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 시대를 안고 몸부림쳤던 월남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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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서울의 탈북소설가 도명학 작가와 함께 남북한의 문학세계를 들여다 보는 '남북문학기행'입니다. 저는 미국 워싱턴의 홍알벗입니다. 오늘도 도명학 작가와 함께 하고 았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도명학: 네, 안녕하십니까.

MC: 이번주로 월남작가 시리즈 세번째 시간인데요. 첫 시간에 잠깐 언급했습니다만, 월남작가와 탈북작가를 구분하는 기준은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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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1월 8일 유명 여류시인 모윤숙씨가 공산치하의 서울에서 유엔군의 도시 탈환 이전까지 산에서 숨어 지냈던 상황을 얘기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도명학: 네, 큰 틀에서 보면 월남작가나 탈북작가나 크게 다를 것은 없다고 봅니다. 둘 다 북한을 떠나왔다는 점, 공산체제를 경험했다는 점, 남한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점은 같습니다. 그런만큼 월남작가와 탈북작가를 구분하는 어떤 절대적 기준이 있는 건 아니고 지금 그것을 구분하는 건 북에서 내려온 시기를 가지고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월남작가와 탈북작가가 다른 점이 있다면 우선 북한을 떠난 시기가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월남작가들은 8.15 광복 직후부터 6.25전쟁 기간까지 북한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탈북작가는 그때로부터 40년, 50년 이상 상당히 긴 세월이 흐른 후에 북한을 떠났습니다. 그런만큼 연령 차이도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월남작가들은 이미 고령이고 이제는 거의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탈북작가 중에는 아직 30대 나이도 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탈북작가 중에 제일 나이 많은 분이 조선중앙방송에서 드라마작가를 하다 1995년 경 탈북한 장해성 작가인데 올해 연세가 만 80세입니다.

또 한 가지 다른 점은 월남작가들이 경험했던 북한과 탈북작가들이 경험한 북한이 많은 점에서 다릅니다. 월남작가들이 북한에서 활동하던 시기의 북한 체제는 아직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공산당이 집권했으나 도로, 철도, 항만, 제철소, 탄광, 광산 같은 큼직큼직한 것들은 국유화 되었지만 중소상공업은 사유재산이었고 자율 경영권이 보장되었습니다. 농촌에도 지주만 청산했을 뿐 부농, 중농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없어진 것은 빈농과 고농은 없어졌습니다. 토지개혁으로 빈농이든 머슴이든 할 것 없이 토지를 분배받았기 때문에 모두 자작농이 된 셈이었습니다.

또 정치적으로도 월남작가들이 경험했던 북한은 아직 사회주의 사회라고 불리지 않았고 인민민주주의 제도라고 했습니다, 종교도 핍박은 받았지만 교회도 있고 성당도 있고 절도 있고 무당도 있었습니다. 김일성 유일사상체계, 유일독재체제가 깊이 뿌리내리기 전이어서 공산당 내에 파벌이 많이 존재했기에 김일성 자신이 정적들의 공격을 받곤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정치범 수용소라는 것도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일당독재 체제일망정 당시는 1인 독재 체제라고 하기엔 거리가 좀 있었습니다.

그러나 탈북작가들은 그 시기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해방정국도 전쟁도 복구건설 시기도 살아보지 못하고 거의 다 1958년 이후 태어났습니다. 북한이 정식 사회주의 국가로 된 것은 1958년입니다. 전쟁 직후부터 시작된 농업협동화가 그해 완료되었고 남아있던 부농도 중농도 없어지고 농사짓는 사람은 전부 협동농장원이 되었습니다. 도시에서도 개인상공업이 모두 생산협동조합이 되거나 국영기업에 인수되어 상공인들이 모두 근로자가 되었고 천리마 운동이 한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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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그린 태극기를 들고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평양의 한 학생과 엎드려 있는 북한군 병사.(1951년 10월) /연합뉴스

탈북작가들이 경험한 북한은 이 시기부터고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에 걸쳐 이어지는 세습 정권을 경험했습니다. 또 문학에 있어서도 월남작가들이 배운 문학과 탈북작가들이 배운 문학이 다릅니다. 예컨대 월남작가들은 작품의 종자에 대해 말하면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탈북작가는 남한에서 새로 공부해 등단한 경우를 제외하곤 북한에서 종자론을 작품의 가장 중요한 핵심 가치로 배웠고 종자론에 입각해 작품을 구상했습니다.

