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 너무 다른 남북 소설의 제주 4.3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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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북한에 계신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 시간입니다. 진행에 홍알벗입니다. 이 시간 탈북 소설가 도명학 선생님과 함께 남북한의 문학작품에 대해 이야기 나눕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도명학 : 네, 안녕하십니까.

MC: 얼마 전, 그러니까 지난 달인 4월 초 탈북자 출신 태영호 국회의원이 '제주 4.3사건은 김일성이 지시한 것'이라는 발언을 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먼저 '제주 4.3사건'이란 게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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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제주 4ㆍ3 평화공원에서 열린 '제69주년 4ㆍ3 희생자 추념식' 직전 희생자 유족들이 행불인 표석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연합 (RFA Traveler)

도명학 : 제주 4.3사건은 워낙 널리 알려진 사건인 만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1948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 7개월에 걸쳐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건이죠. 4.3이란 명칭은 1948년 4월 3일에 발생했던 대규모 소요사태에서 유래하였습니다. 2003년 한국정부가 발간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서는 이에 대해 제주도의 특수한 여건과 3.1절 발포사건 이후 비롯된 경찰 및 서북청년회와 제주도민의 갈등, 그로 인해 빚어진 긴장 상황을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단독선거 반대 투쟁과 접목 시켜 일으킨 사건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도 '자기 나름대로' 제주 4.3사건을 평가하고 있는데, 북에서는 '김일성의 통일정부수립노선에 따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해 제주도에서 들고 일어난 사건'인 동시에 '무고한 양민들이 학살된 사건'이라고 평가합니다.

MC: 그렇다면 태영호 의원은 이 사건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그리고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도 좀 짚어주시죠.

도명학 : 태영호 의원은 북에서 4.3사건을 '김일성의 지시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제주도민을 모욕한 발언이라며 사과를 요구하면서 논란이 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태영호 의원의 기억이 약간 헷갈린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틀렸다고 단언하기엔 어폐가 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론 북한측은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대한 김일성의 뜻에 호응해 제주도에서 일어난 인민 항쟁'이라고 하였습니다. 김일성의 직접적인 지시로 일어났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제주도당이 인민유격대를 조직해 투쟁을 이끌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왜 남로당 제주도당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그냥 제주도당에서 주도한 무장투쟁이라고 했을까요? 1948년이면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지도부가 대거 월북한 상태였습니다. 이어 6월 24일에는 남로당과 북로당이 정식 합당을 하고 이때부터 조선노동당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조선노동당 제주도당이 일으킨 사건이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비록 4.3사건이 남북노동당이 정식 합당을 선언하기 전에 발생하긴 했어도 박헌영이 북한에서 남로당을 지휘했습니다. 당연히 북한의 2인자가 된 박헌영과 김일성은 모든 노선과 정책을 공유했겠죠. 박헌영이 김일성 모르게 그 엄청난 사건을 제멋대로 일으킬 수 있었을까요? 김일성과 의논했을 것이 뻔합니다. 아마 4.3 항쟁이 성공했더라면 김일성의 현명한 영도하에 승리한 투쟁이라고 대놓고 선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진압되었기에 김일성이 직접 관여했다는 말을 안하겠죠. 왜냐면 북한에서 김일성은 실패하는 법이 없는 신이나 같은 존재인데 4.3사건을 일으키고도 실패했다고 하면 신격화에 큰 손실이죠. 아무튼 4.3사건이 박헌영이 지시했든 김일성이 지시했든 그걸 따지는 건 별 의미 없다고 봅니다. 노동당이 주도한 사건이라는 사실과 진압과정에 무고한 사람들이 많이 희생된 사건임을 인정하면 그만입니다.

MC: 그런데 이 제주 4.3사건을 소재로 한 '북한 소설'이 있다고요? 그리고 그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드라마도 있었다고 하는데 저만 몰랐네요, 글쎄요. 방영됐었다고 하던데 어떤 작품인지 먼저 간단하게 소개 좀 해주시죠?

도명학 : 4.3사건을 내용으로 한 작품은 남북한에 다 있습니다. 남한에도 "순이 삼촌", "섬 1948" 등이 있고 북한에도 있는데, 오늘 소개하려는 소설 "한나의 메아리"가 가장 심도 있게 4.3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MC: 그 소설을 쓴 작가는 어떤 인물인가요?

