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 “김일성은 가짜” 폭로한 월남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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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서울의 탈북소설가 도명학 작가와 함께 하는 '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입니다. 저는 미국 워싱턴의 홍알벗입니다.

MC: 지난 시간에 이어 오늘도 월남 작가에 대해 알아볼 텐데요. 선생님, 오늘은 어떤 작가를 소개해 주실 건가요?

도명학: 네 오늘은 월남한 평양 출신 희곡작가, 시나리오 작가인 오영진 작가에 대해 준비했습니다.

MC: 오영진 작가에 대해 알아보기에 앞서, 그의 아버지에 대해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독립운동가라고 알려졌는데, 오 작가의 아버지는 어떤 인물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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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한 평양 출신 희곡작가, 시나리오 작가인 오영진 작가. /연합

도명학: 오영진 작가의 부친 오윤선은 일제강점기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이고 기독교 장로였는데, 1922년 조만식 선생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고 국산품장려운동을 벌이고, 해방 직후 1945년 8월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기도 했을 정도로 견결하나 민족정신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평양에 있던 그의 집은 민족지도자들이 밤낮으로 화합하고 기거하는 아지트였다고 합니다.

오영진 작가 역시 해방 직후 조만식 선생의 비서관을 지냈는데, 처음에는 공산주의 사상에 호의를 가지고, 1945년 10월 14일 평양의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에도 참가했으며, 김일성과도 몇 차례 만나고 약간의 친분까지 쌓았습니다.

하지만 소련군정과 김일성 일당이 공산화를 위해 무력을 동원하여 주민들의 일방적 지지를 받던 조만식 선생과 민족진영 지도자들을 구금하는 무지막지한 행동들에 좌절감을 느끼고 1947년 11월 7일 월남했습니다. 월남 후인 1948년 7월 10일에는 서울에서 북한이 파견한 인물로 보이는 자의 총격을 받아 심한 부상을 당했으나 다행히 생명은 건졌습니다.

부친 오윤선은 6.25 전쟁 중인 1950년 10월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으로 진격할 때, 북한당국이 후퇴 직전 조만식 등 민족진영 지도자들을 처형할 때 함께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MC: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오영진 작가에 대해 알아보죠. 오 작가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도명학: 오영진 작가는 문학뿐 아니라 영화, 연극, 그리고 정치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를 맺은 흔치 않은 인재였습니다.

1916년 평양에서 출생한 작가는 1929년 광주학생반일시위에도 참가했고,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과를 졸업했습니다. 1936년에는 문예지 <성대문학> 창간하고 극영동호회 조직했으며 1938년 대학을 졸업한 후 일본으로 가서 도쿄에서 영화 수업, 영화 조감독 생활을 하다가 1940년 귀국했습니다. 귀국 후 부친이 경영하는 숭인상업학교 강사 겸 이사장 비서, 조선영화주식회사 문예부와 조선영화사에서 일했습니다. 1943년에는 조선인 학도병제 반대 운동에 관련되어 매부, 조카 등과 함께 검거되었습니다. 해방된 1945년에는 자택에서 조만식 선생을 위원장으로, 부친 오윤선 장로를 부위원장으로 하는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조직에 참여했고 월남 후에는 서울에서 조선영화건설본부를 조직했습니다.

오영진 작가의 삶은 정치가, 사상가로서의 면모와 문학, 영화, 연극 발전에 기여한 것, 두 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특히 민족지도자였던 부친의 영향 속에 성장한 것으로 하여 그의 민족정신은 각별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수재로 불리던 그가 당시로서는 큰 인기가 없었던 조선어문학과를 선택했다는 사실도 이를 입증해줍니다. 당시 그는 “이 기회를 놓치면, 영영 우리 조상이 남겨준 문학과 사상적 유산의 목록조차 알 길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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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7월 23일 북한 평양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 환영 퍼레이드에서 북조선로동당중앙본부 참가자들이 스탈린과 김일성의 대형 초상화를 들고 있다. /AP