이런 점들로 인해 월남 작가 작품과 탈북작가 작품이 비슷하면서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MC: 월남작가의 작품과 탈북작가의 작품이 각각 갖고 있는 개성, 특성이 있다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도명학: 가장 차이가 보이는 것은 남북문제, 분단문제를 다룬 월남 작가들의 작품 중에 반공 색채, 즉 남북 이념 대결에서 비롯된 감정 같은 것이 진하게 느껴지는 작품들이 많습니다.

반면 탈북작가들의 작품은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반공적인 색채가 느껴지는 경우는 별로 없고 대개 인권과 통일을 이야기합니다. 또 월남작가들이 쓴 작품은 너무 오래전 북한을 경험했기에 탈북작가 작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리얼리티가 약한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탈북작가 작품의 단점은 리얼리티는 강한데, 작품성은 좀 약합니다. 월남작가들에 비해 창작활동 경험이 짧아 쌓인 내공이 작고, 문학을 정규 교육 과정을 통해 배운 적 없는 사정 등 아직 시간이 좀 더 걸려야 리얼리티와, 뛰어난 기교가 어우러진 작품들이 나올 듯 합니다.

MC: 그럼 월남 작가나 탈북작가를, 또는 그들의 작품을 북한에서는 알거나 접할 수 있나요?

도명학: 현재로선 불가능한 얘깁니다. 월남한 작가가 있다는 건 알아도 누가 월남했는지 당국이 알려준 적 없으니 전혀 모릅니다. 있다면 제가 남한에 온 것을 아는 지인 몇 명 정도 있듯 탈북작가들의 가족 친척 지인들이나 알 일입니다. 그러니 월남작가 작품이든 탈북작가 작품이든 북한에서 접할 가능성 자체가 희박합니다. 한국 영화, 드라마, 노래 같은 것은 북한에 유입된지 오랜데 아직 텍스트로 된 문학작품은 들어갔다는 말을 못들었습니다. 다만 제가 북한에 있을 때 중국 조선족 잡지사에 게재된 남한 단편소설 한 편 읽은 적은 있습니다. 설사 월남 작가 작품이 북한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프로필이 붙어있지 않다면 월남 작가인지 토배기 남한 작가인지 알지 못하고 보게 될 것입니다.

MC: 그럼 오늘 소개해 주실 작가는 누구인가요?

도명학: 월남 여류 작가 임옥인 소설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MC: 소설가 임옥인 작가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도명학: 임옥인 작가는 소설가이고, 수필가입니다. 또 대학에서 교수로도 재직한 교육자입니다. 1939년부터 어언 52년 남짓 동안을 한국 문단의 거물 여성 작가로 활약하다 1991년에 은퇴했습니다. 출생한 곳은 함경북도 길주군이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을 거쳐 일본 나라여자고등사범학교, 현재의 일본 나라 여자대학교에서 전문 학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임옥인 작가는 1939년 잡지 "문장"에 "봉선화"라는 작품으로 등단했고, 1940년 "후처기"라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창작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 든 뒤 "전처기", "산" 등을 발표했습니다. 8·15 광복 후에는 가정여학교를 설립하고 농촌여성 계몽운동에 투신하다가 월남 후 남한에서 "부인신보", "부인경향" 편집장을 지내면서 단편소설 "수원", "풍선기", "나그네", "낙과》" 등을 발표했고. 이 후 "그리운 지대", "월남전후", "일상의 모험", "힘의 서정" 등의 장편소설을 발표했으며, 창작집 "후처기"를 간행했습니다. 특히 작품들 중에 1957년에 창작한 소설 "월남전후"로 아시아 자유 문학상을 수상했고, 이후 대한민국 예술원상, 대한민국 여류문인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MC: 임옥인 작가의 작품이 갖고 있는 특징이 있다면 뭘까요?