도명학 : 작가의 이름은 양의선인데 1942년 9월에 중국 산동성 제남시에서 태어나 해방 후 북한으로 귀국했고 신의주 제1사범대학을 나왔다고 합니다. 1974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랭동차 운전수"로 작가의 길을 걷게 된 그는 단편소설 "간척지에 핀 노을", "태풍", "불타는 노을", "피리소리", "거대한 날개", "제주도와 동백꽃", "한나의 메아리" 등 많은 소설을 썼습니다. 한편 수필도 자주 쓴 편인데 <시대와 녀성영웅>, <오늘도 울려오는 한나의 메아리> 등이 있고 평론으로는 「단편소설창작에 더 큰 힘을」 등이 있습니다. 창작 의욕과 열정이 왕성한 작가이긴 한데 이제는 나이가 80대 고령이라 현재 근황이 어떤지는 알려진 바 없습니다.

MC: 이 소설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소개해 주시죠.

도명학 : 작품은 1943년, 제주항에서 한 남자가 일본인 경찰의 조사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그는 일본인 회사에서 파업을 주동하여 감옥살이를 하고 고향인 제주도로 돌아온 강규찬이라는 인물로 작품의 주인공입니다. 강규찬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려 바다로 뛰어든 처녀 고진희를 발견하고 그를 건져내 목숨을 구해주고, 그의 집에서 머물게 됩니다. 처녀는 일제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죽으려 한 것인데 결혼을 해야만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겠기에 강규찬과 '위장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고진희는 강규찬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고 딸도 낳습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에게 가족을 잃은 강규찬은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고, 다만 고진희네 집 빚을 갚기 위해 열심히 일만 합니다.

그러다 1945년 해방이 되고 나서 강규찬은 ‘좌익’ 에 참여하게 되고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선거를 앞두고, 선거 반대 삐라를 만들어 붙인 처남이 미군에 의해 처형됩니다. 그때부터 미군과 주민들 사이의 대립이 심해지고 강규찬은 산으로 올라가고, 나중에 고진희도 산으로 올라갑니다. 마침내 인민유격대가 4.3 봉기를 일으키게 되고, 국방경비대 연대장과 인민유격대의 협상이 타결됩니다. 그러나 미군은 국방경비대와 인민유격대가 싸움이 붙게 합니다. 그리하여 사태가 더욱 치열한 상황으로 내닫고 무장대에 대한 국방경비대와 경찰대, 서북청년회의 대토벌이 강화되면서 대열 내에 변절자가 생기는 등 패색이 짙어지고 제주도당 책임자 김달삼과 강규찬, 고진희는 월북하여 평양에서 제주도를 대표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고 북한정권이 한반도의 유일하고 합법적인 통일국가로 건국된 정권임을 강조하는 식으로 마무리됩니다.

MC: 작가가 이 소설에서 말하려고 하는 건 뭔가요?

도명학 : 네. 그에 대해선 제가 누누이 설명하기보다는 이 소설을 각색하여 만든 드라마 속 다음의 대사와 설화를 인용하는 것이 더 정확하고 실감나게 와 닿을 것 같습니다. 드라마 제목 역시 "한나의 메아리"고 내용도 소설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먼저 4.3에 대한 북한의 시각을 보여주는 주인공이 군중에게 한 연설을 인용해보겠습니다.

동포 여러분!

오늘 이 거리를 진감하는 만세의 외침은

외세를 내쫓고 통일 독립된 나라를 세워

내 나라 내 민족끼리 화목하게 살아보려는

불타는 정의의 목소리입니다.

우리 민족의 위대한 태양은

영명하신 김일성 장군님이십니다.

일성 장군님 모시고,

통일조선정부를 세우자!

민족의 영수 김일성 장군 만세!!

다음은 드라마 결말 부분에 나오는 5.10 단선에 대한 북한의 시각을 보여주는 설화입니다.

”1948년 5월 10일. 이제는 남조선 전역에서 각 지구별 선거구와 선거장들을 중무장한 군대와 기동경찰대 땅크[탱크]와 장갑차들로 둘러싸고 억압적인 5ㆍ10단선을 강행하였다. 5월 10일 새벽, 제주도 인민들은 총과 수류탄, 몽둥이와 칼, 휘발유병, 낫과 망치, 돌과 삐라를 들고, 선거사무소와 읍사무소, 세무소, 신한공사, 경찰관사를 파괴 소각하였으며 도처에 망국적 단선을 반대하는 삐라를 살포하였다. 그리하여 5월 10일 당일만 하여도 외도, 오산, 무릉, 세화, 오지, 화순, 남원, 이리, 아리, 종문, 한석 등지에 수많은 경찰지서와 출장소들이 습격 파괴되었고, 원수들이 처단되었다. 인민들의 거세찬 투쟁은 적지않은 반동 지배층 내 동요와 분열을 조성하였으며 일부 선거위원단, 선거위원들은 사업을 포기하고 인민의 편으로 넘어왔고, 선거관 리만수는 사임하여 버렸다. 결국, 제주도에서의 5ㆍ10 단선은 완전히 파탄되었다.“

MC: 그렇다면, 태영호 전 의원의 발언과 이 소설에 담겨있는 내용이 비슷한가요, 어떤가요?