광복 이후 조만식 선생을 도와 조선민주당 창당에 도움을 주고 중앙상임위원이 되어 조만식 선생의 측근이자 비서로 활동한 그의 위치는 상당했습니다. 공산당에 쫓겨 월남한 후엔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오영진의 민족주의 사상은 그의 작품을 통해 전통의 수용과 재창조라는 형식으로 표출되었습니다. 당시 그는 정치와 사회를 반공·민족주의라는 입장을 고수하며, 예리한 눈으로 꿰뚫어 고발하였고, 그의 작품은 건전한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고자 했으며, 사회 문제의 핵심을 통관하고자 했습니다. 즉 현대사회를 다루되 민족적 주체를 세우고자 했다는 점에서 고전 전통의 수용 작업과 맥이 이어집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관혼상제 및 구비설화를 모태로 한 의례 삼부작과 고전소설을 모태로 한 시나리오 <꿈>, <심청> 및 희곡 <허생전>이 있습니다. 의례 삼부작 <배뱅이굿>, <맹진사댁 경사>, <한네의 승천>은 모두 시나리오로 발표되어 영화로 제작되었습니다. 한편 <살아있는 이중생각하>, <오곡타령>, <무희>와 같은 작품은 전통 소재 작품들보다 문학성과 철학성에 기반하여 민족주의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주장하였습니다. 59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등졌을 때, 그의 장례식을 연극인장으로 할 것이냐, 영화인장으로 할 것이냐를 놓고 다툼이 생겼을 정도로 그가 한국 영화에 끼친 공로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오영진 작가가 영화와 관련을 맺은 일로는 시나리오 집필, 영화제작, 영화평론 활동을 들 수 있습니다. 시나리오는 앞서 언급했던 <배뱅이굿>, <맹진사댁 경사> 등 모두 12편인데, 1955년 한국 영화 중흥기에 제작된 최초의 동시녹음영화 <주검의 상자>를 미국공보원과 공동으로 제작한 것도 한국영화사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편 오영진 작가의 영화이론은 과거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릴 만큼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예술가, 정치인 오영진의 고고한 성품, 오리지널만을 고집하는 작가적 자세, 결벽증 등은 지금도 유명하게 전해져 오고 있는데, 이러한 고집과 결벽증으로 그를 멀리하는 예술인들도 있었다고 하지만 그의 외고집, 비타협성이 없었더라면 그가 살았던 그 시대에 주옥같은 작품들이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MC: 6.25 전쟁 당시 직접 겪었던 일을 쓴 책 <소군정하의 북한:하나의 증언>도 있었죠? 김일성과 관련한 북한 측의 잘못된 역사적 사실을 지적하는 내용도 있다는데, 어떤 작품인가요?

도명학: 네 그렇습니다. 오영진 작가는 6.25 전쟁 중인 1952년 북한에서 체험한 소련군정의 실상을 폭로하는 저서 "소군정하(蘇軍政下)의 북한 : 하나의 증언"을 펴냈습니다. 오영진 작가는 이 책에서 자신이 평양에서 체험했던 소련군정의 실상과 김일성에 대해 자세한 증언을 했는데, 김일성이 가짜임을 입증하는 중요한 증언이 들어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처남의 장인이었던 김인욱이란 사람이 일본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사람으로 1937년 6월 4일 보천보 사건 직후 6월 30일에 벌어진 간삼봉 전투에서 동북항일연군 6사장 김일성과 전투를 벌인 바 있습니다. 그는 해방 직후 평양에 온 김일성과 간삼봉 전투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김일성이 간삼봉 전투 때 싸운 상대가 김인욱이 아니라 그와 일본육군사관학교 동기인 김석원이 당사자인 것처럼 잘못 말한 것을 듣고 김일성을 의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영진 작가는 간삼봉 전투 때 동북항일연군 6사 사장 김일성이 김인욱을 직접 만나 담판을 벌인 적도 있기 때문에 김석원으로 이름을 잘못 알았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김인욱은 평안남도 용강군 출신이고 해방되기 전 일본군에서 제대되어, 고향에서 살다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끌려간 후 소식을 모른다고 합니다.