도명학: 임옥인 작가는 세련된 문체로 여성의 수난을 주제로 한 다수의 작품을 발표한 것으로 더욱 유명합니다. 임옥인 작가는 가장 안정된 수준의 작품들을 한결같이 발표한 작가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임옥인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면 남달리 섬세한 시각과 성격묘사의 치밀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임옥인 작가의 작품에서 여주인공은 늘 능동적으로 현실을 개척해나가는 신여성입니다. <후처기>나 <뜰에 핀 백합화를 보아라>에서 여주인공은 남성에게 성의 대상으로 종속되어 그의 돈으로 사치와 허영에 들뜬 수동적이고 전통적인 여성과 대비됩니다. 여주인공은 스스로의 힘으로 현실을 개척하기 위해 능력을 키웁니다. 또 자신의 순결을 자존심과 함께 지킬 줄 알고. 때로 배반적인 세상과 문명 앞에 나약해지지만 신앙의 힘으로 극복해나갑니다.

다만 임옥인 작품 속 여성상은 적극적이지만 자아 계발과 극복 의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주제가 사회, 정치적 문제로 확장되지 못한 순수문학의 한계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MC: 작가들 중에 창작활동 외에도 많은 활동을 하는 것으로 압니다. 임옥인 작가도 학교를 세웠던 것으로 아는데, 어떤 활동들을 했나요?

도명학: 임옥인 작가는 사회적 활동에도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1945년 8ㆍ15 해방 후 새사회 건설에 기여하고자 함경남도 혜산군 대오천이라는 고장에 가정여학교를 설립하고 농촌여성 계몽운동에 투신했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 감정이 묘했는데, 대오천은 제가 살던 혜산시에서 통근열차가 매일 오가는 곳이고 저의 처가가 있던 곳입니다. 해방전부터 큰 장이 서던 곳으로 일명 걸치기장이라고도 불리던 곳으로 조선 북부 지역을 순회하는 장사치들이 반드시 걸쳐가는 시장이라고 걸치기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으로 지금도 열흘에 한번씩 장날인데 당일 사처에서 장보러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곤 합니다. 아무튼 임오인 작가는 이 고장에서 무지하고 몽매한 농촌 여성들을 계몽하는 것이 해방 된 새 나라 건설에 의미있는 기여가 될 것이라는 사명감을 안고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공산당 치하에서 맞지 않으면서 고충이 심했고, 북한에서는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뜻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이듬해 1946년 월남을 단행하게 됩니다. 당시 상황을 실감있게 전해주는 것이 작가의 수작(으로 꼽히는 소설 "월남 전후"이고. 이 작품이 국제적으로도 주목 받아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월남 후에는 창덕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창작활동을 병행했는데, 잠시 미국공보원 번역관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MC:특히 작가들 중에, 독립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이들이 많은데, 이들이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어떻게 크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요?

도명학: 펜은 칼보다 강하고, 총알이 닿을 수 없는 곳에도 한 편의 시는 가닿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 글을 쓰는 작가가 독립운동이나 민주화 운동 등 사회 정의를 위한 일에 참여하면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문학의 힘이 사회변혁과 진보, 정의 구현에 지대한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의미고, 또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립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 전혀 관심 없는 순수 글쟁이보다 시대가 부를 때 서재 구석에 숨지 않고 용약 운동에 뛰어든 문인들이 후세에 길이 남을 이름을 남긴 경우가 태반입니다. 작가는 시대를 안고 몸부림치는 존재여야 하고 그것이 앙금이 앉으면 명작이 탄생하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MC: 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선생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도명학: 네, 수고하셨습니다.

MC: 청취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에디터 이진서, 웹편집 이경하