도명학 : 당연합니다. 물론 소설과 드라마 모두에 김일성이 직접 4.3사건을 일으키라고 지시하는 내용은 나오지 않지만 맥락을 보면 최종 배후 인물이 김일성이라는 짐작이 들게끔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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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당시 형무소에서 사살된 수용자들의 시신 /제주4·3평화재단

MC: 북한의 입장은 그렇지만, 제주 4.3 사건의 진실을 찾기 위해 설립된 '제주 4.3평화재단'이 파악한 당시 사건의 배경은 또 사뭇 다릅니다.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947년 3월 1일,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렸고, 제주읍에서는 북국민학교의 3·1절 행사가 오후 2시에 끝나자 군중들은 가두시위에 나섰다. 시위대가 관덕정을 거쳐 서문통으로 빠져나간 뒤 관덕정 부근에 있던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여 다쳤다.

이때 기마경찰이 다친 아이를 그대로 두고 지나가자 흥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고 관덕정 부근에 포진하고 있던 무장경찰은 군중을 향해 총을 쏘았다.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희생되었고,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그때까지 큰 소요가 없었던 제주사회가 들끓기 시작했다. 제주4·3의 도화선이라 불리는 ‘3·1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사망한 3·1사건에 항의하여 1947년 3월 10일부터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민·관 합동 총파업이 시작됐다. 제주도민의 민·관 총파업에 미국은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지목했다. 본토에서 응원경찰이 대거 파견됐고, 극우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서청) 단원들이 속속 제주에 들어와 경찰, 행정기관, 교육기관 등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빨갱이 사냥’을 한다는 구실로 테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시켰고, 이는 4·3사건 발발의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당시 한반도는 분단의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이반된 민심과 5·10단독선거 반대투쟁을 결합하여 경찰과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무장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기슭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350명의 무장대는 12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 단원의 집을 지목해 습격했다.

MC: 이같은 배경과 다르게 태영호 이원은 지난 2월 12일 '제주 4·3 사건'에 대해 "명백히 북한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촉발됐다"고 발언했고, 이에 대해 제주4·3희생자유족회는 폭동으로 폄훼한 극우 논리라며 태영호 의원의 국민의힘 당 최고위원 후보직 사퇴를 촉구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 사건을 바라보는 남한과 북한의 시각이 어떻게 다르다고 보십니까?.

도명학 : 한국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진영 간 평가가 서로 엇갈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이 사건을 양민학살에 중점에 두고 다른 한쪽에선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해 일어난 사건이라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남한은 여러 정치세력이 존재하는 다양한 사회여서 4.3사건에 대한 평가 또한 엇갈리고 있습니다만, 한국과 달리 북한은 일당독재고 획일적인 사회라서 다툼이나 논란이 전혀 있을 수 없다는 점이 다릅니다. 북한입장에서 제주 4.3사건은 미군정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불만과 통일정부 수립을 강조하며 5.10단선을 거부하라고 선동한 김일성의 뜻에 따른 김달삼 등 제주도당 공산주의자들이 이끈 영웅적인 인민항쟁인 것입니다.

MC: 이렇게 북한의 소설과 드라마, 그리고 역사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해 볼 때 선생님께서는 개인적으로 제주 4.3사건을 어떻게 보십니까?

도명학 :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역사적 사실 그대로 4.3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이 의도적으로 제주도민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단독선거를 파탄시키려 일으킨 무장봉기이며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 무고한 주민들이 너무 많이 희생당한 비극입니다. 이 두가지 측면 중 어느 한쪽만 강조하는 것은 편향된 시각과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MC: 오늘은 최근 태영호 의원의 발언 때문에 논란이 되고 있는 제주 4.3사건을 북한의 문학작품과 TV드라마는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살펴 봤습니다. 제주 4.3사건에 대한 도명학 작가의 의견은 RFA 자유아시아방송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도명학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도명학 : 네, 수고하셨습니다.

MC: 저희는 다음 주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기자: 홍알벗, 에디터: 이진서, 웹담당: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