간삼봉 전투에서 동북항일연군 6사 사장 김일성 부대와 맞붙었던 일본군을 실제로 지휘한 사람은 김석원이 아니라, 그와 일본육군사관학교 동기로 함흥연대 소속이었던 김인욱 소좌였다는 것은 당시 신문 기사에서도 확인이 되며, 여러 연구에 의해서도 밝혀져 있습니다. 북한이 이 사안과 관련하여 김인욱 아니라 김석원을 자꾸 거론하는 것은 보천보전투와 간삼봉전투 당사자인 진짜 김일성이 따로 있었고 해방 후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은 가짜라는 증거를 더해줄 뿐, 진짜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에 전사했고, 그 후에 알려진 김일성, 즉 김성주는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도용한 가짜 김일성으로 마치 자신이 보천보전투와 간삼봉전투를 지휘한 진짜 6사 사장이었던 것처럼 진짜 김일성의 공을 가로챘다는 얘긴데, 이외에도 가짜 김일성에 관한 연구자료, 증언 자료들이 한국에 꽤 있습니다.

MC: 오영진 작가는 시나리오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소설과 시나리오의 공통점은 무엇이고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도명학: 공통점은 둘다 스토리를 기반으로 쓰여지는 작품이고 다른 점은 소설은 문자로만 묘사하면 되는데, 시나리오는 화면에 스토리를 담아낼 것을 전제로 한 대본 성격의 작품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소설의 묘사는 매우 섬세한 데 비해 시나리오는 대사가 위주고 장소, 배경, 사물의 움직임 같은 것은 대략적으로만 제시하여 영화감독이나 연출가에 의한 대본 작업, 혹은 연기자의 순발력에 따라 조금씩 수정될 수 있습니다.

MC: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 위한 조건 같은 게 있나요? 있다면 남한과 북한의 시나리오 작가의 양성 과정을 좀 비교해 주시죠.

도명학: 남한에 영화에 대해 가르치는 학과들은 있는데 시나리오만 전문 가르치는 대학이나 학과가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고,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등에서 수개월 짜리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수강생을 모집하는 경우를 봤습니다. 북한은 평양연극영화대학에 전문 시나리오 작가를 양성하는 영화문학창작과가 있고, 각도에 "조선영화문학창작사" 지부가 있어 해당 도내에 거주하는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 중 유망한 지망생들을 기성작가들이 개별담당제로 맡아 키우는 제도가 있습니다. 또 매해 전국을 대상으로 시나리오 공모전도 합니다. 북한은 시나리오를 영화에서 제일 중요하게 취급하기 때문에 남한에 비해 시나리오 작가 양성 시스템이 양호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 위한 별도의 조건 같은 건 남한이나 북한이나 따로 없는 것 같습니다. 누구든지 도전할 수는 있는데, 다만 재능과 노력, 혹은 운에 따라 성공하든 포기하든 하는 거죠.

MC: 북한에서는 연극 공연이 활발한가요? 한국은 연극이 영화보다는 인기가 좀 적지 않은가 싶은데 말이죠.

도명학: 북한도 연극보다 영화가 인기가 높은 편인데, 다만 혁명연극이라고 불리는 일부 연극은 영화보다 더 인기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MC: 선생님 보시기에는 어떤 종류의 문학작품(시,소설,시나리오 등등)이 작가의 입장에서 볼 때 더 어렵다고 느껴지시나요?

도명학: 저는 어느 종류가 더 쉽고 어렵다고 단정할 순 없다고 봅니다. 가령 시가 짧다고 쓰기 쉬울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데 사실 오해입니다. 제대로 된 시 한 편 쓰려면 경우에 따라선 두터원 장편소설 한 권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소설은 엉덩이로 쓰지만 시는 피로 쓴다는 말도 있듯, 문학에 더 쉬운 장르란 없습니다. 품을 얼마나 들이는가에 따른 것이지 어렵습니다.

MC: 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도명학: 수고하셨습니다.

MC: 청취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에디터 이진서, 웹편집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