호교로 들어서고 있다.
북한 화물트럭이 중국 단둥에서 조중우호교로 들어서고 있다. (/Reuters)

0:00 / 0:00

북한의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함께 잘살아 보는 방법을 고민해보는 RFA 주간 프로그램 ‘경제와 우리생활’ 진행에 정영입니다. 대북제재에 이어 코로나로 인해 북중 무역이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하고 있어서 북한 경제가 상당히 어려워졌을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와 관련해 경제 전문가인 남한의 통일연구원 정은이 박사, 진행에는 정영 입니다.

기자: 정은이 박사님 안녕하십니까?

정은이 박사:네 안녕하십니까?

기자: 자, 먼저 북한의 전체 무역 거래량의 90% 가량이 중국과의 교역인데요. 원래부터 북한의 중국에 대한 무역 의존도가 높았나요?

정 박사:북한의 대외경제에서 중국의 비중이 처음부터 오늘날처럼 컸던 것은 아닙니다. 중국과의 교역 비중은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20% 남짓이었습니다. 당시는 일본의 비중도 중국과 비슷했고, 2000년대 중반에 이르면 한국의 비중도 20%에 근접했습니다. 중국의 비중이 절반을 넘기 시작한 것은 '북일 무역중단' 조치가 이뤄진 2007년부터였습니다. 그리고 2010년에는 남한마저 '5ㆍ24조치'로 남북교역을 중단하자 2011년부터 중국의 비중은 90% 가까이 치솟았습니다. 최고 기록은 2018년 정도로, 당시 95.8%였습니다. 바꿔 말하면, 중국과의 교역 비중 증가는 핵무기 개발에 따른 북한의 고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자: 네 제가 북한에 있을때인 1980년대 이전에 중국이개혁개방을 시작하기 전에는 북한이 중국보다 더 잘 살았거든요. 중국 화교들이 북한에 나와 장사하는 것을 보면 물감, 신발, 돈가방 같은 잡화를 가지고 나와서 팔았거둔요. 그러면 중국이 1980년대 개혁개방을 하기 전에 사회주의 경제체제 시절에는 북중 무역이 어떠했습니까?

정 박사: 좀 더 멀리 북한의 대외경제 관계사를 보면, 1940년대 소련 군정 당시 북한 무역총액의 90%는 구소련과의 것이었습니다. 이후 1950~60년대 해외 무상원조에 있어 소련이 40.3%(5억 1,475만 불), 중국 26.3%(3억 3,600만 불) 동독이 8% 등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다가 1960년대 중소이념 분쟁 이후에는 무역 다원화가 이뤄져서, 1965년 소련과의 교역 비중은 40%로 감소했습니다. 그렇다고 이 시기에 중국과의 교역이 증가했던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1970년대 이후에는 서방과의 무역 확대와 차관도입이 이뤄졌습니다. 1970~1976년 사이 북한이 받은 차관은 21억 4,900만 불 중, 57.8%(12억 4,200만)가 서방이 공여한 것이며, 42.2%(9억 600만)를 소련이 공여했습니다. 중국은 160만 달러로 그 비중이 미미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자: 그렇다면 북한은 1970년대 들어서는 오히려 서방세계, 이른바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경제교류를 시작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혹시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정 박사: 아닙니다. 1976년 북한의 대외 채무불이행으로 인해 북한의 대외경협 활동이 막히게 되었습니다. 북한은 이를 만회하고자 1984년 <합영법> 등으로 새로운 대외협력을 시도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조총련과의 경제협력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러나 1980년대 말 소련과 동구권이 몰락하면서 이 시도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1991년부터는 북한과 러시아 교역 무역대금이 경화화(硬貨化)됐습니다. 그전에는 물물 교환식의 무역이 이뤄졌는데, 그 속에서 북한은 외화가 없이도 필요한 물자를 해외에서 조달할 수 있었습니다. 즉 1991년부터 북한은 외화가 없이는 무역을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북한은 1991년 라선자유경제무역지대를 지정하고 1992년 조중 무역협정을 체결하는 등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기자: 1991년부터 북한이 외화가 없이는 무역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소련과 동구권이 붕괴되면서 소련도 먹고 살기 힘드니까, 이제는 달러를 가져오지 않으면 주겠다고 한것입니다. 이전에는 외상으로 많이 가져왔지요. 그래서 북한의 무역일꾼들, 그리고 경제 일꾼들이 뭐라고 했는가 하면, "이제는 달러가 없이는 아무것도 들여오지 못한다"고 걱정했던기억이 납니다. 1990년대 이후로는 북중 무역관계가 어떻게 발전되었습니까?

정 박사: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이 계획은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특히, 1991년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했지만, 1992년에한중수교로 인해 북중 관계는 악화의 길로 치달았으며, 중국의 경제적 어려움을 이유로 당시 북한에 대한 식량 원조조차 거부하였습니다. 당시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북한의 중국에 대한 분노는 컸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후 북한은 2000년대 들어 남북관계의 정상화 등을 통해 오히려 중국과의 교역을 본격적으로 늘이기 시작했습니다.

기자: 1997년 고난의 행군때 제가 북한에 있을때인데, 그때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을 때 중국 사람들이 무엇을 요구했는가 하면 파철, 부채마, 목재 등을 요구했습니다. 중국이 파철을 요구하다보니까, 사람들이 멀쩡한 공장기업소 설비를 뜯어내다 파철로 팔았습니다. 그리고 백두산 목재를 베어 팔았습니다. 그래서 북한도 어려울 때 도와주지 않는다고 불만이 많지만, 중국밖에 없기 때문에 거기에 기대서 살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대북제재로 인해서 북중무역은 어떻게 줄어들었습니까?

정 박사: 중국이 유엔제재에 본격적으로 참가하기 시작한 2017년 하반기부터 북중무역은 감소했는데, 대중국 수출은 2016년에서 2021년 사이에 25억달러~6천만 달러까지 떨어졌습니다. 대중국 수입도 같은 기간 28억달러~3억 달러로 급락했습니다. 따라서 대중국 무역수지 적자도 오히려 3억 달러에서 2억 달러로 내려갔습니다. 코로나로 교역량 자체가 줄어들기 전까지 무역적자가 계속 확대됐던 것입니다. 특히, 대중수출이 급락한 것은 2018년부터 북한의 주력 상품 중 5가지(석탄, 철강, 철광석, 수산물, 의류)가 수출금지 대상이 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후 대중수입까지 제재를 받게 되면서 중국의 자본재를 북한이 일체 수입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기자: 방금 박사님 말씀하신 중에 달러대신에 불을 쓰셨는데요. 이 불자는 달러와 똑 같이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 코로나로 인해서 그나마 간헐적으로 이어지던 북중 교역이 완전히 중단되었는데요.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정 박사: 네 일단 제재가 심해진 후, 코로나 이전 상황을 보면요. 비제재품목(식량, 시계, 가발 등)에서 대중수출 증가했으며, 대중수입 품목은 생필품ㆍ식료품에 국한돼 있었고, 즉, 제재로 인해 위축된 무역이 더 위축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중에도 한국무역협회(2022)에 따르면, 북한이 2021년 12월에 새해, 그리고 김정일 생일(광명성절)을 맞아 어린이 선물 공급에 필요한 밀크ㆍ크림ㆍ설탕을 수입했고, 농사철을 앞두고 제초제ㆍ살충제 등이 수입됐다고 보고되고 있습니다. 즉, 인민 생활과 밀접한 생활 필수물자에 대한 교역은 이뤄지고 있다는 겁니다. 다만, 설비 보수나 건설을 위한 자본재와 자재 등은 수입이 어렵지 않는가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기자: 북중 무역의 변천사를 보니까, 중국이 북한보다 못살때는 북한은 소련쪽에 많이 기댔는데, 그러다가 중국의 국내총생산(GDP)규모가 미국 다음으로 커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북한도 중국에 기대어 살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변한 것 같습니다.

오늘은 시간상 관계로 여기서 마무리 하고 다음 시간에 또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정은이 박사:네 감사합니다.

기자: 지금까지 도움 말씀에는 경제 전문가로 남한 통일연구원 정은이 박사와 함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참여자 정은이 연구위원, 기사작성 정영기자, 에디터 이진서,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